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비담(非談)

함창석
  • 1303
  • 2019-01-11 20:01:29
비담(非談)

산돌 함창석 장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시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국이었으며 자유와 행복이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이들에게는 남을 비판하는 능력은 발전했으며 율법주의와 더불어 패배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기쁨과 소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이 말씀은 듣는 청중들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이 입을 여시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그분의 말씀이 곧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언급된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푸뉴마티' 심령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즉 사람들은 이제껏 복의 조건에 있어서 외부적인 요소만을 찾았는데 그 복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the poor in spirit)은 심령이 약한 자들(the poor-spirted)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만한 자들이 아닌 겸손한 자들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애통하는 자들 당시의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되었을 것이다. 고난의 비참과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적개심과 마음의 상처를 씻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기도. 온유한 자들은 역시 애통하는 원망과 저주의 마음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온유한 마음을 자길 것을 말씀하신다. 결국 이러한 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프라에이스'는 가까이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내, 사랑, 겸손을 의미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악에 대한 승리의 나라가 온전히 설 때를 기다리며 바른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만족을 얻게 되는 배부를 것이라 약속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제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 대한 긍휼한 베푸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원망과 저주의 마음이 없고 나아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지 않는 순결한 마음을 말하신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가난하세요. 나라가 망하더라도 애통하지 마세요.

화평케 하는 자는 자신을 통해서 불화와 갈등이 있는 곳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부름을 받게 된다. 대칭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화평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불쌍한 이들을 보더라도 긍휼히 여기지 마세요.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저주와 원망을 하세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 세상을 동시에 섬기세요. 피 흘리는 전쟁을 하세요. 어떤 경우라도 핍박을 받지 마세요. 예수님의 팔복을 무시하세요.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 계시다고, 누가는 예수께서 평지에 계셨다고 했다. 설교가 이루어진 이곳은 먼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12절 가버나움 근처의 언덕으로 올라가셨고 12제자를 부르셨다. 그리고 질병과 말씀하시기 위해서 평지로 내려가셨다. 그 이후에 군중들을 떠나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더 높이 올라 가셨다. 무리들은 산에 올라와서 설교를 들었는데,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긴 것이다. 마태는 히브리인들을 위하여 기록하였고 누가는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때 그 속에서 복을 받거나 행복한 네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인자를 인하여 ...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를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 사람들은 마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누가는 "가난한"이라고만 함으로 물질적으로도 가난함을 드러내었다. 누가는 예수를 따랐던 사람(제자)들이 모든 것을 떠났다는 것을 두 번이나 언급하였다.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가 거의 동일하게. 세상의 부요함은 자기 자신이나 그 물질에 의지하게 된다.

화가 미칠 사람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이제 웃는 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과 상반되는 개념의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어떤 화나 저주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제 웃는 자는 예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를 조롱하며 비웃는 자를 가리킨다. 가까이는 현재 말씀을 전하실 때와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있으며 지금까지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요하세요. 늘 배부르세요. 언제나 웃으세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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