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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0-24(설교: 회개치 않는 도시들이 받을 심판)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33
- 2025-09-02 19:48:50
마태는 이 기사를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로 시작한다.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의 권능(뒤나메이스, δυνάμεις)은 6:13의 “권세”의 주석을 보라.
회개치(μετενόησαν)는 3:2의 주석을 보라.
그때에 책망하시되(τότε ἤρξατο ὀνειδίζειν)는 ‘그때에 책망하기 시작하셨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21】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라고 책망하셨다.
화가 있을진저의 화는 우아이(οὐαὶ)이며 ‘화’, ‘비애’, ‘고통’, ‘고뇌’, ‘재앙’, ‘저주’ 등을 의미한다.
고라신(Χοραζίν: 눅 10:13에는 Χωραζίν으로 됨)은 “여기 외에는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행적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요 21:25). {그 지명은 구약성경이나 요세푸스(Josephus)의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곳은 가버나움으로 짐작되는 텔흄(Tell Hûm)에서 북동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현재의 케라제(Kerâzeh)라고 불리는 폐허인 것 같다. 제롬(Jerome)은 우리에게 고라신이 가버나움에서 2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텔흄을 고라신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텔흄이 가버나움이라고 믿지 않는 콘더(Conder)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라제를 고라신이라고 확신한다(Handbook to the Bible, pp. 324-326). 현재로서는 이 견해가 유력하다. D.B.2 s.v.; D.C.G. s.v.”(A. Plummer).}(눅 10:13의 주석).
벳새다(Βηθσαϊδάν: ‘물고기의 집’이라는 뜻)는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이 갈릴리 호수의 윗머리에 건설한 신흥 도시이었다(Jos. Ant. 18, 28. Bel. 2, 168)②.}(눅 9:10의 주석). 이 벳새다는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인 뒤에 제자들이 도착한 곳이다(막 6:45).
예수님은 그 두 지역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의 주요 도시들로 지중해에 면한 항구들이고, 로마 식민지로는 수리아주에 속했다.
{전자는 주전 2750년경에, 후자는 주전 1400년 이전에 건설된 후에 번창한 이방의 상업 도시들이었는데, 사악함 때문에 예언자들의 빈번한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암 1:9-10, 사 23장, 렘 25:22, 47:4, 겔 26:3-7, 28:12-22).③}(눅 10:13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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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누가복음 10:13-15의 주석을 보라.
2) in I. H. Marshall.
3) 참조: I. H. Marshall, A. Plummer,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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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는 비애나 비탄이나 회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삼하 13:19, 왕상 21:27, 욥 16:15, 단 9:3, 시 35:13).
회개하였으리라(메테노에산, μετενόησαν)는 3:2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자신의 메시아적 권능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고라신과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보다 더 강퍅하고 더 사악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고라신과 벳새다가 받을 멸망의 심판에 대해,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하셨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보다 더 견디기 힘든 멸망의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라고 하셨다.
가버나움(Καπερναούμ)은 4:13의 주석을 보라.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이사야 14:13-15에 언급된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을 연상시킨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의 본거지로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예수님의 교훈과 기사와 이적 등을 더 많이 듣고 보고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심판도 더 혹독할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교만한 그는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이다.
음부(하두, ἅδου)는 ‘깊이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 수 없는 깊음’, ‘바닥이 없는 깊음’, ‘땅 아래의 곳’(눅 8:31, 계 9:1, 롬 10:7)을 의미한다. 이것은 음부(아뷔스손, ἄβυσσον)와 같으며,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사는 땅 밑의 세계’를 뜻한다. 이곳에서도 세상에서 살던 것처럼 살고 있으며, 그 신을 세상에 불러내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삼상 2:6). 히브리의 말세론은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그 신들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활동하는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시 88:13, 94:17, 욥 14:3, 겔 32:27). 보통 생각은 활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신‧구약 중간기의 음부는 순교자들이 있는 곳과 의인들이 있는 곳과 잘 산 죄인들이 있는 곳 그리고 벌 받은 죄인들이 있는 곳 등의 네 곳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와 둘째 부류는 복을 누리지만, 셋째 부류는 심판 날에 죽임을 당하고, 넷째 부류는 부활도 없고 고생뿐이다. 순교자들과 의인들의 영은 새 몸을 입고 심판 전에 천국에 올라간다.
신약성경의 음부는 유대교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16:23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이다.
때로 음부는 크게 벌려진 목구멍, 또는 입을 딱 벌린 턱을 가진바 만족할 줄 모르는 악마로 인격화되기도 하였다(잠 1:12, 사 5:14, 합 2:5).④
여기서는 하늘의 구원과 대조되는, 비참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즈(A. Barnes)는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로마와 유대의 전쟁으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이전의 위치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라고 하셨다.
소돔은 10:15의 주석을 보라.
가버나움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버나움이 소돔 땅보다 더 견디기 힘든 멸망의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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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 H. Gaster, “Dead, Abode of the” in IDB, Vol. I, pp. 78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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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359-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