소똥

도현종
  • 1183
  • 2018-08-30 19:39:40
소똥

내 어렸을 적엔 마차, 우마차가 짐을 싣고 도로를 오갔다. 그렇다고 하여 이게 까마득한 옛날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화물차가 이들을 몰아내고 화물 수송 일을 대체한 것은 기껏 50여 년 밖에 아니 된다. 이제 나는 초등학교 때 목격한 슬픈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교 길에 우마차가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잔뜩 땔나무를 실었는데 언덕길에서 멈추면 뒤로 주르르 미끄러질 형편이었다. 소를 모는 주인은 기다란 나무를 끌어내더니만 소잔등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그러자 게거품을 마구 흘리며 소는 가까스로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 눈에 주인이 무섭기도 하고 너무 미웠다. 커다란 눈을 가진 슬픈 그를 다시금 떠올린다.

소싯적엔 왜 그리도 동상들을 많이 걸렸는지, 내성이 약한 이들은 겨울엔 동상을 달고 살았다. 대개 지체부(肢體部)인 손, 발에 동상이 걸리곤 하였는데, 이 병에 걸리면, 환부가 부어오르고 몹시 가렵기 때문에 환자는 견디기 어려워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허나, 당시엔 백약이 무효인지라 이들은 그저 겨울이 물러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기발한 처방들이 적지 아니 사람들의 귓가를 솔깃 울리고 지나갔다. 

하나를 떠올린다. 우마차들이 거리를 지날 때, 우마가 똥을 쌀 때가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이 대야만한 크기로 큰 무더기를 이루며 도로 한가운데를 거리낌 없이 차지하고는 위엄을 뽐내곤 하였다. 양말을 벗고 갓 싸놓은 소똥 속으로 맨발을 넣고 한동안 서있으면 동상이 치료가 된다. 처방치고는 사뭇 망측(罔測)도 하구나. 아마 김이 뭉긋하니 솟아오르는 저 똥무더기가 너무나도 포근하게 느껴져 그를 빌리면 동상이 고쳐지리라 여겨졌을 것이다.

나는 오늘 바로 이 유감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라는 희망의 기둥을 던져버리고 소똥에 발을 담그고 백여년만에 끝나버린듯한 감리교회 빗소리처럼 애잔하다.

크고 웅대하면 회장되는 비진리의 계산법 얼마나 편리한 셈법인가? 너무도 뻔뻔하다.

요셉의 커다란 실수이다.
요셉은 노예 생활 때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어도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오.>한 그였다.

훗날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한 후 얻은 것이 무엇인가. 요셉을 애급 인으로 완전 귀화시키기 위하여 애급의 국교인 태양신 제사장 보디벨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케 하였다(창41:45) 아스낫이란 애급의 여신인 네이트에게 속한 자라는 뜻으로 완전히 우상 숭배자이다. 요셉은 당연히 이 결혼을 거절했어야 했다.

아스낫과 결혼은 요셉에게 가져온 지참금을 상상해 보시라. 궁궐 같은 저택, 값비싼 가구, 수없는 노예들 요샛말로 한다면 돈 방석에 앉았으니 요셉이 과연 행복하였을까. 

요셉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요셉이 첫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다. 므낫세는 망각(妄覺)이라는 뜻으로 요셉이 과거의 고난을 다 잊어버리고 오늘은 행복하다는 뜻이다. 요셉이 거기에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고난과 함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아버지 야곱의 신앙까지 잊어버렸다는 뜻도 암시하고 있다. 요셉이 둘 째 아들을 얻자 에브라임이라 하였다. 에브라임은 창성(昌盛)이라는 뜻으로 그의 후손은 후일에 우상종교로 전락하여 멸망한 북(北)왕국과 사마리아족의 조상이 되었다.

요셉은 금방석이고 백성은 소똥에 발을 담그고 있는것이다.                                          
엄동설한 소똥 위에 맨발로 서있는 가여운 동상 환자를 떠올리고 있다. 감리교회 아마 소똥을 구할 수만 있다면, 며칠이고 그 속에 맨발을 담그고 덜덜 떠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머릿속으로는 결코 동상이 치료되리라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면, 권력표를 구걸하는데 효험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이리 가서 거짓 눈물 흘리고, 시름에 잠긴 모습을 보이는 듯한 모습에 이골이 난 감리교회 교권이다. 청산이란 말은 요란한데 뭐 별로 시원한 성과는 없다.

나는 소똥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저들에겐 실로 소똥도 아깝구나.

교활한자는 안망한다가 감리교회 표어가 아니되기를 바란다.


 

이전 오재영 2018-08-30 우리의 오만방자(傲慢放恣)함 두렵지 않은가?
다음 함창석 2018-08-30 감리회 앙탈(怏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