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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기다리는 것 (4.7 주일낮 설교문)
오세영
- 1692
- 2019-04-10 00:32:17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사람이나 어떤 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때로는 처절하리만큼 고독하고 슬프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기에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에 대하여 잘 대처해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미학”이란 말이 참으로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것은 기다림의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외롭고 아픈 것이기에 기다림을 오히려 무기로 삼아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기다림의 미학입니다.
기다림의 미학이란 말에는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결실을 보고 열매 맺기도 하고 해결도 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불행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초의 여유라는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교통사거리를 지날 때 운전자나 보행자나 3초의 여유를 가지면 교차로의 사고는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3초만 기다려주면 문이 닫히기도 하고 그 사이 몇 사람이 더 탈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헤어질 때 3초만 뒷모습을 바라봐 주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다려 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다림의 절정을 보게 됩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의 이야기 입니다.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그가 이삭을 낳을 때에는 그 몸이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얼마나 기다림의 아픔이 아브라함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인간이 기다림을 승화시킬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진정 믿음의 세계는 기다림의 세계라고 할 수 있기에 오늘 제목을 “믿음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은 75세도 너무 늦은 것이었지만 무려 100세가 되기까지 아들이 없었기에 그 기다림은 기다림의 미학을 훨씬 지나는 것이어서 신앙의 세계가 아니면 설명 할 수 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참으로 형언 할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나도 벌써 지나는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세계는 그것이 아니기에 아브라함은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은 그처럼 가혹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바로 기다림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두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 보아도 모두 기다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집니다.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귀한 것일수록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이기에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기 까지는 긴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서로간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있고 우리가 주님께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기다려 주셨던 시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다림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몸이 죽은 자처럼 되어져 가도 자식을 낳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들마다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난과 환란가운데서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오곡백과가 여름을 지나야 하듯 작렬하는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곡식은 무르익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무르익어야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고 기다리는 사람도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 큰 고난 가운데 언제나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그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긴 고난의 시간 속에서 나의 부족함을 늘 인정하며 달게 받았습니다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욥이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보게 된 것처럼 기다림의 고통 속에서 보여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배우며 영적 멧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강태공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래 강태공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주나라에 강태공은 젊어서부터 인재로 평가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글을 읽는 사람일뿐 생할의 능력은 없어서 부인이 생활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러다 부인이 강태공의 나이가 50이 넘어도 출사히지 못하니 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강태공은 안타까워하며 내가 80이 되면 재상의 부인이 될 텐데 하고 탄식하였답니다.
부인이 나가고 강태공은 임금을 만나려고 웨이수이 강으로 나아가 낚시를 하게 됩니다.
그는 낚시 밥을 먹이지 않고 낚시를 하게 되는데 임금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문왕이 강가로 오게 되고 문왕은 강태공을 한 눈에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궁궐로 함께 들어갑니다.
그 후 강태공의 활약으로 주는 힘을 얻어 제후국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강태공의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80이 되어도 그의 기다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반면 평생 고생했지만 강태공을 끝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던 부인은 재상의 부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랑 되시는 주님과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세상에서 말하는 기다림의 미학을 지나 풍파 많은 세상에서 놀라운 기다림이 되어 변질되지 않고 낙심하지도 않으며 굳건히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이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