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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전 오늘 그가 우리에게 보냈던 메세지
장운양
- 3333
- 2019-05-31 04:33:34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 동포에게 드리는 글,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김의기 열사 약력
․1959년 4월 20일 경북 영주군 용암리에서 김 억 선생과 권채봉 여사의 4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964년 3월 6세의 나이로 재산초등학교 입학
․1970년 2월 영주 중부초등학교 졸업
․1971년 3월 영주중학교 입학
․1971년 서울 배명중학교로 전학
․1973년 2월 배명중학교 졸업
․1973년 3월 배명고등학교 입학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1977년 서강대 KUSA하계 농촌 활동 대장(강원도)
․1978년 봄에 후배들과 소그룹 학습을 시작하는 한편, 농업 문제연 구모임에 참여하기 시작
․1978년 여름 서강대 하계 농촌 활동 대장 역임.
․1978년 9월 김리교 청년회 전국 연합회(감 ․청․연) 참여
․1978년 12월 서강대 등의 농촌 활동 지도
․1979년 3월 감․청․연 농촌 선교위원회 위원장
․1979년 6월 서강대 농촌 활동 지도 및 하계 농촌 활동 참여(고문 및 규율부장). 감청연 여름 선교 교육 대회홍보위원
․1979년 8월 서강대에서 근대사 연구 모임 주도
․1979년 10월 28일 서강대 교내시위 계획. 10.26사태로 무산
․1979년 12얼 서강대 민속문화연구반 농촌 활동 지도
․1980년 2월 서강대 총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 활동에 적극 참여.
감․청․연 제 23차 겨울 선교 교육대회 진행위원장
감․청․연 농촌선교위원장
기독교 청년 협의회 (E.Y.C) 농촌 선교 분과 위원장
․1980년 3월~5월 농촌(전남지방)과 서울을 왕래하며 농촌 문제 정 리. 농촌 활동 자료집 발간에 주력
․1980년 4월 “농촌 활동 안내서” 기획․제작
․1980년 5월 광주 봉기 목격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 (607)호에서 떨어져 순국
․1980년 6월 2일 오전 11시. 서울대학병원 영결식장에서 감․청․ 연, 기․청, 형제교회 주최로 영결 예배 거행. 경기도 일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힘
․1980년 8월 서강대학교 졸업 예정
추모시
열사는 자유를 외쳤다 한다.
김병서
열사는 죽음을 부르지 아니하고
열사는 자유를 외쳤다 한다.
그 해 그 날은
자유민의 가슴을 겨냥한 악독한 총칼도
국토를 포위해 쳐들어 오는 독재의 폭군들도
감히, 민중의 땅에 자유를 심고 살아가는
감히, 민중의 땅에 평화를 심고 살아가는
하얀 열사의 가슴에로는
하얀 열사의 가슴에로는
총질도 칼질도 체포도 고문도 재판도 무기징역도 사형도 추방도
결코, 검은 손에 의해서는
한치의 침범을 자행할 수는 없었다 한다.
열사는 죽음을 부르지 아니하고
열사는 자유의 새벽을 외쳤다 한다.
그리고 그 해 그 날은
열사는 정의의 승리를 선포했다 한다.
삼천리 강산 민중의 국토 머언 곳 산골 마을마다에로
열사는, … 열사는, … 열사는
밭을 가는 농민들 상처난 가슴을 조용히 읽을 줄 알았고
외채에 시달리는 이웃들 신음 소리에 울음참고 함께 했으며
논두렁 밭고랑 산길 뛰며 밤길을 헤치고
총든 정치인에게,
기름진 자본가에게
빼앗겨 가는 농산물 지키는 데 앞장서 농민군되어 일어섰다 한다.
농촌을 떠나 음산한 도시로, 도시로
방황의 길 떠도는 친구들과는
어둔 밤 불을 밝혀 어둔 밤 불을 밝혀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가자, 어둠 헤치고
우리 것 우리가 지키러 가자, 양손 맞잡고
우리 것 우리가 먹으며 살자, 가슴 뜨겁게
열사는 어둠을 부르지 아니하고
바람보다 먼저 독수리보다 더 먼저
열사는 새벽에 햇살을 마주했다 한다.
지금은 일산에 꽃으로 살아
다 피우지 못한 꽃하나 붉게 더없이 피우며
피어나면서 붉게 피어나면서
갈라진 국토를 지키고 총격을 거역하고
지금은 강산에 자유혼으로 살아
분단의 경계선 넘어 자유 날개치며
바람보다 먼저 독수리보다 더 먼저
통일의 조국을 흥겹게 마중하면서
평화의 나라에 꽃씨를 심고 있나니
……… 그토록 어두웠던 독재의 포승줄도 고문도
투옥도 재판도 징역도 사형선고도 종이호랑이 독재까지도
결토 한번도 단 한번도 그해 그날
하얀 열사의 자유의 뜻을
무너지게는 못했습니다 …………… 오늘도 열사가
조국땅 조국의 거리를 가슴펴 활보하듯이
열사와 함께 국토의 하늘을 날개치며
마음껏 날을 수 있을 그날까지는
캄캄한 이 나라의 조용한 혁명이고자 했듯이
우리도 이 나라의 조용한 혁명이고자 합니다…….
열사는 죽음을 부르지 아니하고
열사는 포위를 넘어 포위를 넘어
구속을 넘어 억압을 넘어 탄압을 넘어
독재의 칼을 넘어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
제국의 핵무기를 넘어 전쟁의 모든 학살과
실상의 폭탄을 넘어 톡탄을 넘어
열사는 자유를 외쳤다 한다.
자유를 열사는 자유를
추모집을 펴내면서
김 의사 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지 어언 5년, 열사의 마지막 절규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민족 통일과 민중해방, 민주 쟁취의 그날은 아직도 멀기만 한다.
그러기에 김 열사의 원혼은 지금도 암울한 회색빛 죽음의 거리 거리를 맴돌며 이렇게 피맺힌 외침을 계속하고 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어나라! 동포여, 일어나라!”
