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경 목사님, '낙원'(고후 12:3...)에 대한 주석입니다.

최세창
  • 1871
  • 2019-01-21 21:13:05
바울은 매우 주저하면서, 그리고 반복적인 문체로 계속해서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묘사된 경우에 대해 (1) 또 다른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라는 설,① (2) 2절의 경우인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은 첫 단계이고, 이 서술의 경우인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씀을 들은 것은 그 두 번째 단계라는 설,② (3) 12:2의 반복이라는 설③ 등이 있다.
(1)설, 또는 (2)설은 소개된 학자들보다 먼저 다수의 교부들④이 주장한 것이다. 그 근거로 12:3 초두에 있는 접속사 καὶ(카이: ‘그리고’)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접속사를 상승적인 접속사(‘더욱이’, ‘정말로’)로 보는 것이 더 낫고”(V. P. Furnish, p. 526), 또한 12:2에 “14년 전에”가 있는 것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한다.
이어서 바울은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낙원”은 파라데이손(παράδεισον: 눅 23:43, 계 2:7)으로서 “원래 바사어이며 ‘둘러쌈’, ‘울’, ‘담’을 뜻하였고, 여기서 ‘즐거운 동산’이나 ‘즐거운 공원’을 뜻하게 되었다”(P. E. Hughes). 특히, 바클레이(W. Barclay)는 그 말과 관련된 바사의 관습에 대해, “바사어에서 온 말이며, 담으로 둘러싸인 동산이라는 뜻이다. 바사 왕이 특별히 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특별한 명예를 주고자 할 때에는, 그 사람을 동산의 벗으로 삼아 왕과 함께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산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 경험에서 바울은 전무후무하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벗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약성경의 칠십인역에는 에덴동산이라고 번역되었고(창 2:9, 10, 15 등), 신약성경에는 세 번(12:4, 눅 23:43, 계 2:7) 나오는데, 특히 요한계시록 2:7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면, 낙원이란 하늘의 낙원(4 Ezr. 4:7-, 3 Bar. 4:8, TB Hăḡîgāh 16b, Rabba 65 on Gen. 27:72 등)⑤이고, 인간이 죄 때문에 상실한 낙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인류에게는 모든 복이 회복되는 그 이상이다(참조: 계 22:1-).
휴즈(P. E. Hughes)는 “초기의 교부들은 낙원을 사후(死後)에 모인 믿는 자들의 영혼들(souls)이 세상 끝 날에 발생할 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간주하였다. 오리겐(Origen)은 정말로 낙원이 지구 표면의 어떤 장소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플럼트리(E. H. Plumptre)는 의인의 영들이 거하는 곳이라고 하였고, 웨슬리(J. Wesley)와 클라케(A. Clarke)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분리되어 있는 영들의 행복한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신빙성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지금 이 세상의 어느 장소에 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셋째 하늘 또는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인간이라는 면에서 어떤 형태의 몸이 없는 영만의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것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참조: 5:1-의 주석).
아무튼, 휴즈(P. E. Hughes)는 낙원과 셋째 하늘을 동의어로 보는 학자들로 데오도레트(Theodoret), 어거스틴(Augustine), 아퀴나스(Aquinas), 에스티우스(Estius), 핫지(C. Hodge), 바흐만(Bachmann), 빈디쉬, 타스커(R. V. G. Tasker)⑥ 등을 들고 있다. 또한, 그는 대다수의 현대 주석가들의 견해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낙원과 셋째 하늘을 동일시하는 기록은 외경과 랍비 문학에서도 볼 수 있다. 제2 에녹서 8장에서는 낙원이 셋째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모세의 묵시록 37장 5절에서 하나님은 미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죽은 아담)를 세 번째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올려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심판할 그 두려운 날까지 그를 거기에 내버려 두라”(C. K. Barett).
“말할 수 없는 말”(ἄρρητα ήματα)은 모순 어법으로서, 랑게(Lange)에 의하면 그 곳의 일은 너무 거룩한 것이니 만큼,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또한 표현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⑦ 또, 전경연 님은 “‘인간의 말로 번역할 수 없는 말’, ‘그 거룩함 때문에 왈가왈부하면서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서는 안 될 말’, ‘하늘 영역에서 통용되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라는 어휘에 매이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초월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진장한 내용을 가진 것이라 생각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 말을 들려준 주체가 하나님인지 그리스도인지 천사나 천사들인지 의인의 영들인지는 알 수 없다.
바레트(C. K. Barett)는 이 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신비 종교들의 언어이다. 예를 들어 Aurelius, Metamorphoses xi. 23을 참조하라. ‘아마도 근면하신 독자인 당신은 약간 걱정하면서 그때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행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만일 듣는 것이 허락된다면(si liceret audire), 너는 그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너의 귀와 나의 혀는 모두 똑같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나의 혀는 불경한 수다로, 너의 귀는 경솔한 호기심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예전에 아풀레이우스 종단의 입교식을 맡은 사제는 ‘인간의 언어를 능가하는’ 특정한 개념들을 그에게 위임했다(quae voce meliora sunt).
그러나 바울로가 직접적으로 신비주의에 의존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필로(Philo)만이 이미 그러한 언어를 전유(專有)한 것은 아니며(예를 들어 Leg. Alleg. ii. 57: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것들<ἀπόρρητα>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것들을 감추고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 참조: Quod Det. Pot 175), 비밀스런 계시라는 개념이 라삐적 유대교에서만 유행했던 것도 아니다(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1969], 237-41). 봉인된 계시에 관한 사상은 이미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사 8:16, 단 12:4. 참조: 제2 에녹서 17장, 묵시 14:3). 그러므로 바울로의 계시는 친숙한 것이었다. 바울로의 경쟁자들의 자랑이 고린도에서 친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로의 계시도 틀림없이 친숙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도 역시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장들 전체에 걸쳐서 그의 자랑은 이상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무튼, 바울이 들은 말은 다른 사람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표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핫지(C. Hodge)는 “하늘의 비밀과 영광을 가린 베일이 벗겨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 저 세상에서 성도들이 온전히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웨슬리(J. Wesley)는 “여기서 그는 주님 안에서 죽은 의인들이 맛볼 기쁨을 미리 맛본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그러한 기쁨을 미리 맛봄으로 인해 그는 그 후에 숱한 시련과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강한 힘을 얻게 되었으며, 자기를 위해 마련된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가짜 사도들과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삼던 신비로운 영적 체험보다 더 차원 높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뤄진 그 체험 자체는 자랑할 수 있으나, 그 자신에 있어서는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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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Wesley, “McFadyen”(in A. Plummer), A. Plummer, “de Boor, 231”(in V. P. Furnish, p. 526).
2) Clement of Alexandria(Storm. v. 12, p. 696, ed. Potter) in A. Plummer.
3) H. Alford, C. Hodge, “Bernard”(in 이상근), A. Barnes, C. R. Erdman, R. C. H. Lenski, W. Barclay, C. K. Barett, F. F. Bruce, P. E. Hughes, M. J. Harris, V. P. Furnish, p. 526,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4) “Clement of Alexandria, Irenaeus, Origen, Oecumenius, Ambrosiaster, Theophylact, Althanasius, Jerome, Hilary, Primasius, Anselm, Meyer, Erasmus, Wordworth, Denney”(in P. E. Hughes).
5) in F. F. Bruce.
6) 셋째 하늘은 의인을 위한 장소와 마찬가지로 악인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자가 거하는 장소를 낙원이라고 한다.
7) in 박윤선.

출처: 최세창, 고린도후서(서울: 글벗사, 2002, 3판 1쇄), pp. 375-379.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7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 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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