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독교대한감리회 영적 기상도를 본다.

오재영
  • 1952
  • 2018-12-13 17:48:08
자기신념을 신탁(神託)이라 주장하는 사람들...

지난주 토요일아침 지방 실행부회의를 마친 후 말미에 현 전국여선교회 회장이신 백 장로께서 드디어 우리지방에서도 성명서를 내주어 자신의 면(面)이 서게 되어 그 내용을 수백 군데에 뿌렸노라 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를 전적으로 부르시고 사용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고, 이미 교단의 재판절차가 구성이되어 진행이 되고 있음에도 다음 월요일에는 감신대생들과 전국여선교회 회원들이 감신대에서 기도회로 모이게 된다고 하였다. 그분 듣기에 불편했겠으나 정말 염려되어 하나님의 뜻을 그리 사용하지 말라했다.

나는 가끔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에서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무슨 응답을 받았다는 이들의 흔히 말하는 간증의 말을 듣노라면 생각이 복잡하다. 저이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상식과 자신의분수를 알고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무지한 것인지 도통 이해가되지 않을 때가 많다. 치유의 집회에 참여해보면 상태가 더욱 심하다. 응답을 받았다는이들이 예언과함께 간증으로 그자리에 있는 이들로부터 박수를 받지만, 대부분1~3년내에 세상을 떠난다. 뭔 그리들 본 것이 많고 들은 것들이 그리도 많은가? 자기개인적인 신념은 모르겠으나, 이 거대한 우주만물 중에 자신의 비중을 얼마나 착각하고 있기에 그리 함부로 목소리들을 높이는가? 그리 말하는 본인자체가 60억분의 1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따르는 상식만 갖고 있어도 본인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님은 즉시 알 수 있다.

현재 자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공상소설이 아닌 과학이 사실로 증명한대로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지구와 태양이 속해있는 은하계만 해도 약 2천억 개 이상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우주의 지평선(cosmic horizon)안쪽 즉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범위의 우주 안에는 그러한 은하가 약 1천억 개 이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약2만6천 광년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양주위를 여덟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고, 그 행성들 주위를 다시 약 160개의 더 작은 위성들이 돌고 있다. 이처럼 은하계에 있는 모든 항성들마다 태양계와 같은 공식을 적용한다면 우리 은하계만 해도 지구보다도 수천, 수만 배의 거대한 약 3조 2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우주 안에 그런 은하계가 1천억 개가 넘게 존재하고 이를 인정한다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태양계를 이루고 있는 각 행성들의 크기와 위치역시 신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 해도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있는 행성이고, 또 다른 행성인 화성을 지나면 목성이 있고 지구보다 약 천배의 크기인 목성은 지구를 감싸고돌면서 우주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운석들을 막아주고 있어 지금도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놀라운 세계를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다(창1:1절).

시편기자와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며, 열방이라 할지라도 통의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이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와 같은 존재다.”(사40:15).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시대의 흐름을 거절치 못해 위기에 처한 우리감리교회

지금 선교130여년의 찬란한 역사와함께 이민족 앞에 자랑스럽게 존재하든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처한 오늘의 위기는 교조 존 웨슬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던 과거 18세기 영국사회의 극심한 타락의 시대와 너무나 흡사하다. 감리교도들이라면 모두가 상식적으로 아는 교조 웨슬리의 회심이전의 영국사회의 당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한마디로 매우타락하고 부패한 모습들이었다. 무능한 국가의 지도자들, 삶에 절망한 서민들의 알콜중독,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노예사냥과 매매. 노예로 팔기위한 인신납치. 빈민가 어린이들의 높은 유아사망률. 유흥을 위한 심한동물학대, 보편화된 투전판의 놀음. 감옥의 잔혹한 규칙과 피비린내 나는 형법과 풍기문란. 극장의 퇴폐적인 영업. 무법한 무정부상태. 외설적인 사회분위기. 정치의 부패와 공직자의뇌물수수. 성직자의 오만과 횡포. 이신론(理神論)의 유행. 위선과 타락 등등이 그 당시의 영국사회에 대한 모습들이었다.