열사는 이 땅의 온갖 모순과 질곡을 온 몸으로 맞부닥쳐 싸우다가갔다. 그의 짧고도 불꽃튀는 삶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깊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김 열사는 올바르게 살려는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잇는 희망이다. 민중의 영원한 벗이다.
짧은 준비기간, 미흡한 노력, 불충분한 자료로 초라한 추모집을 내면서 혹 열사의 삶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추모집의 발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보다 더 완벽한 추모집을 펴내기위한 준비 작업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이 추모집을 펴내기로 했다.
그간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신 김 열사의 가족, 친지, 교회 관계자들, 서강대선후배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김 의기열사가 가던 길을 오늘도 이어서 함께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1985년 5월
제1부 추모의 글 모음
Ⅰ. 한 역사의 새벽을 기다리며 /김 홍기
Ⅱ. 사랑하는 나의 동생 의기에게 /김 주숙
Ⅲ. 의기에의 추억
Ⅳ. 시. 한사람 /김 옥현
한 새 역사의 새벽을 기다리며
김 홍 기
한 어린양의 죽음, 수천 광주시민의 희생, 수천 민주시민의 투옥 등 오늘의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동포의 환란을 두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하면서, 피를 토하며 목놓아 울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1) 고 김의기 형제의 죽음의 의미
형제교회의 한 어린양의 외롭고 처참한 죽음을 가슴깊이 애통합니다. 그 형제는 목자인 저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기고 앞서갔습니다. 함께 죽지 못한 미안한 마음, 송구스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애곡하여도 울 줄 모르고, 우리에게 회개의 채찍을 가하였건만, 아직도 무디어지고 패역하고 회칠한 우리의 가슴은 굳게 닫힌 채 총칼이 무서워 팔다리가 얼어붙었습니다.
우리의 죄, 한국교회 700만 성도의 죄. 아니 3천 5백만 동족의 죄를 대신해서 그는 속죄재물이 되었습니다.
그 무거운 죄짐을 지고서 홀로 외롭게 버려진 채 겟세마네의 씨름, 비아돌로로사의 걸음, 골고다위에서 피흘리기까지 그 어린 양의 온몸과 온 마음이 얼마나 떨렸으며, 얼마나 아팠으며, 미쳤겠습니까? 인간에게 버림받고 하나님께마저도 버림받아 높은 고층 빌딩에서 낙하하여 자결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답답하며,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예수처럼 살겠다고 외롭게 소외당한 농민과 노동자의 친구가 되려고 몸부림쳤던 형제가 예수처럼 심장터져 피를 왈칵 쏟으면서 죽었습니다. 왼쪽 이마는 구멍이 뚫렸고, 오른쪽 발목은 탈골이 되어 망치처럼 튀어나왔으며, 양손목은 아스팔트 바닥을 딛다가 탈골이 되어 튕겨졌고, 가슴팍은 긁히어 시퍼렇게 멍들었으며, 입과 코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문제 많은 땅덩어리를 하직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3천 5백만 아니 5천만 배달겨레의 그 무거운 죄짐을 홀로 지고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넘어지다 못해 떨어져 족죄의 그의 마지막 절규는 “ 동포여 일어나자! 동포여 일어나자! 동포여 일어나자! ” 였습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겠습니다. 이기주의와 향락주의, 물질만능주의와 명예욕망주의의 잠에서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탱크와 총칼 앞에 민족의 죄짐을 지고 의기와 함께 죽으며 골고다를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2) 한국의 역사적 정황
우리 한반도의 역사적 삶의 자리는 한마디로 “ 자유에서의 도피”입니다. 무서운 일본 제국주위에서 자유가 된 우리는 더욱 자인한 공산당에 노예가 되어 안주하는가 하면, 더욱 비인도적인 파시즘체제에 예속되고 갇히어 현상유지하려는 사회심리 속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자유를 부르짖던 블란서 혁명이후 더욱 무서운 나폴레옹 독재체제에 노예가 되어 자유를 포기했던 블란서처럼, 봉건제국주의에서 자유화 후 더욱 강한 히틀러 나치즘에 얽매였던 독일처럼 우리도 자유에서 도피하려 합니다.
4․19혁명이후 이승만 독재정권 보다 더욱 악랄한 5․16군사 정권에 안주하였었고,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처형되자 12․12군사 쿠테타로 세력을 잡은 군부 일당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맡기고 안보만 유지하려는 무서운 사회심리의 굴레에 빠져들어가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수천명의 광주시민을 현대 세계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잔인하게 피흘려 죽이고도 유위 부족하여 더욱 수십만, 수 백만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죽은 수천 광주시민의 피가 하늘에 사무쳤고, 수천 광주시민의 미친듯한 절규와 호소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박정희를 심판하신 하나님, 더욱 악랄하게 불의를 행하는 군부 일당을 때려 잡으실 것입니다. 미친놈의 운전사를 끌어내리려 했던 본 회퍼 목사처럼, 미친 살인마 군부 일당을 끌어내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에 노예가 되어도 자유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절대권력은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고 부자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은 것이 두려워 자유를 찾기보다 자유에서 도피하려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만 두려워합시다. 우리의 영혼은 못 죽이고, 몸만 죽이는 세상권력을, 총칼을 두려워하지 말고, 거기에 무릎을 꿇거나 노예가 되지 맙시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정의와 사랑의 뜻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향유합시다.
