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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양칠성님
도현종
- 1129
- 2018-10-23 02:47:29
이 묘지에 양칠성이라는 한국인의 묘가 있다. 야나카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가 일본인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양칠성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찾았다. 1975년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독립투사를 생각하며 충신과 간신의 글을 올린다. 감리교회에 주님앞에 진실한 충신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존경하는 그분과의 약속이 지켜진것을 감사한다.
양칠성은 1919년 전북 완주시 삼례면 출신이다. 인도네시아에 끌려와 자바섬의 치마히 수용소에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군무원으로 일했다. 군무원으로 일하면서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들어 항일활동을 했다.
그후 다시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하기 위해 들어온 네덜란드군에 맞서 코마르딘 이란 이름으로 싸우게된다.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49년 8월 10일 함께 붙잡힌 일본인 2명과 함께 총살당한다. 그는 총살당하면서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 독립(메르데카)을 원한다"고 외쳤다.
양칠성은 일본인 야나카와 시치세이로 알려져 있었고, 그 이름으로 비석이 세워진다. 그런데 묘지 재매장 현장을 참관했던 일본인 부부 우쓰미 아이코씨 교수와 무라이 요시노리교수는 다른 두 명과 달리 연고가 전혀 없었던 야나카와 시치세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조사를 하다가 야나카와 시치세이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역사 학자들조차 거의 몰랐던 양칠성은 1995년이 되어서야 야나카와 시치세이에서 양칠성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고, 2008년에는 고려 독립청년당 활동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인에게 부끄럽다.
감리교회 성령안에서 충신으로 살아야한다. 이것이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