무려160여 가지의 죄목에 해당되는 범죄자들을 수시로 길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형하는 공포정치, 이처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형하는 죄목들 중에는 오늘날 경범죄에 해당하는 죄목들도 있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법들이 그 당시의 잃어버린 사회 질서와 도덕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더욱이 이러한 극심한 타락의 배경에는 그 당시 기독교가 국교이면서도 사회에 본을 보여야할 고위 성직자들의 일탈된 행동들이 한몫을 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이 육적肉的, 명목상의 성경을 떠난 형식적인 교회생활로 영적인 기류가 급랭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여우사냥을 다니며 부유한 이들의 파티에 참석 하는 등, 사교 생활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찬과 예배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은 사라지고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가정예배와 교리교육. 성경 읽기 등의 경건한 삶이 자취를 감추고, 야비하고 조잡한 언행이 교인들 가운데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는 “이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각자의 다양한 신앙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이 땅에는 각자가 믿고 따르는 수많은 여러 종교들이 있지만 종교학에서는 그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한다. 그리고 구분하는 그 기준을 그들은 자기부인(自己否認)에 둔다. 즉 해당종교에 자기부인이 있으면 고등종교로, 없으면 그 어떠한 희생과 열정에 상관없이 미신에 불과한 하등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란,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자기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가 믿는 종교가 표방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욕망이 부인되고 있다면, 그는 고등종교를, 자기부인처럼 보이지만 그 모두가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 어떠한 형태와 관계없이 그가 믿는 종교는 하등종교에 속하는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이처럼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존재하며 세대를 이어 영향을 끼치는 고등종교에도 그 종교가 겪게 되는 위기가 있는데, 그 위기의 때에 예외 없이 나타나게 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현상중의 하나가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종교에 성직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고려 말 불교가 타락했을 때 온 고려 땅이 중 천지였음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도 종종 등장하는 티베트의 라마 불교의 타락당시에는 티베트 남자의 70%가 승려였으며, 가톨릭의 부패가 극심했을 때인 1830년대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에도 신부들이 넘쳐남으로 그 당시의 똑똑한 유럽청년들은 적(赤)과 흑(黑)을 놓고 고민을 해야 했다. 즉 적(赤)은 가톨릭 사제의 붉은 성의를, 흑(黑)은 판사의 법복을 의미하므로 당시 유럽청년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성취하기에 가톨릭 사제와 판사 중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되는지 저울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가 되어도 얼마든지 축첩까지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성직자가 갑자기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그 종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없어져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원한 가치를 위해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의 本으로 살아가는 구도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부인이 정당하게 요구되고, 또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 종교라면 갑작스럽게 성직자가 급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성직자가 급증한다면 그 종교에는 이미 자기부인이 실종되었고, 성직 자체가 모든 사람이 탐을 내는 세속적 직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이다. 지금 우리교단도 같은 위기인데, 우리의 미래의 희망이어야 할 신학교조차도 불편한 진실이지만, 자신들의 소명과는 상관없이 부모 따라 일반대학 진학의 좁고도 좁은 과정을 피하여 좀 더 쉬운 상대로 신학대학을 지망한 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재철 , 비전의 사람, 참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참담한 현실들...

영성이 희박하고 거룩함이 소멸되니 별 희한한 이들이 등장하여 교단을 혼란스럽게 한다.
과거엔 일반사회에서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든 일들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성직자라는 이들에게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모두가 성직자로서 맡은바 직분에 합당치 못한 자기성찰에 실패한 부끄러운 이들이다. 타 교단은 차치하고 우리 안에서도 지금 대중매체를 통하여 전도의 대상인 이교도들에게 온갖 부끄러운 모습들을 여과 없이 낱낱이 보여 주고 있다. 이모두가 자신들의 성결에 실패한 것을 감추고 영적 리더 가 되겠다고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가리지 않고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말씀대로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할 이들이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가엾은 모습들이다.