3)교회의 사명
이런 환란과 위기에 처하여 한국교회는 새로운 사명을 의식하고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권력에 어용화되지 맙시다. 독일의 민족교회가 히틀러 정권에 어용화되어 히틀러체제를 찬양하고 순종하였듯이 보수적 한국교회들이 박정희유신체제에 어용화되어 얼마나 유신의 주구노릇을 하였습니까? 항거하는 지도자나 선교단체를 공산당이라고 배신하고 팔아버렸던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권력위에 군림하지도 맙시다. 중세 로마카톨릭이 세속권력에 군림하여 지배하려 할 때 교회는 부패하고 암흑기에 처하였듯이, 우리는 자유당 이승만정권 당시의 한국교회처럼 세속정치와 야합하여 세속정치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세속정치에 무관심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교분리를 엄격히 주장하면서 신비적 황홀경과 내세적 타계신앙에 몰입하는 퇴폐적 교회 상을 어서 속히 탈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투쟁(Against)을 넘어서 변혁(Transformer)하는 탈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와 정치를 변혁시키는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여러 선지자들에게 임하셨던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한국역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군부 일당의 악령들을 추방시킬 것입니다. 귀신들린 한국 정치가들을 성령의 방망이로 때려잡읍시다.
악령추방운동에 앞장서는 한국교회가 됩시다. 물에도, 불에도, 피속에서도 정신없이 미쳐돌아가는 귀신들린 자들을 성령의 강한 바람으로 쫓아내야 하겠습니다.
한국 부흥자들은 개인의 병마귀만 쫓아내지 말고 정치마귀, 군대마귀, 레기온을 쫓아냅시다. 한국교회는 정치적 악령추방을 위해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기도합시다. 아니 가두행동 예언으로 악마를 뗘려잡읍시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힘센 장수, 칼과 창을 잘쓰는 블레셋군인 골리앗을 때려 잡았듯이 우리 한국교회도 물맷돌하나 만큼도 못한 부족한, 약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탱크와 총칼로 권세를 잡은 골리앗, 군부 일당을 때려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4)하나님의 승리
역사는 총칼의 힘으로, 군사의 힘으로 이끌어 온 적이 없습니다. 물리적 힘으로 역사를 움직이려는 파시즘체제는 정신의 힘, 믿음의 힘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예언자들에 의해 아니, 민중의 얼에 의해 무참히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민중들에게 자유와 정의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분은 역사의 주인이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민중의 호소가 하늘에 사무칠 때 하나님은 역사의 종말을 실현하십니다. 속죄제물 어린양들의 피의 호소가 하나님의 귀를 울리시고, 하나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때 하나님의 정의로운 팔은 일하십니다.
수많은 애국투사의 피를 보시고 8․15 해방을 주신 하나님, 185명의 젊은 피를 값있게 하시려고 4․19 민주주의를 주신 하나님, 유신체제에 죽은 억울한 순교제물의 호소를 갚으시려고 10․26 사건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의 동포들의 피를 속죄 제물로 삼으셔서, 김의기형제를 어린양으로 삼으셔서 이 한국을 속죄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군부체제의 종말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샛별은 떠오르듯이, 이 한국 땅에도 샛별되신 예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새 역사의 새벽을 밝히려고 예수가 샛별이 되어 임마누엘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 의기에게
의기야.
네가 간지 벌써 오년이 지났다.
네가 없는 이 오년 동안 이 나라는 네가 죽음으로까지 원하던 방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의기야.
막내라 언제나 어리게만 생각했던 너. 국문학자가 되어서 우리나라의 작품들을 외국에 소개하겠다던 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달라졌었다.
네가 가야 할 길은 좋은 직장 다니며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며 고민하고 애썼었지. 그런 너의 고민을 이해하고 도와주기는커녕 너를 따라다니며 너를 감시하고 괴롭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를 핍박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작업복을 입고 고무신,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네가 안쓰러워 양복입고 구두 좀 신고 다니라며 야단을 치던 이 누나레게 좋은 옷 입으면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어서 도둑같은 마음이 생긴다며 그걸 거절했었다.
그리고 넌 말했었지.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게 아니라고,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말이야.
노동자, 농민이 왜 그렇게 가난하며 억눌리는지 그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던 네가 죽음으로 우리의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널 이해하지 못했고 원망하고 슬퍼하기만 했었다.
의기야.
네가 죽음으로 가르쳐준 그 길을 이제야 겨우 보았다. 네가 교회에 나가는 걸 그토록 말리던 우리 가족도 이제는 교회에 나가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바로 살고자 이 누나는 신학의 길을 택했다.
너의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려고 애를 써보지만 네가 없음에 마음 아프고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그리고 열심히 살지 못함이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럽구나.
보고싶은 의기야
네가 없음을 마음 아파만 하지 않고 네가 간 그 길. 그 의미를 찾고 살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애를 쓸게. 너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들지 않게 그리고 너의 뜻이 나의 마음 속에, 나의 삶속에서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겠다.
항상 지켜봐주렴.
나의 사랑하는 의기야.
1985 년 5 월
누나 김 주숙
의기에의 추억
대학 4학년을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방황했던 가장 다정한 친구 중의 하나였던 의기를 회상하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의기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 학년에 KUSA라는 클럽에서였다. 그 KUSA의 첫 수련회에서였다.
도착 다음날 세면장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이 “굶었니?”하고 인사를 걸어왔다. 그는 항상 “ 굿모닝”을 그렇게 말했다. ‘익살 좋은 애로구나’ 생각하면서 그냥 웃어 주었다. 이름이 인상적이어서 쉽게 기억할 수 있었는데, 그의 외모는 작은편이었고 여성적이며 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어쨌든 그 이후 우리는 몇몇 회원들과 함께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언제 보아도 부담스럽지 않고 사심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친구였다. 그런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실하고 편협 되지 않은 평등한 내면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어진다.
우리에게 대학 1 학년 시절은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기였다. 무엇인가 알고 싶어하고 찾고 싶어하던 우리에게 KUSA는 별다른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철저한 관념적 언어들로 인하여 우리의 혼란만 가중되었다.
페시미즘의 시기- 1 년을 그렇게 허공 속에서 보냈다. 왠지 모를 패배감, 좌절감- 그렇게 동경했던 대학이란 곳은 정적의 세계였다.
주제를 놓고 얘기하지만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던 소외감, 맹목적으로 열심히 쫓아 다녔던 농촌 봉사활동, 그러나 그 뒤에 따르는 공허함은 우리를 맥빠지게 하였다.
