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寬容), 스키피오의 눈물...

오재영
  • 1797
  • 2019-02-14 16:43:24
시련을 겪고 있는 우리교단...

시대의 흐름과 함께 요즘에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우리의 약점을 들추어 주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많은 부분이 맞기도 하고, 틀린 것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비판이 맞는 부분은 반성과 함께 고쳐나가기에 힘쓰고, 왜곡과 편견, 지나친 비난(非難)에 대해서까지 자학(自虐)할 것 까지는 없다. 그들의 지적과 비난의 공격이 우리로 하여금 더 순수하고 강력한 신앙을 갖추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의 길에는 싸움과 대적은 없고 칭찬만 있고 편안한 것이 더 위험하다.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버리기 직전의 신발이 제일 편하다” 무슨 말인가? 망하기 직전에 가장 큰 편안함이 임한다는 말이다.

고대 지중해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패권을 두고 경합을 벌였다. 냉전 상태의 싸움이 500년간 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카르타고와 한니발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게 밴 로마는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불태우자는 의견으로 들끓었다. 로마는 관용의 국가이다. 그동안 주변 국가들과 수많은 전쟁을 했으나 적(敵)을 초토화시키는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한사코 카르타고를 불태우고자 했다. 이때 정작 전쟁에 승리하여 카르타고로부터 국가를구한 장군 스키피오 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그의 반대도 증오와 분노의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은 포위된 성을 불태웠고, 스키피오는 그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며 울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키피오의 눈물’ 이다. 그가 왜 울었는가? 그는‘불타는 카르타고에서 미래의 불타는 자기조국 로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그동안 강력한 카르타고로 인해 경거망동하지 않은 채 긴장을 유지하고, 항상 대비하는 자세로 있었다. “강한 적보다 더 큰 동기부여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리자, 긴장이 풀리고 이제는 사치와 방종으로 내분이 일어날 일만 남은 것이다.

스키피오의 예언대로 로마는 결국 외부의 적(敵)이 아닌 내부붕괴로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스키피오의 눈물, “저항이 사라지면, 생명력도 사라진다.” 역사의 교훈이다.

상처 입은 이들의 외침...

최근에 교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이 참담한 중에 너나없이 무슨 큰 해결점이라도 발견한 듯이 야단들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자신의 치부(恥部)는 도외시한 채 남의 약점을 집요하게 잡고 있는 이들이 신앙적이며 의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하는義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외침이요 신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당연히 그리 생각을 해야 한다. ‘얼마나 상처가 많으면 저럴까?’하고 긍휼히 여기는것이정상이다. 그의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가슴으로 이해하도록 힘써야 한다.

누군가 그리 표현을 했다. “비평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나뭇가지에 톱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호(口號)의 종교가 아니다.

여러해 전에 주목받는 CEO 중에 한사람 이동통신 회사 KTF의 조서환 부사장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으로 휴대전화번호 이동서비스를 제안하여 관철시킨 사람이다. 처음 입사한 애경에서는 여러 가지 상품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하나로 샴푸를 비롯하여 2080치약’과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인 ‘show’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수많은 상품을 개발한 탁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탁월함은 어느 날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서환 씨는 23세의 나이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한 해에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되었다.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든지, 뇌가 깡통 찌그러지듯이 줄어드는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너무 심한 고통에 기절했는데,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당시에 그에게는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후일에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한쪽 손을 잃은 처지라 여자 친구에게 쉽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연락을 했더니, 여자 친구가 병원에 왔다. 그는 여자 친구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0분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물었다. “아직도... 나...사랑해?”
여자 친구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두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세상을 다 얻은 듯 했기에... 여자 친구는 어린 나이였지만 조숙한 면이 있었다. 병원 근처로 이사를 와서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간호하는 일에 전념했다. 비록 한쪽 손을 잃은 그였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복도 잠깐이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찾아온 것이다. 그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딸이 있는 아버지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딸이 싫다고 하자,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의 모습으로 극단적인 질문을 했다.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양자택일하라는 질문이었다. 원래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것 이 최상의 답이다. 여자 친구는 침착하게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잖아요. 만약 아빠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면, 엄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한쪽 팔 없는 남자와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집 나가 재혼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 했어요’ 하고 곁에 있어주기를 원하세요?...”

대답이 궁색한 아버지는 식식거리면서 그냥 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조서환 씨의 마음속에 큰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 후에 그는 영문학과에 가기로 결심하고 병실에서 편입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영어문장을 세 번 정도 읽기만 해도 외워졌다고 한다. 왜일까? ‘내가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니까, 쉽게 암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곧 집중력이다.

사랑에 빚진 자는 겸손하다. 조서환 씨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찌 아내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는가?
아내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와 결혼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을 알면 겸손해진다. 지금 기고만장(氣高萬丈)으로 사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일평생 부름 받아 온갖 고난을 받고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하든 노 사도바울께서 이 땅의 마지막이 될 밀레도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경고한 말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장28절).

신앙인, 그대들은 사랑을 아는가? 진정한 사랑을 아는 이는 자기를 부인(否認)한다.
하물며 십자가의 보혈을 기본으로 하는, 언제나 십자가만을 바라봐야 할 숙명적으로 태어난 목사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전병욱, 집중력, 생명력 서론부분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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