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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울분鬱憤한 이들과 동행하는 이들에게...
오재영
- 2037
- 2018-11-27 19:40:41
묵상에세이 난에 소개된, 조선말기의 거상巨商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소설 ᒥ상도ᒧ에, 한 대감이 수수께끼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둘로 나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냐?”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여종이 말한다. “이롭게 하는 이자利者와 해롭게 하는 ‘해자害者’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자기가 기대했던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한 대감은 여종에게 상을 내렸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영적 세계에도 비슷한 적용을 할 수가 있다.
즉 이롭게 하는 분은 예수님이고 해롭게 하는 자는 마귀다. 사실 마귀는 그 어떤 도적보다 훨씬 무섭다.
도적은 재물의 손해로 끝이 나지만, 마귀의 덫에 걸려들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믿음과 평안을 잃어버린 상태로 절망과 함께 급기야 생명까지 잃어 초라한 생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던 모범적인 가장이 어느 날, 도박에 빠져 이혼을 하고 살인까지 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얼마나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싶지만,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처럼 마음을 도적맞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자신이 罪인임을 잊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면, 마귀는 그가 소유한 믿음과 평안을 도적질해간다. 그가 방심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파고 들어와 우리의 모든 것을 도적질하고 종국에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고 마귀는 도적이다. 그가 어떠한 위치와 환경에 있든지 예수님을 제대로만 만나면 살고, 반대로 마귀를 자주 만나면 그의 생은 위험하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함께 수시로 등장하는 옛사람의 습관을 십자가에 처리하고 새사람으로 살기를 힘쓰게 된다. 언제나 자신의 영혼과 삶을 지켜 줄 말씀을 붙들고... (생명의 샘 인용).
19세기 프랑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미제라블, (프랑스어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
주인공 장발장...
극심한 기근 중 그는 누이와 조카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주려고 빵 한 덩이를 훔치다 체포된다. 처음엔 5년간 중노동 선고를 받지만 탈출하려다 잡히는 바람에 형刑이 19년으로 늘어난다. 나중에 풀려난 그는 평생전과자 표시가 된 노란색 신분증을 받게 된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그는 비엥브뉘(환영이라는 뜻)경이라는 어느 가톨릭 주교의 집에 들어간다. 청빈淸貧의 서원아래 지극히 검소한 삶을 살고 있던 주교인지라 장 발장은 자기가 가톨릭계의 아주 영향력 있는 사람 집에 와 있음을 알 리가 없다.
저녁을 먹고 하룻밤 묵어가라는 주교의 청에 장 발장은 식탁에 앉는다.
거기 주교가 오랜 세월 간직해 온 두 가지 물건이 눈에 띠는데, 값비싼 은수저 세트와 대고모에게서 선물로 받은 은촛대 두 자루다. 훔치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던 장 발장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 은촛대는 그냥 두고 수저 세트만 가방에 넣고서 뒤 켠 담벼락을 넘어 빠져 나온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장 발장은 경찰의 손에 이끌려 다시 돌아온다. 그의 모습이 하도 수상해보여 장물을 지닌 그대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자신들의 ‘쾌거’에 의기양양한 경찰은 주교가 도난품을 확인한 뒤 당연히 그를 고발할 줄 안다. 그러나 오산이다.
주교는 앞으로 다가서며 장 발장에게 말한다. “ 아, 여기 계셨군요! 다시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은촛대도 같이 드렸는데, 왜 수저 세트랑 같이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똑같이 은이라서 200프랑은 나갈 텐데요” 경찰도 장 발장도 깜짝 놀란다. 경찰 하나가 말한다. “주교님, 그렇다면 이 사람이 한말이 사실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은 마치 도망가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사하려고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은수저 세트를 가지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자기가 묵었던 집의 인심 좋은 신부가 주었다고 말했겠죠, 말 안 해도 다 압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사람을 여기로 데려온 겁니까? 실수 하신 겁니다.” 주교의 말이다. 이것이 장 발장의 인생이 바뀌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시발점이 된다. 적을 향한 한 남자의 놀라운 사랑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지금도 복수의 권리를 버리고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성품을 지닌 이들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들이 아닐까?...
문화 대 혁명(마오이즘)와중에 홍위병紅衛兵이 연상되는 사람들...
참으로 안타깝고 가엾은 이들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분쟁의 와중에서 전임자(감독)가 재판 중에 죄질이 불량하다며 재판정에서 구속이 되고, 사회의 신문 방송에 까지 등장한 교회의 목사께서 감독이라는 성직에 마음을 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깊은 내용도 모르면서 회자되는 각양 음해성 추문에 정죄의 글을 써 붙여 손과 손에 피켓들을 들고 기도한다며 난리치고, 성명서를 동네방네 향하여 목소리 높이는 이들, 참으로 가련한 모습들 아닌가? 이게 시대의 모든 罪 와 허물을 본인의 책임으로 알고 주님의 진노 앞에 자신을 드리는 시대의 중보자仲保者요 구도의 무리들인가?
얼마 전 까지도 교단본부 앞에서 동성애 지지한다고 가면들 쓰고 외치고, 자식임지 약속 지키라고 겁박하든이가 자신도 한 연회를 대표하는 전직 감독을 지냈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고발에 집착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목소리들 높이며 수치의 거품을 뿜어내고 있는 이들 속에 본인도 야반도주하였으면서 이름을 올린 이들과 그 연회와 지방에서도 홍역을 겪은 지방과 연회가 성토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들이 한없이 서글프다. 자신들의 주변과 지방, 연회에 이미 나락에 굴러 떨어진 이를 보면, 권면과 격려로, 그 상처를 보듬어 안고, 또 그를 세워줄 “쿠션”이 부족하면 조용히 각자 자신들을 돌아보며 반면교사反面敎師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일들이 아닌가? 자기들의 허물은 숨기고, 즉흥적이고 신앙공동체로서의 아픔을 나누려는 마음은 없이 모두가 정죄에 혈안이 되어 핏발선 모습들, 이게 좀비의 무리들이 아닌가?
증오에 매여 있던 그 장발장을 거듭나게 했던 영화속의 미리엘 주교의 굵고 탁한 음성이 지금도 귓가를 울린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 우리 모두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