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감사하며

도현종
  • 1511
  • 2018-09-03 18:52:43
아내에게 감사하며

피바람 이겨낸 사육신 핏줄 순천 박씨 충신 박팽년 후손 아내에게 감사하며

1456년 6월 사육신을 포함한 충신들이 피바람속에 숨져간지 몇달이 흐른뒤에

그해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교동 현감 댁에서는 같은 날 두 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취금헌 박팽년의 손자였고 또 한 아이는 노비의 딸이었다.

핏덩이를 손에안은 박대감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시할아버지 박중림과 시아버지 박팽년의 5형제, 남편 박순을 포함한 3형제까지 집안의 남자 9명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종을 보위하려던 충절의 이유로....

시어머니와 동서등 집안의 여자들과 다행히 사형을 면한 사촌 시숙들은 노비가되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3족을 멸하는 잔혹한 형벌탓이다.

아버지인 교동 현감이 철근의 친정댁 관노비로 갈 수 있었던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그러나 갓태어난 사내아이는 곧 죽음이 예정 되어있었다.

"아이가 사내면 죽이고 계집 아이면 관노비로 보내라"는 나라의 엄명이 있었다.

걱정이 태산 같은데 마침 친정댁의 한 노비가 같은 시기에 딸을낳았다.

며느리는 살길에 무릎을쳤다. 서로 아이를 바꾸면 이 아이는 죽음을 면하리라.’ 박팽년의 손자는 이렇게 현감 노비의 아들 ‘박비‘라는 이름으로 충신의 목숨을 이어가게됐다.

종가는 그렇게 뿌리를이 었지만 그후 고려말, 조선초 쟁쟁한 고관대작을 낳은 집안의 후손들도 다수가 하급관리나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현대에와서도 낡은 초가집 3채뿐이었다. 그 초가집 앞으로 나라에서 내린 홍살문과 후손과 유림들이 만든 사우만이 박팽년 후손임을 알려주고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충신의 가문은 아름답게 가난하다.

청백리로 꼽히기도했던 박팽년의 족보에는 다양한 일화들이 전하고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함께 자랐는데 성격은 서로 달랐다. 삼문이 농담도 잘하고 담소를 잘하고 앉고 눕는것이 절도가 없어서 외면으로 봐서는 허술했으나 내심이 확고했던 반면, 박팽년은 종일토록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있어서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세조가 “너는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하며 녹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이 일은 군주에 대한 반란이다.”라고 질책했다. 박팽년은 자신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쓴 적이 없으며, 받은 녹봉은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쌓아두었다고 받아쳤다.
세조가 확인해보니 과연 장계에는 ‘신(臣)’ 대신 ‘거(巨)’라는 글자가 있었고, 녹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박팽년은 한마디 말이 국가를 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망하게 하는 것은 금방이라며, 임금이 바른말을 좋아해서 인재를 등용해야지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이들을 가까이 한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 될 것이라 단종을 가르치면서 충고했다고 한다. 

역시 만고 불변의 충신은 다르다.

감리교회 언제나 예수님의 길을 이어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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