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방법론 문제

현종서
  • 1347
  • 2018-10-29 22:30:17
한국감리교회 신학의 정체성문제는 감신의 두교수의 감리회 회원권 박탈과 관련하여 크게 불거졌었고
연구와 반성과 논의를 거쳐 "열린 복음주의"라는 말로 일단 정리된듯 하다. 그러나 아직도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계승하는 것이 감신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며 고집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독교회는 적이 없이 순풍에 돗단듯 성장해 가는 단체가 아니다. 우리가 믿는 신조와 신앙생활을 파괴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의 공격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기독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면 그를 음으로 양으로 대적하는 사탄적인 활동이 있다.

교회 외부적으로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유물론,유아독존 인간론, 맑시즘(또는 네오맑시즘적사회주의),인간이성 의 최고우위론, 교회 내부적으로 각종 이단들(통일교회를 비롯한 여호와의 증인,신천지, 하나님의 교회등처럼 성경의 기본구원메시지를 다른 철학으로 외곡시켜선전하는 종교집단)이 기성교회의 약점을 파고들며 교회의 파괴를 획책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친교단체인 WCC에 파고 들어 맑시즘을 믹서하여 영적 구원, 내세구원이 아닌 현세적 안녕을 추구함으로 기독교의 기본구원교리를 왜곡하는 이념( 종교다원주의등 )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교회의 신학의 존재이유는 교회를 세상의 각종, 종교와 사상들로부터 교회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내고 타 종교와 이교적인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변증적인 이론을 찾아내고 인간이성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진리인 "예수 드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설득하여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계시 진리앞에 참 진리로서 수용굴복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일로 본다.

기독교인은 복음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와 주님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를 말한다.
교회 다니는 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아직도 복음을 바로 못들어,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도 있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와 성령체험을 통해, 아직 성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장해 가고 있는 신자들이 있다. 어떤이는 영적 어린 아이, 어떤이는 청소년, 어떤이는 성년일 수 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중 하나는 영적 성년이 되지 못한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그것도 부패한 사회정치를 흉내내어 중직이나 고위직으로 나서는 데 있다.

본인은 여기서 그런 교회정치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신학문제에 촛점을 두려 한다. 구미신학계의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인간 이성을 최고의 척도로 인정하여(즉, 성경의 증언도 인간 정신의 산물로 그의 심판하에 둔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서 인간이성위에 있는 절대진리로 본다. 그 성경에 대해 여러 논란이 이있을 지라도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모든 신앙과 생활과 신학의 원천이요 표준이요, 척도요, 최후의 재판정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 신학, 그중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성경의 증언을 우선 최고의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속에 매인 상대적 진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에 의해서 재단되고 현대 사조에 맞추어 재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변전하는 철학사조와 문화에 민감하개 반응 하며, 그것에 맞추어 성경의 진리를 재해석해 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 성경을 몰랐다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신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인간이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도, 우리가 그의 계명을 어겨 죄인이 되고 그래서 우리의 전 존재가 (이성을 포함하여, 감성과 의지까지) 부패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인 거룩성과 사랑의 성품은 물론이고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도 없고 기본적으로 죄인에게 주어진 저주아래 살다가 죽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보수신앙이란, 또 정통 신앙이란 또 복음주의 신앙이란 성경의 메시지를 유무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읽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 진리를 깨닫고 믿어지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말씀과 기도의 경건 훈련을 계속하며 성령께 더 철저히 순종하다보면, 의로움과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전도도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란 정통진리를 지키면서 신학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과 또 다른 것으로 이미 주어진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받고 인정하고 체험하려 하기 보다 철학 사상이나 종교사상과 대화하여 내가 배우고 체험한 기독교의 진리와 사상을 그들의 사상과 용어로 설명하려 하기(이것은 초대 교회 교부들의 노력)가 아닌, 그들의 사상과 용어로 기독교의 진리를 연구자가 알든 의식하든 못하든 변조시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 역시 시간과 공간 문화 그리고 역사의 한 산물로 보기에)

여기서 우리는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요,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나를 포함한 인류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다는 신앙의 고백의 바탕위에서 각종 철학이나 종교사상을 접하여 우리 기독교의 진리와 사상을 변증하려는 노력으로 그들의 사상을 연구해야 하며, 결국, 기독교-유교-기독교, 기독교-불교-기독교로 나온 후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기독교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종교나 철학사상의 논리에 접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따라가다보면 유교 또는 불교의 논리가 "더 정교하고 심원하고 역사가 깊고 박식하고" 하는 타 종교에 빠진 듯한 소리를 내게도 되는 것이다. 타종교인을 구원하겠다고 타종교를 공부하다가 내 가 그 종교인이 되어 그 종교를 선전하며, 기독교를 팔아넘기는 일도 하게되는 불상사가 생겨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 학자가 기독교의 진수를 알지도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이것을 계시 진리보다 인간 이성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하다 보면 그들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인간이성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존중한 것으로 제 1,2 계명을 어기는 우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다 보니 그분을 알고 그분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죄악으로 타락하여 암매해진 이성을 스승으로 알고 그의 인도를 받다 보니 자칭 지혜로운 줄 아나 가장 어리석은 자의 반열에 들게 되는 것이고, 자기만 그리되는 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많은 제자들을 함께 불신앙과 파멸의 길로 안내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를 초월할 뿐만아니라 시간과 공간과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 진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차원이 다른 지식세계인 것이다.) 그럼으로 내가 먼저 진실한 신자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을 한다면 그 신학이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 밖의 학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학문이 될 수 있을가? 그리고 교회를 견고히 세우며 강하게 하는 학문이 될 수 있을가?

계절과 시류에 따라 옷은 바뀔지 모르나 인간의 몸은 바뀌지 않는 다. 계절과 환경에 보다 더 잘 적응하기 위해
그 본질까지 즉 인간의 몸가지 바꾸어 털복숭이 고릴라가 되거나 지느러미 있는 큰 물고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누가 변개 할 수 없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신학은 인간의 문화속에 파고들어갈 각종 편리한 옷이나 장비를 시의 적절하게 새롭게 창조해 내야 하는 것이다.복음은 생명이 있어 접하는 자를 변화시켜 준다. 그 복음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파괴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으로 신학을 해 온이들은 이제부터라도 초기 교부들의 신학방법처럼 내기 믿고 체험한 기독교를 보다 더 잘 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타 학문, 과학, 철학, 역사, 종교등과 대화하여 결국 그들을 참진리되신 그리스도앞에 복종시키도록 하자.

철학을 우위에 둔 신학(자유주의)을 할 수도 있고 성경과 계시진리를 우위에 둔 신학(정통,복음주의)을 할 수도 있다. 진화론을 바탕에 깐 사고를 할 수도 있고 창조론을 바탕에 깐 사고를 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유주의 신학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바도 있다. 그런데 그 늪에서 헤어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다. 칼 바르트가 그런 케이스인데, 그 늪에서 반쯤 나온 모습이다. 그러나 후학이 그를 어떻게 계승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텐데 그와 본회퍼가 관심하고 문을 열은 사회학적인 관점으로본 기독교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비 종교화의 길이 기독교회가 나아갈 길일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길일까?

지금도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찾고만 있을까? " 다른 철학이나 인문과학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을 믿음의 눈으로 읽을 때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분이 계신지도 모르는 데 어찌 그분의 뜻을 알겠는 가?

젊은 신학도들이여, 자유주의방식의 신학이 아닌 성서중심의 새로운 신학세계를 열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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