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뒷걸음으로 배우기 외

최천호
  • 1429
  • 2019-02-03 02:41:45
뒷걸음으로 배우기

앞으로 걷는 법만 배워
뒷걸음을 불편해하고
앞으로 걷고 달리는
습관으로 굳어진 두 다리는
뒷걸음이 두렵다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앞만 보고 달려가고
높이 올라가야만 하는
슬픈 운명을 짊어졌다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더 빨리 더 높이 가야만 한다

달리고 오르는 일에
잘 적응된 나의 두 다리는
남들보다 빨리 간다고
친구보다 먼저 간다고
흥분하고 자랑이다

앞으로 걷는 법만 배워
뒷걸음으로
넓은 운동장을 걸으면서도
두렵고 불편해하니
이제는 뒤로 걷는 법과
내려가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멈춰 섰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섣달 그믐밤의 풍경

녹슨 함석지붕을 휘감고 돌다
울음을 터트린 바람이
방안에 들어와 몸을 녹이고
심지를 돋운 등잔불은
끄름을 뽑아 올리며 밤을 밝히는데
머리를 깎은 막내는 흰 이마를 내놓고
숨소리도 깊이 잠들었다

온종일 부엌에서
불을 지피시던 어머니는
자신의 속내와 같이
근심 가득한 장롱 속을 정리하고
아버지도 모로 누워 몸을 뒤척이는데
된바람만 회초리를 휘두르듯
휙휙 거리며 방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섣달 그믐밤은 더디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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