이처럼 전 교단이 총체적으로 혼란스러운 때에 우리를 더욱 염려케 하는 이들이 있다. 교단의 각부서와 기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이들의 가볍고 경박한 자기희생 없는 리더십의 부재다. 지금 몰려다니며 지적 질로 성토에 매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들이 정상들인가? 또 지난 33회 총회의 소란이후에도 각 연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이 보여준 모습들은 정말 실망을 넘어 절망이다. 총회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면 각 연회에서 관계된 이들끼리 조촐한 시무식으로 진행하면 안 되는가? 이들은 도무지 “잘못 살아있는 것 자체가 차라리 죽어있는 것보다 더 악함을 모르는 분들이다.”성경이 말씀하고 교회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듯이 개인과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창한 인위적인 방법이나 선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낮아지고 섬기려는 자세다.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설교자를 기다리며...

지나온 기독교역사의 종교개혁 이전 개혁자였던 이탈리아의설교자 기롤라모,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의 삶은 설교자로서의 생을 마쳐야 할 우리에게 좋은 예가된다.

그는 14세기에 접어든 후 더욱 부패해진 로마교회 아래서 온갖 향락을 즐기며 타락해 가는 조국 이탈리아에서 설교했던 사람이다. 그는 멸망을 향해 치닫는 조국과 플로렌스를 향하여 외쳤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죄악의 도성 플로렌스를 하나님이 멸하시리니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그는 추기경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제의하던 로마교황을 향해 추기경의 붉은 모자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를 쓰겠다했다. 그는 결국 1498년 어느 날, 적들에게 체포되어 목졸려죽은 뒤 화형 후 한줌의 재로 아르노(Arno)강에 뿌려졌다. 그가 생전에 1485년부터 설교하던 두오모(Duomo)교회당에는 매번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들고,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이 한밤중부터 교회 문 앞에 줄을 서서 예배시간을 기다렸다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때 사보나롤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미소를 띠신 하나님이아니라 순결을 상실해 버린 교회를 향하여 진노하시는 엄위로 우신 하나님이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구실로 방종으로 흘러버린 천박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위협 앞에서 성도들은 사무치는 두려움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비록 사보나롤라는 한줌의 재로강물을 따라 흩어져버렸으나 하나님에 대한 각성을 외친 그의 설교는 그대로 살아있어 다음세대에 도래할 종교 개혁을 알리는 횃불이 되어 칠흑 같은 중세 교회사에 찬연히 타올랐다. 그가 이처럼 신적인 확신에 불타는 메시지로 회중에게 커다란 영적감화를 끼친 이면에는 그의 남다른 자기를 버린 조국과 영혼을사랑하는 뛰어난 영적생활이 있었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여 신구약 66권의 본문을 거의 외울 정도로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영적 삶은 그의 기도생활 속에서 나타났다.

그의 이러한 삶에 대하여 한 전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에 말씀을 전하고 독서하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릎을 꿇은 채로 지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도 생활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깊이를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력 있는 선포사역의 중요한 비결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깊은 기도는 필연적으로 기도시간의 연장을 가져왔는데, 무릎을 꿇고 간절히 드리는 그의 기도는 대체로 대여섯 시간씩이나 계속되었으며, 어떤 때는 기도하고 일어나서 말씀을 강론하기 위하여 그가 단상에 오를 때에는 회중들이 때때로 그의 얼굴에서 밝은 광채가 발하여 그 빛을 뚜렷이 의식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P.72~74.인용).

정말 우리 모두의 겸손과 각성이 필요하다.

일찍이 세계적인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의 최고 경영자이었던 잭 웰치 는 어느 기고문에서 “조직 내부의 변화속도가 조직 바깥의 변화속도보다 느릴 때, 그 조직의 종말이 보인다.”했다. 지금 우리교단의 구성원들의 냉철한 이성과 의연함으로 해결하려는 각오 없이 앞으로 밖으로부터의 끊임없이 밀려오는 도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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