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와 진회 감리교회

도현종
  • 1874
  • 2019-04-03 02:37:36
후세에는 감리교회의 이런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평가할까?

‘찻잔은 주전자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 물을 얻는다.’제갈량의 어록이다. 낮음은 예수의 십자가 걸음이다.


진간천(秦澗泉)이란 자가 송나라 때의 명장 악비(岳飛)의 무덤인 악왕묘(岳王墓)를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그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 하는구나.’

요우티아오라는 중국식 꽈배기는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 진회(秦檜)를 튀겨 먹는다는 뜻으로 전해진다.

남송 시기에 민족영웅으로 떠받들리는최고의 장군 악비(岳飛)와 최고의 3대 간신으로 전해지는 진회다.

악비는 남송시기, 금나라의 침략에 맞선 명장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엄한 교육 밑에 자랐으며 용기와 지력이 뛰어났다. 병법에 능란했던 악비는 전쟁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
당시 금나라에서는 "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비군'을 무너뜨리기는 힘들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악비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충신 악비는 간신 진회의 견제를 받았다.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평을 추진했던 간신 진회는 악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황제 고종을 악비의 주전파 장군들을 군대로부터 격리시키는 방식 등으로 악비의 지휘권을 제한시켰다.
이런 화평의 움직임에 반발한 악비는 관직을 내놓는다. 악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던 간신 진회는 악비를 모해할 음모를 꾸민다.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갔고 악비는 아들과 함께 감금됐다. 진회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그의 아내와 함께 악비와 그 아들을 독살했다. 이때 악비는 39살이었다.

악비는 후세에 충절과 공적을 인정받아 죽임을 당한 지 37년이 지나서 '무목'이라는 시호를 받고, 70년 뒤에는 '악왕'으로 추서된다. 
반면 악비를 독살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간신 진회는 간신으로 낙인이 찍혔다. 

사람들은 간신 진회에 대한 원한으로 밀가루 반죽을 진회 얼굴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겼다. 기름에 튀겨도 시원치 않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면서 간신 진회를 씹어 먹는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많은 중국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간신 진회의 회(檜)자가 들어가는 것을 꺼려 회(檜)자는 이름자로 절대 쓰지 않는다.
항저우의 악비묘(岳飛墓)에 가면 악비의 동상과 함께 간신 진회 부부가 꿇어앉아 있는 동상을 볼 수 있다. 나라를 망하게만든 간신의 비참한 모습이다.

악비의 무덤 앞에는 악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죽게 한 간신 진회(秦檜), 진회의 부인 왕씨, 만준(萬俊), 장준(張俊) 네 사람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철 창살에 갇혀 있는 동상 위에는 침을 뱉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비열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침을 뱉었으면 이런 문구가 붙어 있을까 싶다. 

우리가 주님의 법치(法治)에서 멀어지면 이런 치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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