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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궤도를 수정해야 할 때...
오재영
- 1618
- 2019-02-27 08:44:31
모리아 산 정상의 아브라함...
오늘 혼돈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질 생각 없지만, 그에 따르는 대가는 언제나 정상적으로 사명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이들의 마음을 떨리게 한다. 우리의 우선순위도 분명하지만, 그가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0-12).
“내가 이제야 알았다”는 이 문장을 반복할 때마다 매번 다른 단어에 강조점을 둔다면, “(내가) 이제야 알았다.” “내가 (이제야) 알았다.” “내가 이제야 (알았다).”의 아브라함은 과연 이 가운데 어느 말씀을 들었을까? 오늘 우리가 아는 내용은 아브라함의 과거 하란의 이야기이며 그가 -방관자에서 구도자로, 이제는 명령 앞에 지체 없이 곧 떠나는 자로-변한,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모습이다. 며칠 전에도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고”길을 떠났다는 성경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 어떠한 머뭇거림도, 지체함도, 반항과 협상도 없이, 그는 그대로 길을 떠났다. 우리는 여기에서‘너무 단순하게, 너무 쉽게’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동안 오랜 세월을 이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해 왔다는 사실과, 그 음성을 이제는 완전히 믿을만함을 하란의 人生의 중간 궤도수정으로부터 시작하여 파란만장한 100여년의 지나온 생애와 함께 어렵게 몸으로 터득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때 그가 의뢰하는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이제 그는 그 명령이 어려운 것만큼이나 단순하게 경청함과 순종하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르심에 따라 예상치 못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한 후에 시작부터 항상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창세기 22장은 이때까지도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한다. 무엇을 시험한다는 말인가? 바로 순종하고 신뢰하는 그의 능력,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시험한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가 듣고 따른 말씀은 그의 가슴 속 깊이뿌리를 내려 이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가 없는 거목으로 성장을 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전혀 이해 할 수없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나누는 관계와 함께, 지금도 떠남이 분명치 않고, 훈련되지 못한 우리의 눈(眼)에 보이지 않는 그 “숨은 목적” 이 진행되고 있었든 것이다.
그가 지난 날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출발할 때에는 아브라함도 분명한 계획조차 정확히 모르고 출발하여 불완전한 출발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수많은 실패와 실수, 시련, 드디어 생의정점에서 그를 부르셨던 하나님으로부터 마침내 인정을 받고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그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언약의 말씀,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獨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盛)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對敵)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너무나 빠른 출발이 지닌 위험...
최근 우리의 주변에서 기대를 모으던 이들이 그 기대와 달리 사명감조차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러한 사람으로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어쩌다 한 둘 허물어지는 모습들이 아니다. 한동안 나름대로의 소문과 함께 회자되던 이들조차도 정작 성직자로 처신하는 모습들은 한마디로 안타까움뿐이다. 그때 드는 생각이 왜 저리 인생이 비열하고, 조잔하고, 조잡스러운가? 하는 마음과 모두가 본인들의 역량이지만 아직까지도 주제 파악이 안 된 부실함이 일상화된 모습들이다. 그가 누가되던 적어도 내세를 말하는 求道者 집단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음이 개인의 榮達이 아님은 우리 모두의 상식이다. 그것은 그가 누구이든 각자가 엄위 앞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도달 할 수 없는 영혼과 마음의 영역(領域)들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달리 섬김을 전제로 하는 이 길이 어찌 개인의 출세와 치부의 욕망(慾望)으로 비춰질 수가 있겠는가?
어느 목사가 그러한 표현을 했다.
“목회자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교회라는 배에 사람들을 태우고 운항하는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단지 배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먼저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겨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릴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거친 파도와 폭풍 중에서도 자신이 책임지고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는 거룩한 강인함으로 연단된 꿋꿋함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라 했다. 그러하기에 그가 애초부터 꼭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날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처럼 성장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목회자(牧會者)란 자신의 세대에서 주님께 부름을 받아 옛사람인 자기부인을 전제로 성별된 사람이며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리기 위해 주님 뒤를 따르는 현존하는 희망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성(知性)과 영성(靈性)이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 지성과 영성은 공적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이 땅에서 섬기기 위하여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찰을 추구하도록 하는 부단한 훈련이다. 그것은 목회자로서 지성을 계발하는 것이 자신이 잘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유용한 일을 하기 위하여 성장을 위한 사고체계의 확립과 더불어 말씀 앞에 언제나 경청(傾聽)하는 삶이다. 그것은 경청함만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든 분들과 어린아이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 모두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줄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어린아이들은 종종 너무나 정직하게 사물을 단순화하며, 노인들은 어떤 쟁점에 대하여 오랜 시간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안목을 제공하므로 고통 받는 이들로 무엇이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문제인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우리가 기꺼이 사람들의 발밑에 앉아서 겸손히 바른 질문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성경말씀 외에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인생의 궤도를 잘 수정한 사람들...
어느 목사가 주일날 아침 교인들에게 말했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시듯이 모든 걸 안다면, 이 교회에 다시는 오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하나님처럼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안다면 여러분을 이 교회에 있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의 웃음소리가 가라앉은 다음, 그들 모두는 이 말의 배후에 있는 진실에 대해 깊이 생각들을 했다. 그것은 참으로 엄숙한 사실이었다. 20세기 중반의 위대한 영국인 선교지도자 프레드 미첼(Fred Mit-chell)은, “지도자의 자질은 남에게 깔려 있는 것을 견디고, 충격을 흡수하고, 완충 역할을 감당하며, 심한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오는 소모와 계속되는 알력과 시련은 최대의 성품 테스트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소유하고 있는 남다른 성품이란 그 사람의 숨은 생명력이다.
모세도 젊은 시절에 지도자가 되려는 조급함과 야망에 불탄 나머지 애급군인을 죽였다. 그는 그 일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 했으나 그의 오해요 착각이었다. ‘토머스, 카힐’은 가시덤불에서 질문하는 모세에게 주어진 이름(YHWH, 어떤 이들은 여호와란 이름으로 사용한다))은 적어도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수도 있고, 인간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표현할 수도, 자기백성에게 항상 임재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셋은 모두, 모든 신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아버지-을 소개한다. 그 사명으로 그는 430년 만에 해방된 자기민족을 인도하였다.
지도자라 하여 삶의 위기에 처할 때 모두가 직책과 책임에 걸 맞는 책임감 있는 고상한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적인 빈곤이 드러나게 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한 공동체나 개인의 성품에서 악이 용인되면 관계된 모든 이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이렇게 썼다. “의심과 위험 한복판에 처한 사람을 보라. 고난과 역경(逆境)의 순간에 그가 진정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리라. 바로 그때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실한말이 스며나오리라. 가면은 벗겨지고 실체만 남는 것이다.” 오늘 나는 우리가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이들에게서 이 모습들이 보고 싶다...
오늘의 분주한 모습들을 보면서 책에 있는 고(故)말라기 마틴(Malachi Martin)의 말을 소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증진시킨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원칙을 서슴없이 무시할 수 있음을 역사가 가르쳐 준다. 말은 기독교적이지만 행동은 비(非)기독교적인 것이다. 그 결과는 모두의 파멸이다” 구도자들인 우리에게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표현 했다. “현재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려면 그는 먼저 현재의 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일단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 바로 그 지점이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숨은 생명 맨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자기부인(自己否認)과 삶의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참고서적, 고든맥도날드의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