우리는 거의 매일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다방으로 기어 들어가곤 했다. 의기와나, 그 외 몇몇 친구들이 모여 나태한 다방 분위기에 젖어들곤 했다.
그 곳에서 나눈 얘기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의기에게서 받은 성탄 카드에 적혀 있던 말이 생각난다. “이방의 신의 축제에 코가 삐뚤어지게 술이나 마시자”
의기는 그 당시 연애 감정에 빠져 있었다. 대상은 같은 클럽 여학생이었다고 추측되는데,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감정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않았다. 나는 한편으로 속시원히 털어놓지 않는 그가 섭섭했었다. 그 사건은 그의 일방적인 감정에서 시작되어 일방적으로 끝나버린 것 같다.
의기의 성격은 대조적인 두 면을 갖고 있었다. 소심하고 여성적인 면과 불같이 정열적이고 과감한 두 가지 면이다. 그의 행동에서는 종종 이 두 가지 면이 교차되곤 했었다. 집안에서 막내로 보호받으며 성장한 것이 전자의 성격을 규정지었을 것이라 생각되며. 흡사 선동가적인 후자의 기질은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2 학년 초 나는 패배주의적인 KUSA의 분위기에 진절머리를 내며 탈퇴해 버렸다. 좀더 희망적이며 쾌활해지고 싶었다. KUSA도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그도 거의 비슷한 변화를 느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한동안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77년 가을의 교내 시위 사태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데모 행렬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만났다.
그와 나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의식 변화를 맞았다. 교내 시위 사태는 우리의 정신 세계에 긴장을 불러 일으켰고, 감추어져 있던 또 다른 세계에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철저히 단련시켜 줄 수 있는 선배나 동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서강대는 그 당시 의식의 변화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이전의 선배들과는 단절된 상태였고, 그나마 있던 소수의 동료들은 연이은 시위사태로 인하여 감방에 갇힌 상황이었다.
그와 나는 왕성한 의욕만으로 이곳 저곳 부딪혀 나갔다. 기존의 서클을 변화시켜 보자는 합의에 따라 우리는 KUSA의 1, 2 학년과 같이 공부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기는 아주 정열적으로 활동하였다. 세미나 준비에 소홀하거나 결석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모나지 않은 성격은 후배들과 자연스런 접촉을 가져왔고 자신도 많은 공부를 하여 후배들에게 확고한 신념을 길러주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그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절대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예를 들어가면서 손짓, 발짓 섞어가며 농담도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래서 항상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농담을 많이 해서 그저 웃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본질을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생적 그룹의 한계는 다른 경우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이어서 KUSA 후배들과의 모임은 큰 진전없이 끝을 내게 되었고 그 후로 의기는 외부 모임을 찾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사람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외부와 접촉하는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거의 결정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농촌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여름방학에는 세 번이나 농촌활동을 다녀올 정도로, 농촌 문제에 대단한 관심은 가졌다. 그는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부딪치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한달 동안 볼 수 없었던 의기가 어느 날 교정에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은 그대로 넝마를 방불케 했다.
새까맣게 탄 피부, 갈아입는 걸 보지 못한 그 한결같은 국방색 면바지에 맨발의 고무신, 그 때의 모습이 의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고 아마도 의기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의 그러한 모습이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양복을 입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단한 장 남아 있는 졸업 앨범 속의 의기 역시 수수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내가 의기의 또 다른 능력을 발견할 때 1980년 봄이었다. 그 시기는 복교생들이 학교에 다시 들어오고 학원에 민주화 바람이 불 때였다. 모임이 공개적으로 개최되고, 그때마다 의기는 웅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언변은 좌중을 휘어잡고 때때로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아마 당시 서강대 내에서 그 분야에 있어 의기만한 웅변 솜씨를 갖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의기는 학내 문제보다는 농촌 쪽에 더 흥미를 갖고 그 곳에서 활동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그의 마장동 집을 처음 찾아 갔던 때는 78년 여름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들은 조그만한 철공소를 꾸려나가고 있는 이모집에서 공원들의 밥을 해주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의 형들이나 누나가 대학 교육까지 받지 못한 반면 의기만큼은 집안에서 기대가 촉망되는 아들이었다.
형제들 중 머리가 제일 비상했고 부모도 집안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뒷바라지 해 주었다. 철공소 작업으로 인해 소음은 말도 못할 지경이어서, 우리들은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집은 도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도시적인 사람들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의기가 즐겨 피우던 담배는 주로 개나리와 환희였다. 이는 그가 의식이 깨어가면서 일하는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겠다는 생각의 말없는 표현이기도 하였고 실제로 농촌 활동을 다녀온 뒤에는 줄곧 이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은 허식이라기 보다는 그에게 있어선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가 즐겨 다니던 술집 역시 학교앞 조그만 구멍 가게 지하실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그곳은 주로 서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린 항상 막걸리에 노가리 구이, 돈이 좀 있으면 두부나 묵부침을 시켜 먹었고 외상을 달아놓기 일쑤였다. 후에 어떤 선배와 함께 이곳에 왔었는데 그는 서울에 이러한 술집이 있다는 것에 (너무 초라해서)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의기의 장례가 치러지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동년배들보다 두 살이나 아래였다. 59년이었는데 그의 누나가 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학교에 몹시도 가고 싶어해서 정식으로 입학하지 않고 다니게 했는데 이듬해 1 학년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워 할 수 없이 월반했다고 한다. 이 비밀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도록 가족에게 일제히 함구령을 내렸다 한다.
역사를 역가정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그가 만약 지급 살아있다면 성실하고 능력있는 일꾼으로 농촌에서 활동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는 그의 장난스런 얼굴을 볼 수 없고, 그 힘찬 외침과 구성진 노래소리(그는 “서울로 가는 길”을 즐겨 불렀다)를 다시 들을 수 없으나 그의 죽음은 슬픔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피비린내 나는 광주 사태직후 그는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무디어져가는 우리들의 양심에 칼을 대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의 죽음을 잊는 것은 동족 살상극이 벌어졌던 광주 시민 항쟁을 잊는 것이며,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며, 우리의 양심조차 숨기는 일일 것이다.
