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성도(聖徒)

함창석
  • 1243
  • 2019-02-12 19:04:45
성도(聖徒)

산돌 함창석 장로

우상숭배는 ‘물질적인 것이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숭배의 대상으로 믿거나 추앙하는 일’, ‘감각적 대상을 숭배하는 것’, ‘보이는 것들의 형상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형상화한 것을 신으로 믿고 섬기는 일’로 偶는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사람)部와 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만나게 하다, 맞도록 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禺(옹ㆍ우)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줄을 짓다.’의 뜻이다.

像은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사람)部와 음을 나타내는 象(상)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음을 나타내는 象(상 코끼리의 모양, 삼 천 년 전에 중국의 북부에도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를 나타내는 말은 옛 발음이 似(사 닮다ㆍ닮게하다)와 무언가 관계가 있었던 모양으로 象(상)이라고 써서 닮다ㆍ닮게 하다란 뜻으로 썼음)과 사람(人)이나 물건이 닮는다는 뜻이 합하여 「모양」, 「형상」을 뜻하였다.

배타적 교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이 ‘우상숭배’란 단어에 꽤나 민감하다. 이유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싫어하실 뿐 아니라 금하기 때문. 사회학적으로 기독교는 종교로 분류된다. 하지만 종교를 가장 싫어하는 게 기독교다.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인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핀잔을 받은 것도 이 때문. 신앙은 우상숭배와 구별되기에 그렇다. 종교와 신앙의 구별은 우상숭배에 달려있다.

기독교 신앙은 우상숭배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여타 종교는 우상숭배와 잘 어울린다. 만들어놓은 우상보다 만들어놓지 않은 우상이 더 무섭다. 아는 우상보다 알지 못하는 우상이 더 무섭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우상숭배가 더 무서운 것은 고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게 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한없는 탐욕은 우상숭배를 떨쳐 버리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한 화가가 스승을 찾아가 길을 물었다. “저는 평생 그림으로 진리를 이루고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였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찾아드는 것은 초조함과 슬픔뿐입니다. 진리도 하나님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아,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 작품 좀 봅시다.” 그 화가는 수레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득 싣고 다시 스승을 찾아와 말했다. “걸작 가운데 걸작만 골라 가지고 왔습니다.”

스승이 다시 화가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꼭 만나고 싶소?” “예, 꼭 그리하고 싶습니다!” “자네의 그 그림으로 오늘 저녁 내 방을 좀 데우게!” 화가는 한 동안 망설이다가 이를 깨물고 일어나, 자기 작품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아궁이에서 자기 생명 같던 작품이 불꽃을 내며 타들어갔다. 화가는 이런 광경을 처음 대하면서 자기 창자가 끊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불에 타들어가는 작품을 보면서 차츰 자기 마음의 고통과 어둠과 한계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화가는 드디어 그 불꽃 속에서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웃으시자 화가도 함께 웃었다. 자신의 걸작이 타서 없어질 때 진정한 걸작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를 만나 주신 것이다. 자신이 우상같이 여겼던 작품을 버릴 때 진정한 신앙에 이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신을 위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위한다. 종교는 종교의 대상이 희생물이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희생물이다. 종교는 그를 이용해 나를 채운다. 그러나 신앙은 그 때문에 나를 버린다. 우상숭배와 종교는 같다. 우상숭배와 신앙은 다르다.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메시지를 따르는 게 신앙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제자들과 함께 기적을 행할 때 허다한 무리는 대부분 현세적 욕심을 가지고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혹자는 이 무리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순례자였고, 또 어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으로 등극할 것에 대한 기대로 따랐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나아오는 자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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