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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의회제도와 깡패 패권주의 그리고 감리교회
관리자
- 1867
- 2018-09-29 17:39:06
자신들이 충성해야 할 특정 대상이 있음이다.
감리회의 정치가 정당정치인가? 아니다.
정당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정당정치가 아니다.
그런데 왜 파당이 발생하는 것일까?
감리교회가 학연정치인가? 아니다.
학연이란 선교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은 곳이 다를 뿐이다.
학연이란 감리교회 내에 존재하는 목회자들의 출신의 다름일 뿐이다.
장로들은 이 출신과 무관하다.
그러니 학연 정치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엔 학연정치가 존재한다.
모든 이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학연 정치를 뛰어 넘어야 감리회의 정치가 올바르게 될 것이다.
감리교회는 의회제도이다.
의회제도란 학연이나 파당이나 이 모든 것을 떠나 의회의 결정을 통해 모든 일들을 결정하고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러 감리교회의 최고의 권력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 있다면 의회인 것이다.
총회, 연회, 지방회, 구역회, 당회를 비롯한 각종 회의제도를 통해 모든 감리교회는 정치적인 것이나 행정적인 것이든 모든 것을 결정하고 수행하게 되어있음이다.
만약 의회 제도를 거치지 않은 정치적 결정과 행정은 아무리 의롭고 보기에 좋아도 그것은 월권이되며 직권남용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과 직권남용이 판을 치고 있음이다.
이렇게 월권과 직권남용이 판을 치는 것은 감독제도라는 또 다른 축이 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감독제도이다.
그러나 이 감독제도는 감독의 독제를 뜻함이 아니다.
그래서 의회제도를 기초로 한 감독제도가 감리회의 기본 정치 조직체계이자 제도이다.
감독은 각종 의회제도에 있어 의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각종 의회제도를 이끌어갈 수장의 모습이며 의회제도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잘 수행이 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것이 감독인 것이다.
그러나 감독제도는 늘상 그 권력의 한계를 넘어 직권을 남용해 왔다.
감독제도는 독제가 아니다.
감독제도는 의회제도를 위해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일 뿐이다.
그런데 왜 감독제가 독제가 되가는가?
그것은 감리교회 내의 정치적 실력이 후진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감독 독제를 위한 의회민주주의가 되고 있음인 것이다.
감독 독제를 위한 의회민주주의란 사실상 의회제도의 실종을 의미한다.
감리교회는 각종 의회제도를 통해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하여 모든 일들을 수행하게 되어 있지만 실상은 밀실정치가 판을 친다. 의회제도를 이용한 감독들의 밀실정치 말이다.
당회와 구역회에 진정 의회 민주주의가 있음인가?
지방회에 진정 의회 민주주의의 모습이 보이는가?
연회와 총회는 또 어떤가? 진정 의회 민주주의 제도가 활성화 되고 있음이라 생각을 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밀실정치만 활성화 되고 있음이다.
어떤 의제가 있다면 그 의제를 두고 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밀실정치가 활성화되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감독(회장)과 감리사에 의해 밀실정치는 의회제도라는 세탁방법을 통해 의회민주주의를 가장한 결정과 판단을 한다.
감리교회는 의회제도를 기초로한 감독제도라 하지만 결국은 의회제도의 민주성은 사라지고 감독제도만 남아 있음이다. 그래서 감독제도는 독제가 된다. 그래서 또 다시 밀실 정치화가 된다.
이 밀실정치는 또 다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래서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기도 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세속 정치의 쓴맛 단맛 가운데 닷만은 사라지고 쓴맛만 남아 있는 듯 싶다.
이 쓴 맛은 결국 감리교회의 헌법인 교리와 장정을 뛰어넘는 불법을 자행하게 된다.
교리와 장정은 또 다시 민주주의의 기본 정치 체계인 삼권분립을 그 기초로 삼고 있음이다.
사법권과 행정권 그리고 입법권이 분리되어야 하고 서로 견제하고 서로 감리교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함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특성상 사법권과 행정권 그리고 입법권의 독립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실로 믿음으로 바로 선 사람이 아니고선 이 삼권분립을 교회 내에서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이니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유익이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 됨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빛은 흐려졌고 소금은 맛을 잃은 지 오래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라져가고 있음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현 감리교회에서 진실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왕따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것을 교회의 타락함이라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성도들의 타락이라 할 것이다.
교회가 타락함으로 돈을 쫓고 권력을 쫓기 위해 선교와 부흥이란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성도가 타락함으로 돈을 숭배하고 권력에 아부를 하게 되며 줄을 서게 되며 교회를 위한하는 명분 하에 교회의 주인이 되려 한다.
이것이 교단적으로 교권의 패거리가 되어 나타난다.
교권의 패거리가 교리와 장정을 따른다면 어쩌면 그것은 교회 정치의 활성화가 되고 부족한 의회 제도를 보충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권의 패거리가 이렇게 되기 위해선 투명해야 한다. 밀실정치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꼼수는 정치가 아니다 꼼수는 꼼수일 뿐이다.
밀실정치는 야합과 담합일뿐 정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밀실정치를 행하지 않는 교권의 패거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대하기엔 감리교회의 정치 목사들과 장로들의 수준이 그렇게 되지 못함이다.
결국 정치 목사와 장로라 하면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거나 타락한 성도의 표본이 되고 있음이다.
밀실정치를 행하지 않는 교권의 패거리란 각 종 부서의 위원들을 지칭함이다.
비선이 아닌 실선 임원들에 의해 투명한 정치가 이뤄져야 함인 것이다.
타락한 성도들이 교회의 타락을 부축이고 교회의 타락은 밀실정치를 통해 교권의 패거리를 만들어 낸다.
교권의 패거리들은 교리와 장정을 따르지 않고 의회제도의 모든 결정 사안들을 조정하려 한다.
자기들 마음대로 감리교회를 좌지우지 하려 함이다. 그래서 직무유기다 다반사이며 직권남용이 일반적이고 월권이 판을 친다.
결국 교리와 장정은 허울에 불과하다,
결국 의회 민주주의 또한 허울일 뿐이다.
그래서 깡패 패권주의가 감리교회 안에 가득하다.
깡패가 무엇인가?
불법임을 알고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패거리를 이루고 힘을 과시하며 위법적인 행위들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인 것이다.
보라, 선거무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감독회장이라 집착을 보이는 이와 그 패거리가 있음이다.
보라, 총특재의 판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감독회장 직대라고 집착을 보이는 이와 그 패거리가 있지 아니한가 말이다.
교권의 수장이 되었다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총특재 위원들을 기피, 해촉, 자격없음이라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것은 직권남용이며 월권이다. 그러므로 독제인 것이다.
교권의 수장이 되었다고 패거리를 이루어 총실위에 대하여 불참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은 의회제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깡패적인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감리교회는 의회 민주주의 제도가 실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깡패 패권주의자들이 춤을 춘다.
깡패 패권주의자들에 의해 감리교회는 멍이들고 상처를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이 죽어가는 감리교회를 소생케 할 수 있을까?
오직 주님만이 그리 하실 수 있으리라.
오직 주님의 자녀된 자들만이 그리 하려 할 것이다.
모든 감리교도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