한 사 람
김옥현
그는
죽었다.
자결했다.
나이 스물한살의 청년이었다.
대학 4학년의 학도였다.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참 사람이었다.
힘없이 보이던 애였다.
말없이 수줍어 하던 시골놈이었다.
순진하고 꿈이 컸던 장부였다.
여자의 살 맛도 한번도 못 본 동정이었다.
그는
가슴에 불덩어리가 끓고 있었다.
민족 혼과 얼로 뭉쳤던 사내였다.
동포여. 일어나자! 피에 절규를 토했다.
친구여 지금 무얼하고있나!
외쳐대며 역사의 정방향에 섰었다.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빚을 갚으려
몸부림친 어린양이었다.
그는
내 친구다.
우리 형제다.
외로은 사람의 벗이다.
이름은 宜基(儀基)다.
하나님의 참 종이다.
그는
살았다.
자유와 정의에 살았다.
진리와 진실로 살았다.
하나님 말씀에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그는
혼자였었다.
외로워서 눈물이 났다.
하늘을 우러렀다.
한사람
당당한 한사람
80. 6. 7 雪原
제 2부 김의기 평전
Ⅰ. 척박한 이 땅의 아들로서 - 성장 과정을 중심으로
Ⅱ. 상아탑에서 민중의 바다로 - 대학 생활을 중심으로
Ⅰ. 척박한 이 땅의 아들로서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열사 김의기, 그는 1959년 4월 20일 경북 영주 부석에서 아버지 김억, 어머니 권채봉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거의 2년 터울로 태어난 형제들인지라 큰형과는 10여년의 차이가 졌다. 큰형아래로 또 형, 큰누나, 형, 막내 누나가 이미 피폐한 조국의 산하에서 억세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성장은 뒷날의 삶의 모습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국의 강산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이 땅의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경사의 계급장을 단 아버지의 경찰생활은 22세 때부터 시작해서 주로 고향주변을 전전했다. 의사의 어린 날의 생활도 이런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여기저기 산재해서 펼쳐졌다. 말단 지방 경찰관의 생활이야 예나 제나 별로 대단할 게 없었다. 벽지 산골 근무처에서는 경사의 계급이 지서장에 해당되기는 했으나 산골 지서장의 생활이래야 뾰족할 수 없었음은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물려받은 재산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산비탈 밭떼기 몇마지기, 논 몇마지기 정도였다. 그것도 조부모님 생존시에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집안형편에 어차피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기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하기야 당시 이 땅의 사람들, 게다가 원조경제의 직접적 소수 수혜계층이 모여 사는 도시권에서 벗어난 지방 산촌의 소외계층 누구인들 가난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가지 않은 자 있었을까.
1959년 무렵이면 기괴하기까지 한 자유당 독재의 아성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다. 방만한 대외지출로 인한 달러위기와 유럽, 일본의 상대적 성장 등은 50년대 말의 전반적 불황과 함께 미국으로 하여금 대외정책을 재고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자유당의 기형적 정권유지에 토대를 제공하던 원조경제의 허구성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은 급속한 성장률의 둔화, 실업의 증대, 물가등귀로 표출되어 마침내 다음해의 폭발적인 민중항쟁인 4.19 혁명을 예비하게 된다.
이 무렵의 농촌은 저 일제시대말기의 민족참상의 도를 능가하는 측면마저 노정했다. 도시는 빈민과 실업자로 흘러 넘쳤으며 시골에는 수백만 호의 절량농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반봉건적․식민지적 수탈시대의 민족피폐상의 대명사격인 보릿고개가 다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가 걸음마를 배우고 막내로서의 재롱을 부리며 첫 세상살이를 시작한 곳은 영주에서 약간 떨어진 재산리라는 산골이었다. 형과 누나들이 학교로 가고 아버지도 근무처로 가고 나면 남아서 같이 놀아 줄 집안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는 영리한 편이어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묻기도 하고 엉뚱한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영주읍내 근무를 제외하고는 주로 경찰사택에서 살림을 꾸려나갔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아무래도 다소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의 놀이 상대는 주로 어머니였으나 그 어머니마저 대여섯살 무렵 병으로 몸져눕자 외로워진 그는 형․누나들이 학교로 가고 난 뒤에는 늘상 아버지 근무처를 얼씬거렸다. 이것은 그가 나이에 비해 일찍 학교교육을 받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아버지는 6살 밖에 되지 않은 그를 학교에 보내기로 작정했다. 물론 연령상 곤란한 점들이 많았으나 일단 비공식적으로 재산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경찰 공무원으로서의 아버지의 위치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교장과 담임의 특별허가를 얻어 입학은 했으나 그것은 일종의 청강생으로서였을 뿐 정식입학이 아니었으므로 군청에서 장학시찰 따위를 나오면 출석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려야 했다. 이런 학교 생활이었으나 성적은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2학년 때 아버지의 근무지가 봉성으로 발령됨에 따라 학적부없이 2학년으로 봉성국민학교에 전학하게 된다.
