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문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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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5 19:49:18
1. 시작하는 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윤리‧도덕의 모범이나, 인격 또는 정신 수양의 모범이나, 사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믿고, 그의 교훈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죄로 멸망의 넓은 길을 가다가 지옥에 떨어질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성육하여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그의 복음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구현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미성숙한 믿음이고, 천국에 가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멸망에 속수무책인 성인군자들의 교훈이 많은 세상에, 또 하나의 인간적인 교훈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죄의 사함과 성결한 삶과 천국의 영생을 얻는 구원의 복음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2. 천국에 들어가는 좁은 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각 성과 각 촌의 유대인들과 구원을 위해 각종 종교를 믿거나, 양심껏 행하는 이방인들에게 영생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셨습니다. 그 자신이 천국에서 온, 복음의 창시자요 선포자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적으냐는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는 사람의 수가 많은가, 적은가 하는 문제가 유대교에서 많이 논의되었습니다. 제4 에즈라 8:1에는, 극소수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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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직접적인 답변을 안 하시고, 질문과 관련하여 자신의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고 적고를 알기 전에, 구원받는 방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좁은 문이 닫히면,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집주인이 천국에 들어가는 좁은 문을 닫은 후에,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라고 하겠지만,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또,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 자기들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던 일을 내세워 간곡하게 간청하겠지만, 무서운 대답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집주인인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은 그들은 행악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4:23 후반을 보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집주인인 하나님께서는 좁은 문에 못 들어간 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이 닫히는 것은 최후 심판의 때이고, 개인의 경우에는 죽음의 때입니다. 히브리서 9:27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의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좁은 문은, 주님 자신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이나 도덕이나 율법이나 종교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그 모든 것도 통과되는 큰 문에 이르는 넓은 길을 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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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좁은 문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배척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구원의 방도가 없습니다. 이유는, 양심이나 도덕이나 종교나 율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선과 악, 미덕과 악덕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미덕이지만, 종교를 아편으로 여겨 박멸하고, 대량 고문과 장기 적출과 학살을 하는 공산 독재자들에 대한 충성은 악덕입니다. 모든 덕이 미덕이 되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지혜는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방도가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제외한 사대 성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본질이 피조성과 의존성, 죄성과 이기성, 자율성과 가능성, 유한성과 불완전성, 나약성과 필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거나 그 하나님의 성육이신 자신을 힘써 믿어야 영생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구원의 방도가 있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약속도 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좁은 문이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시는 인간 예수를 제외한 세상은 무한할 정도로 큰 문이고, 그 큰 문에 이르는 길이 넓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상,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들과 유무형의 우상 숭배, 꿈과 계획, 이념과 사상, 야망과 야욕, 권력욕과 출세욕, 물욕과 명예욕에 매인 모든 사람과 온갖 죄악의 종인 모든 사람이 충분히 통과할 만큼 넓은 길이요 큰 문입니다.
큰 문에는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재물’, ‘무한한 권력’, ‘무한한 명예’, ‘무한한 학식’, ‘무한한 자유’, ‘무한한 쾌락’, ‘무한한 인격 수양’, ‘자기 신격화’ 등의 문패가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큰 문인 멸망의 문에서, “네가 하려는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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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라고 달콤한 유혹의 소리를 낼 것입니다.
달콤한 유혹의 소리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는 죄의 종노릇입니다. 죄는 주인이 되어 죄인을 더 크고 많은 죄와 멸망의 길과 큰 문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사야 64:6을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 이하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부부는 선악을 알되 제대로 알지는 못하고, 수치심과 증오심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배교자들의 운명입니다. 일단 멸망의 넓은 길을 거쳐 큰 문을 통과하면, 가면 갈수록 길이 그 만큼 더 좁아지고 험난해집니다. 갈수록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심해지고, 원망과 증오와 살의가 많아지고, 수치심과 불안과 소외감으로 힘들어지고, 모든 성취를 허망하게 만드는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현상은 회개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을 의미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 구원받는 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의 행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행위란 완전무결한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독일계 프랑스인으로 신학, 철학, 음악, 의학의 네 가지 박사이고,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며, 195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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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이자 선교사로서 인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한 방문객이 슈바이처 박사의 삶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박사님 같은 분이 꼭 이런 곳에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좀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차원으로 봉사하며 사는 것도 보람되지 않겠습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나를 지나치게 동정적인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주님의 손을 필요로 하는 저들에게, 내가 주님의 손이 되어 주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의미 있고 행복한 헌신인지 아십니까? 나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람과 일을 사랑하여 진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찮은 일이라고 해서 어영부영하는 것은 주님의 손발 노릇을 하는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3. 맺음말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과 큰 문은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과 문이 하도 넓고 커서 무심코 세상 풍조를 좇아도 멸망의 길을 가게 되고,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천국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먼저 믿어 구원받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인 이방인 같은 불신자들이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인 유대인 같은 교인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최후 심판의 기준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으며, 인간의 판단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성경 본문: 누가복음 13:22-30)

22예수께서 각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 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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