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의 자랑인 토착화 신학의 발전방향

현종서
  • 1600
  • 2018-10-31 21:53:17
한국의 토착화 신학의 원조는 최병헌으로 본다.

그는 <성산 명경> <만종일련>을 통해 타종교와의 대화를 한후 결론은 모든 종교가 인간구원을 위해 애쓴 것이나 미흡하고 결함이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그미흡함과 결점을 해소되므로 다른 도를 따르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논리이다.
그는 기독교의 한국종교문화세계에 토착화하기 위해 비교종교론을 펼쳤다.

그의 맥을 이은 이로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등을 말하는 데, 최 병헌이 토착화 신학의 총론을 말하였다면 윤,유,변은 각론을 말하였다고 본다. 그 학풍은 좀 더 바른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윤성범은 유교중에서도, 한국유교인 성리학과 대화하며, 그들의 추구하는 종교의 핵심을 말한다면 "성"인데 이것의 실현이 기독교의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유동식은 한국 무교를 연구하며 기독교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 무교는 노래와 가무와 기도를 좋아한 낙천적 종교인데 기독교에도 찬송과 기도 그리고 낙관적 세계관이 있다. 어쩌면 저 민족 고유의 풍월교가 찬송과 기도, 긍정적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의 전신형태가 아닐가? 우리민족의 원시종교의 미흡함이 기독교에서 완성된 모습으로 실현된 것은 아닐가 하는 가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변선환은 유신론 그것도 인격적 유일신론의 기독교와 무신론의 기독교와 대화를 하다보니 애초에 대화가 안되지만 윤리적인 행실의 공통점 즉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두고 결실이 같으니 근원도 같은 것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접근한 것 같다. 비슷하지만 기독교에는 그들이 못가진 게 있는 데, 그것은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인간을 괴롭히는 용을 처치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 인간을 괴롭힌 용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적으로보면 죄와 고통과 사망이며 불교가 해결 못한 이일을 해결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이다.

그분의 불교와의 대화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분의 넓은 실험신학의 노력속에 이런 방향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후학들이 그 스승들의 노력을 어떻게 계승하고 그들의 장단점을 어떻 계승 보완해 나가느냐 하는 데 따라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으로 봅니다. 그 스승들은 신이 아니고 역시 인간적인 한계 또한 지닌 분들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스승들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더 성숙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제자된 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인간학을 헤겔이 잘못계승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연장인양 일원론적으로 설명하고, 포이엘 바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하나님으로 바꿔 이해하고 니체와 맑스는 진화론적 유물론적 인간이해를 통해 공산주의를 만들어 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의 인간학적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낸 이가 바로 칼 바르트이다. 인간을 생물학, 심리학,철학으로 제대로 알 수가 없고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한 신학을 통해 그의 근본적 질문인,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 가? 무엇을 해야 만 하는 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 가의 인간학적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읽음으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인간도 알게 되고 칸트의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는 인간자체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잘 알 수가 없으며 창조자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이 됨으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교회 교의학으로서 칸트의 질문에 응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최병헌은 현대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성경을 깊이 읽은 사람이다. 그래서 동양종교에 대해 그 한계를 알고 그 미흡함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윤성범은 유교인들에게 그대들이 추구한 "성"의 진정한 실현자, 그 자체가 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유교세계에 넌지시 제시한 것이다.

유동식은 풍월교가 무언지 아는 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 우리민족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섬기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만들어져서 나타난 종교가 한국에 전래 되었는데 그 나타난 종교현상이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우리민족의 종교적 이상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하며 나는 그 예수를 선택할텐데 여러분들은 알아서 하라는 식의 고도의 전도방식을 취하였다.

변선환은 불교여러분,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금욕하고 선의 수행하고 어느정도의 경지에 까지 이른다. 그런데 죽음의 고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죽음을 이기신, 그 용을 처치하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불교도 좋아하고 불타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리스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분으로 우주적인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선택하려 하오. 당신들 불교의 수행방법에 정직하게 철저히 수행하다 보면 결국 여러분들이 고통하며 해결하려고 애쓴 그 문제의 해답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그대들도 알 게 될 것이오.

나는 이것이 변선환의 본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문제는 후학들이 그의 신학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있다. 잘못 발전시키면 변선환의 신학을 다원주의 신학으로 만들어 버릴 수있고 그를 이단의 늪에서 끌어내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세 분은 모두 실험신학을 한 이들로 본다. 그런데 변선환의 경우는 타종교와의 대화도 좋지만 교회의 내부적 소리에도 겸허히 귀를 귀울이며 그 실험신학을 실험이라는 임시성으로 말하지 않은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WCC의 신학에 보조를 맞춘다고 하여 올바르고 권위있는 신학은 아니다. 자기 신학의 불완전성과 실험성을 인정하면서 한국교회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반성을 거듭하였더면 더 원숙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미 그 자체가 권위를 지니고 있고 책으로 학문이 깊지 못한 이에게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통해 그 핵심을 깨닫게 해주는 일반 학문이나 종교서적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시간과 공간 문화에 역사에 제한되는 진리가 아니다. 인간의 차원 넘어에 계신 영생 생존 무소부재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에 근거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진리를 타종교문화에 효과적으로 전달함을 돕고자 한 토착화 신학이 효과적인 진리 전달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이론적 시도로 끝나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기독교의 계시적 진리를 일반종교 진리와 대화하고자 상대화하는 우는 반성해야 한다.
타종교가 기독교와 비슷한 점만 말하지 말고 다른 점 그리고 기독교 진리의 독특성을
밝혀야 한다.

신학하기 이전에 먼저 진실한 크리스챤, 성령충만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또는 신학을 하면서도 크리스챤으로서 성화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신학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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