그가 정식입학을 허락받은 것은 3학년 때였다. 마침 같은 무렵에 재산에서 봉성으로 전근을 한 교장의 주선에 의해 마침내 취학 통지서를 발부받게 된 것이다. 그 후 곧 그는 또 아버지를 따라 영덕으로 전학을 하게 되고, 그 곳에서 약 1년을 우등생으로 보낸 뒤 다시 영주읍내 중부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이 때 그는 나이도 어렸지만 몸집도 작은 편이어서 “얘기”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한편 집에서도 그는 의기라는 이름 대신에 “택이”로 불렸다. 의기라는 이름이 명이 짧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모들의 이런 의도 속에서 은연중 척박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면모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숱하고 흔해빠진 죽음들, 새파란 절음 나이에 까닭도 없이 휩쓸려 죽어 나자빠진 셀 수 없는 시신들. 단말마적인 日帝의 말기적 징병과 징용, 8․15 이후의 미․소 진주, 좌우대림, 분단, 6․25, 자유당의 폭정, 자연재해 등 부모세대들이 겪어 온 세월들은 이들에게 그저 목숨이나 온전히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의도대로 잘 먹고, 잘 녹고, 잘 컸다. 그 무렵의 가정생활은 비록 경제적으로 쪼들리기는 했으나 비교적 화목했다. 아버지는 엄한 편이었으나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강했던 듯하다. 한 때 아버지가 평은이라는 곳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의기는 당시 10살이 채 되지 않은 몸으로 아버지를 찾아 기차를 타고, 걸어서 그곳까지 간 적이 있다. 혼자서 감행한 이 무모한 그의 여행은 어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생활 속에서는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다.
낯익어 서로 오가게 될 만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손에 들어 온 동화책 따위를 읽고 또 읽었다. 겨울에는 논물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날 저문 줄 모르고 썰매를 탔다. 이때쯤 큰형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으며, 둘째형은 영주 군청에 나가기 시작했다. 큰형은 매우 후덕한 사람으로 군을 제대한 후 줄곧 부석에서 농사를 짓다가 나중에 광산으로 떠나게 된다.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저농산물 가격으로 대변되는 농촌의 수탈상에 대한 의기의 최초의 직접적 경험은 이 큰형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5․16쿠테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무모한 개발정책은 농촌을 그 가장 원천적인 수탈대상으로 삼아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민중의 광범위하고 격렬한 반대운동을 무릅쓰고 강행한 소위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해 권력의 물적 기반을 외부에서 구한 공화당 정권은, 외국자본의 잉여가치 창출 대리자로서 농촌에 3중 4중의 짐을 지우고 있었다. 매판정권은 개발정책을 외자도입에 의한 노동집약적 가공수출공업육성에서 찾음으로써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잉여수탈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신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수출산업은 한국경제에 사활이 걸린 국민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수출이야말로 공화당 정권이 국민에게 제시한 천국의 열쇠였다. 그러나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은 상대적․절대적으로 농업정책과 투자를 뒷전으로 밀려나게 했고, 농촌경제를 오로지 수출증대에 필수적인 도시 근로자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전락케 했다. 개발정책이전에 국민의 대다수를 점했던 농업부문 인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극심한 착취대상으로 떨어져 생존을 위한 대규모의 도시진입을 시작했다.
이른바 이농현상은 이와 같은 농업파탄의 표출형태이며 신식민지화의 병리현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의기 열사의 집안도 결국 농촌을 떠나게 된다. 비록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지만 지방말단 공무원의 생활원천은 그곳 농가경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동일구조선상에 높여 있었다. 셋째형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의 철공소에 들어갔다. 의기는 입시지옥의 마지막 세대로서 그곳 영주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성장하는 자식들의 교육문제와 출구없는 농촌생활의 생존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해 아버지는 경찰을 떠나 서울 이주를 결행했다.
퇴직금을 받아들고 서울 변두리 마장동에 단칸 셋방을 얻어 우선 거처를 정한 뒤 사업을 벌여 볼 작정이었다. 아이들은 영주에 남았다. 큰누나가 영주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온 건 다음 해인 1971년경이었다. 의기는 그곳에서 중학교 1학년을 보냈다. 입학성적이 좋아 입학금을 반액면제 받았다. 집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는 쾌활한 외양을 보였다.
다음 해 서울 배명중학교로 전학했다. 거리상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처음에는 시골 중학교의 우등생이었던 그도 다소 주춤거렸던 듯하다 학교성적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예나 제나 대도시와 지방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는 꽤 큰 것이어서 시골의 닭머리는 도시의 하꼬리밖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물론 잠시 동안 만이다. 이질적인 생활에의 적응속도가 빠른 청소년들은 금방 그 갭을 메꾸어버린다. 적응이 순조로울 경우 그들은 도시출신 아이들이 갖지 못한 정서적 풍요와 적극적인 성취욕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강점을 지닐 수도 있다.
의기는 곧 이질감을 극복하고 학업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중․고교 시절 항상 우등생의 위치를 계속 고수했다. 큰누나는 영주에서 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 섬유봉제회사에 입사하여 기숙사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눈에 띄는 성공케이스야말로 예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업성공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동, 경험, 전문지식, 게다가 후진사회 특유의 소위 빽줄이 없는 상황에서는 성공이 오히려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적지만 희망이었던 아버지의 퇴직금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 아버지는 직장다운 직장은 다닌 적이 없다. 무력감과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집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나 예전이 화목함을 크게 읽어버리지는 않았다. 이런 때 어머니가 강인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괄괄하고 직선적인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언제나 수동적인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어려워 했으나 어머니에게는 곧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했다. 모진 세상의 온갖 풍파가 최종적으로 불어닥치는 곳, 그곳이 어머니의 자리였다.
이래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슬프고도 위대한 존재다. 그들은 전통적 미덕인 인종과 근면을 고수하면서도 세상의 변화에 대해 놀라운 자기 변용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어려운 경제사정을 어떻게든 꾸려 나갔다. 이런 가운데 의기는 나이에 비해 숙성한 면을 보이면서 집안의 기대를 모으는 복동이로 자라났다.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성격도 쾌활했다. 그러나 그가 마냥 부모가 바라는대로였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때 이미 자기집안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감적으로 간취하고 있었던 듯하다.
