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삐뚤어도 주라(朱螺)는 바로 불라했습니다.

오재영
  • 1927
  • 2018-12-27 05:19:33
목사의 성품(性稟)관리 어떻게 하는가?

“구수사취라당직(口雖斜吹鑼當直)”이란 말이 있다. 비록 불리한 조건에 처하더라도 말만은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속담으로 성직자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내용이다. 요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시대조류가 과정보다는 결과지향적인 탓인지 성품에 대한 얘기를 듣기가 어렵다. 과정과 성품은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주제임에도...

“그 사람은 성품이 됐어.” 이것은 좋은 사람에 대한 얘기로 통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솔직히, 그 사람은 성품에 문제가 있어." "그 사람, 성격 장애가 있는 것 같아.” 다른 얘기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성품 좋다고 평판이 난 사람은 단기간에 신뢰를 얻는 반면에 성품에 의심이 가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소문과 함께 즉시 경계심을 갖게 한다.

성품(性稟)도 성장한다.

좋은 성품은 시험과정을 통과하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성품의 평판을 원하지만 그의 단호한 결심과 함께 사노라면 그에게도 성품의 성장에 따르는 위기를 맞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지켜온 성품 속에 잠재하고 있던 결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선택을 하도록 누군가 자신에게 압력과 공격과 설득을 가해 오는 순간을 맞이하면서 그도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이 깊은 이들은 남의 성품결함에 대해 얘기하는 그때에 자기의 결점도 생각하기에 각별히 주의한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말로 위협을 일삼아 약자를 괴롭히는 가해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과 동시에 더욱 자신을 성찰하며 사는 이들이다.

1).성품은 어릴적 부터 나타난다.

어린이 리그 야구경기가 동점상태로 9회 말을 맞는다. 원 아웃에 주자 3루, 타자가 친 공은 잡기 쉬운 플라이로, 공이 잡히자 3루 주자는 다시 돌아가 베이스를 밟은 뒤 홈으로 내닫고, 야수는 포수에게 공을 던진다. 공이 들어오는 순간 주자도 같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한바탕 흙먼지가 일면서 심판의 “아웃!”소리와 함께 두 패로 나뉜 관중이 한쪽은 환호로 한 쪽은 항의로 저마다 들끓기 시작을 한다. 부모, 코치, 선수 할 것 없이 한편에서는 축하해 주러 또 한편에서는 따지러 우르르 구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때 갑자기, 공을 잡아 주자를 태그 했던 예닐곱 살 난 어린포수가 심판에게 가서 말한다. “실은 공을 놓쳤어요!”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다 이긴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폭탄 같은 말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것은 단순히 야구 경기의 결과일 뿐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관중은 거기 홈베이스에서, 한 소년의 마음속에 형성되고 있는 성품性稟을 본다.
이제 머지않은 날 이 소년은 장차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리에서 진리의 대변자로 부름 을 받을 것이다. 오늘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대가가 따르든 내일도 똑같이 그럴 것이기 때문에... 성품이란 단어에 만족스런 정의를 내리기란 어렵다. 그러나 성품이란 서로가 함께 겪어보면 무엇이 성품이고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자신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시련과 역경을 겪는 자리에 있을 때 그 곤경 속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역시 그가 어릴 적부터 지켜온 진정한 성품뿐이다. 이처럼 성품은 말과 행동의 출처가 되는 내면의 토양과 같다. 그 때문에 목사와 신앙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성품 형성의 요소는 언제나 그가 품고 있는 살아있는 양심, 깊은 영향을 주는 본(本)이 되는 행실, 건전한 교육,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수시로 거짓의 유혹을 거절하는 책임의식을 동반한 진실한 고백의 결과라 할 수가 있다.
(고든맥도날드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P.267-268.인용).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있는 목사.

