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

김정효
  • 1258
  • 2019-02-13 20:35:38
이승만(李承晩)

. 이승만은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에서 세종의 형 양령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나 1877년 서울로 이사 도동에서 한학을 수학하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된 그 때 배제학당에 들어가 기독교문물을 접하며 청년단체인 협성회에 참여 회보 주필을 맡아 활동하다 독립협회에 적극참여했다.

. 1899 고종황제 폐위사건에 연루되어 5년7개월간 투옥되기도했다. 여기서 주목되는것은 조선조 전제군주제로는 현대적인 국가체제가 될수없다는 생각이 싹 텄음이다.

.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5년 2월 워싱턴DC 조지워싱턴대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학사학위를취득했고 1907년 하바드대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1910년,3 재미동포의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 귀국했다. 1912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자 4월 감리교회 참석을 이유로 재도미했다. 감리교회 활동 중 박용만의 도움으로 활동공간을 하외이 호놀루루로 옮겼다. 이때 박용만의 "무력투쟁을 위한 국민군단 창설" 주장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 주장으로 대립했다. 여기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주장은 6,25남침전쟁 중에도 4년제 육사 정규 과정 설립과 정신의 맥이 같음을 알수있다.
.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천명에 감명되었다. 1919 3,1운동 직후 노령 임시정부 수립시 외무총장에 취임했고 4월 10일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았으며 1920,12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1921,5 미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차 미국으로향했고 1924,11 호놀루루 대한인동지회 종신총재에 취임했다, 이때 유학 중인 조병옥 허정 장택상등과 인연되었다.
. 1945년 10월 독립촉성중앙회장 취임했으나 좌우갈등으로 1946,6,3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주장했다, 1947 4,21 중국 장개석 지원한 비행기로 귀국했으며 1948,5,10선거시 동대문 갑구지역에서 당선되었다. 5,31 국회가 소집되었으며 7,20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12월 UN에서 승인을 받았다.

. "국민이 원한다면"이란 성명으로 1960,4,26 대통령직을 하야했으며 1965,5,29 하와이로 망명했다. 1965,7,19 하와이 요양원에서 서거했으며 1965,7,27 가족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국권이 물란했던 조선조 말엽 배재학당에서 서구문물인 기독교사상을 접하고 특히 전제군주제로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부응 할 수 없고, 국민교육을 통한 국력신장의 길이 한국의 미래임을 스스로 터득했다. 이는 어려서 부친에게서 새겨들었던 "고목에 피는 꽃은 곰팡이 뿐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의 의미와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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