후일 그의 친구들의 술회에 의하면 그는 또래 중에 유일하게 '정치적‘ 이었다고 한다. 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곧 사회의식,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분노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이런 인식과 자기 실천은 후일 그가 죽기 전 몇 년간 엄청나게 발전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청소년기의 내면적 고뇌의 모습은 후일 그의 일기를 살펴 볼 때도 단편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은 혼돈 가운데 있었다. 나이 어린 중학생으로서는 너무 벅찬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작은 시련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1차시험에 낙방한 것이다. 자신의 성적을 자신하고 있던 그로서는 꽤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가족들도 다소 기대에 어긋나 섭섭해했다. 그러나 그는 이 국면을 별 탈 없이 잘 수습했다. 가족들이 그의 낙방을 위로하려 들자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그리고 청소년 특유의 치기도 곁들여 다음과 같이 내뱉을 수 있었다. “뭘 그까짓걸 가지고 그래, 떨어질 수도 있잖아.” 머쓱해진 건 오히려 위로하려던 쪽이었다. 그는 결국 당시 배명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교시절의 여유는 오히려 그에게 자신감과 사물에 대한 총체적 시작을 부여했다. 약한 자에 대한 사랑과 모순에 대한 직시능력은 이 때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최소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창백한 지적 편집성으로부터의 거리는 이 때 그 틀이 잡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업을 게을리한 건 아니다. 그는 고교시절 줄곧 장학생으로 지냈다. ‘명경회’ 란 모임도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집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밤을 지새면서 토론도 하고 짓궂은 장난질도 했다. 그는 언제나 활달했다.
이 무렵의 집안사정은 지난 몇 년간의 암담했던 상황보다는 다소 나아져 있었다. 이모가 경영하는 철공소 부근의 기숙사 비슷한 집으로 옮겨 그 때까지 단칸셋방 귀퉁이에 문방구를 열어 어렵게 살던 가정형편에 다소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방도 세 개를 사용했고 기숙사일로 어머니가 다소 경제적 숨통을 틔웠다. 또 막내 누나도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중앙일보 경리직에 취직해 있었다. 그는 곧잘 이 누나에게 찾아갔다. 돈이 필요할 때면 “돈 좀 빌려줘”라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집안형편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용돈을 가능한 한 자제했겠지만 불가피할 때는 항상 이렇게 “빌려 줘”였다. 큰형은 부석에서 계속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농토로 생활을 꾸려나가기는 어려웠다. 방학 때 의기가 내려가면 생활 그 자체로서, 성숙해가는 그의 눈에 농촌현실을 보여 주었다. 농민은 곧 빈곤과 무력과 굴종이었다. 그는 농사짓는 형과 공장․회사다니는 누나, 철공소 다니는 형에게 항상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연민의 정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모순구조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깊어졌을 때 그는 바로 농민 해방자였고 사회혁명의 기수였다. 당시는 내외적 도전에 직면한 공화당 정권으로 하여금 민족의 통일이라는 지상명제마저 정권유지를 위해 농락하게 하고, 안보라는 케케묵고 위압적인 허구를 내세워 모든 국민의 귀와 입과 눈을 차단시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민청”이니 “인혁당”이니 하는 조작사건을 통해 숱한 인명을 고문과 사형으로 죽게 만들고, 어두운 감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던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의기는 그것의 좋은 실례가 된다. 그는 바로 그들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내리쳤던 것이다.
그에게는 매우 다정다감한 면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크네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장성한 뒤에도 형이 심부름을 보내거나 하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지체 없이 달려가곤 했다. 고교시절에는 당시의 같은 또래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도 소위 문학소년이었던 듯하다. 이때 그는 대학진학에 뜻을 두고 그 전공과목을 국문학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우리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널리 해외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고교 2학년 시절에는 처음으로 이성교제를 경험했으나 사춘기의 그에게 사랑은 아름답고 안타까운 꿈으로 끝났던 것 가다. 어느 날 그는 술을 먹고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면서 울었다.
1976년 그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애초에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후일 사회운동에 몰두했을 때에는 자신의 과 선정에 불만을 토로했던 적으로 보아 그의 대학진학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또 다른 전형성을 가진 것이었다. 이 땅에서의 대학진학은 이 나라 역사의 파행성과 민중고난의 사회적 배경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총체적 사회행위다.
대학진학은 곧 계층상승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이 땅의 저 치열한 교육열은 전통사회의 유산에 의한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이라는 근대사의 역경 속에서 가속화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경우이든 경쟁적 사회관계속에서 생존․생활의 상대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이기주의적 충동이 그 배면에 깔려 있다.
그것은 거의 맹목에 가깝다. 대학이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는 자조도 여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 논밭이고 소(牛)고간에 몽땅 팔아서라도 자식 중에 한 놈쯤 대학에 보내야 한다. 그것은 부모의 도리요 자식의 권리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한 가문의 성쇠와 관련된 절박한 요구이다. 그것은 지배계층의 관제교육에 의해 한층 더 확대․증폭된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피지배 민중의 자기학대, 자기부정의 끊임없는 과정이다.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런 과정의 완전한 전도, 뒤집음에서 찾아져야 한다.
교육은 개인의 자기실현과 부분적․편중적 부조화를 지양하는 사회총체의 자기실현을 추구해야 한다. 김의기열사의 죽음은 이런 측면에서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결국 지배자 논리를 강요하는 파괴적 교육을 단호히 거부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의 문을 들어선 사람이었다. 형과 누나들은 고등학교를 졸업 혹은 중퇴하여 농촌, 봉제회사, 광산, 철공소 등에 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막내인 그는 온 집안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입장을 잘 알고 있었고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초기에는 그런 부담감이 오히려 그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다주었을 것이지만, 그의 사회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그것은 고통스런 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길은 이미 부모들이 현실적으로 바라고 있던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런 고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집안 내에서는 속으로 삼킴으로써 갈등의 원천적 해소를 유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대학 2학년 때 이후 교회에 나간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당시 교회는 70년대 민중운동의 한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날 집으로 형사가 찾아왔다. 이 땅에서 형사란 존재는 무언가 꺼림칙하고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사다. 그의 출현만으로도 가위눌린 가슴은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형사는 의기가 소위 문제학생이며 위험한 일을 하고 있으니 집에서 강력히 통제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유신압제하에서 교회는 한때 위축된 사회운동의 숨통 역할을 했다. 인간구원이라는 교회본래의 메시지는 운동권의 당시 당면문제를 보는 시각과 일치점이 많았고, 운동권은 조직과 안전확보라는 측면에서도 교회와 행동 통일을 이룰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집에서는 비로소 그의 또 다른 면모들과 충격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그의 인식은 무한한 대양으로 펼쳐져 급속히 심화․확대되고 있었다.