2). 이재철 목사의 글 중에...
전도사시절 여성 문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암에 걸린 한 남성 작가가 그 성경공부에 합류하여 말씀과 기도를 나누던 중, 병이 치유되는 주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마치 내가 그분을 낫게 해 준 것처럼, 이런저런 환자가 있으니 와서 고쳐 달라는 전화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기에 나로서는 정중히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모 재벌가에서 연락이 왔다. 그 가문의 부인이 암 투병 중임으로 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환자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가족 가운데 믿는 이들이 안타까워 내게 연락한 것이다. 마침 그 가문의 자제분 가운데 나의 친구가 있어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서울대학병원 특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환자는 비단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병상에 누워 인터페론 주사를 맞고 있었고, 남편과 자식들이 그 주위에 앉아 있었다. 환자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 것은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졌음을 뜻했다. 내게 연락을 취했던 가족이 환자에게 나를 ‘이재철 전도사’라고 소개했다. 그와 동시에 환자는 귀찮다는 듯 벽 쪽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보기도 싫다는 의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벌 집안이니만큼 믿는 가족들이 그동안 유명한 목사님들을 얼마나 많이 모셔다 병실 예배를 드렸겠는가? 믿지 않는 환자에게 그보다 더 큰 고역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목사도 아닌 전도사까지 왔다니 환자가 돌아누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로 인해 병실 분위기가 어색해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그냥 병실을 나와야 할지, 아니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할지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환자의 남편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여보,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번 항암제 투여가 끝나면 현저하게 회복될 거라고 합디다. 힘을 내시오.” 그 말에 자식들 역시 어머니를 격려하고 나섰다. 그러나 돌아누운 환자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제야 내가 할 일을 깨달은 나는 병상 앞으로 다가가 벽을 향해 누워 있는 환자의 뒷머리를 향해 물었다. “부인! 지금 부인의 부군과 자제분들이 이번 항암주사를 맞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은 정말 그 말을 믿으십니까? 부인이 아무리 항암주사를 맞아도 부인은 반드시 죽습니다.”

내가 보기 싫다며 돌아누워 버렸던 부인이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는 나의 말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병상에 누운 부인과 서있는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부인, 나는 부인의 가족들처럼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부인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부인에게 진실을 전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오늘도 이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암 환자가 죽어나갔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부인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랐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 사람을 부르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항암주사를 맞는다 한들 부인역시 반드시 죽습니다.” 부인이 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 또한 부인의 눈동자로부터 나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꽤 오랜 침묵 끝에 부인이 누운 채 자세를 가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그럼 난 어떡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그러나 죽어도 죽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십시오.” 나는 부인에게 에노스,(히,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녀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복음을 소개했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했고, 나를 따라 자신의 생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다. 사생의 매듭이 맺어진 것이다. 그녀는 다음날 퇴원하였다. 병실에 누워 항암제를 맞으며 의미 없이 죽어가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이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테이프 성경을 구입, 자리에 누워 체력이 허락하는 한 성경말씀을 들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누군가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곧 당사자를 불러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비록 병상에 누워 있을망정 하나님께 속한 이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으로 들은 것이다. 말씀 안에서 그렇게 자기 생을 반듯하게 매듭짓던 그 부인은 석 달 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석 달이야말로 그가 이 땅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생명을 누린, 그리고 지금도 누리고 있을 영원한 생영의 시작 이었다. (이재철 매듭짓기.P48-52인용.).

전준구 감독 사태, 냉정한 이성을 기대한다.

최근에 전혀 예상치 못한 우리교단의 서울 남 연회 감독사태에 대한 전국의 여러 지방과 연회가 연이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중에 가장 압권은 강남동지방이라는 생각이다. 그 내용 중에는 “8년 전에 타협해서는 안 되는 ‘돈’과 ‘인맥’에 휘둘리며 성추행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태는 목원과 감신이라는 학연에 따른 갈등이 아닙니다. 로고스 교회의 전임자와 후임자간의 분쟁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더러움이 거룩을 좀 먹는 것입니다.” 물론 목원과 감신의 학연이 아님은 남 연회에 속해있는 이들은 모두가 안다. 목원의 비율이 감신과 타 신학에 비하여 월등히 차이가나니까, 그런데 전임자와 후임자간의 분쟁은 더더욱 아닌가? 거기에 서명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당시 감독을 지낸 이 인데...

지금 정상적인 신앙인들이라면 떠도는 그 소문과 회람의 내용대로라면 전준구 목사의 감독수행을 가능하다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다툼과 분쟁의 내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지난 8년 동안의 수많은 사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와중에 지금도 온갖 소문을 양산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전준구 감독을 비롯한 그의 퇴진을 목적으로 피켓들고 세상을 향하여 떠드는 이들이야말로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이들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부담스러워 하지만, 본인이 물러서지 않는 한 이제는 교단 안에 조직되어있는 각 위원회를 통하여 사실여부를 밝혀 자체 정화의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목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성탄절을 지난 지금, 이제는 한해도 며칠남지 않았다. 명 총잡이는 항상 자신의 어깨너머를 살피는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이라면 우선, 타인보다는 자신의 일에 질문을 달고 다녀야 한다. 그것이 이후에 세월이 지나고 은퇴라는 내리막길이 급행열차의 속도로 다가 올 때가 되었어도 미처 준비되지 못해 머뭇거리며 아쉬워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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