본래부터 외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그였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교회․학내활동을 통한 실천과정은 그의 옷이나 신발, 머리모양, 말투, 행위양식 등을 통해서도 표출되었다. 그는 항상 흰 고무신에 군복바지, 쥐색잠바, 청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그것은 시세에 대한 거부로서 궁극적으로는 대중을 조종하고 있던 지배계층에 대한 도전이었다.
누난가 사준 양복은 한번도 입어 본 적 없이 결국 그와 함께 관속에 묻혔다. 주위의 안타까운 권고에도 그는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형님이 기름옷을 입고 일하는데 내가 어째 좋은 옷을 입겠는가”, “사람이 한번 편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는 교련시간에도 고무신을 신고 갔다가 교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의 다양한 교우관계도 대학 2,3 학년 이후 점점 특정적인 관계로 변모되어 갔다. 그의 주위 친구들도 역시 대학가의 유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밝고 공손한 가정생활을 했으나 그의 내부는 말 못할 고뇌에 싸여 있었다. 자신에 대한 집안의 기대와 빤한 가정 형편은 그를 번민케 했다. 부모들의 일상적인 기대와 자신의 길은 너무 어긋나 있었다. 설사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상반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현실에서는 융화되기 어려운 대립국면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일단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라. 그리고 졸업장을 따라. 그런 문제는 그런 다음 사회에 나가서 하면 되지 않느냐.” 다른 일에는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그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했다. 때로는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특히 관할 경찰서인 성동서에서 형사들이 찾아오는 날은 더욱 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신뢰나 암묵적인 약속관계가 허물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성실했고 가족의 기대와 사랑 속에 있었다. 특히 어머니에게는 효자였다.
“엄마, 저 졸업 후에 농사짓겠습니다. 농촌에 가서 농민들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겠어요. 한 두 사람만으로는 안돼요,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농사지으러 가요. 그들은 눌려서 말을 못할 뿐 너무나 억울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매우 거북스러워하고 가족에 대해 미안해했다. 등록금을 대기가 수월치 않는 가정형편은 자신의 대학생활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일시에 등록금을 내기가 어려운 후배나 동료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한꺼번에 받아든 등록금을 쪼개서 일부를 다른 아이들에게 주어 분납하게 하고 자신도 분납을 했다. ] 한편 끊임없는 민중의 항쟁과 자체 내의 누적된 모순 속에서 공화당 정권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애초에 4․19 혁명을 찬탈한 반동적 군부 쿠테타로 출발한 박정권은 내외의 상황변화, 곧 역사의 정향적 발전에 따른 존립기반의 피규정성에 의해 그 토대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미 ․일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인생과 안보를 표방한 민중억압 위에 군림했던 현대의 아류 보나파르트는 그 몰주체성으로 말미암아 미․중공 접근으로 대표되는 외부 규정성의 변화와 끊임없이 성장하는 내부 민중의 힘에 의해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권력이라는 아편에 중독된 반동의 ,주역들은 초기의 치졸한 사명감마저 상실하고 동맥경화와 기동력상실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국내 분업관련이 없는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는 외형상의 이상비대화, 곧 기하급수적 외채의 증가를 가져 왔고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주도 개발정책은 막대한 잉여의 해외유출과 국내시장의 발육부진을 초래했다. 만성적 인플레와 가혹한 조세제도는 서민의 생계를 압박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가속화를 가져 왔다. 대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던 혁명의 파도가 다시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곧 세계사적 모순의 통일적 지양을 위한 세기에 걸친 혁명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기는 그 민중항쟁의 선두대열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던. 그에게 열려진 통로는 농촌이었다. 자본주의 고유의 농촌수탈 게다가 후진사회의 폭력적이고 가혹한 2중적 농촌수탈은 농민대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누적적 모순의 장, 그것은 곧 혁명의 장이었다. 그의 농촌에 대한 관심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형의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형을 통해 농촌현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그가 도시 학생들 중심의 농촌봉사활동 과정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농촌문제에의 접근은 교회와 학내 써클활동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입수, ‘농활’을 통한 실천적 검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의 ‘농활’ 운동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몇 주일씩, 혹은 한 달간씩 모습을 감춘 새까맣게 탄 얼굴의 농부가 되어 문득 나타나곤 했다. 때로는 ‘농활’을 가기 위해 시계를 잡히는 일도 가끔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너 혼자 뭘 어쩌겠다는 거냐. 세상사람들이 다 좋아서 가만있는 건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네가 날 띈들 무얼 하나 바꿔 놓을 수 있겠어? 제발 부모의 심정도 이해해다오. 어떻게 해서 다니는 대학이냐. 가능한 일부터 해야지.” 이런 아버지의 훈계에 대해서 그가 직접적 반발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언제나 공손했다. 답답할 때는 술도 마셨다. 혼자서 미친 듯이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일기장에다 더운 마음을 쏟아 넣었다.
망할 놈들, 더러운 제국주의자놈들, 파렴치한 앞잡이놈들. 아, 불쌍한 이 땅의 민중들. 부숴야 한다, 모조리 때려 부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소영웅주의를 경계했다. 터질 듯한 그의 긴장은 익살을 통해 일시적 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 내부의 치열한 투쟁은 대중 앞에서 웅변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선동적 달변은 정평이 나 있었다. 형사들의 출입 빈도수도 점차 잦아졌다. 반대로 집안의 충격은 완화되어 갔다. 어머니는 지극히 우려하면서도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고 녀석이 딴은 옳지. 저 혼자 잘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좌우간 옳은 일이니까. 다만………”
그는 때때로 누나에게 자신이 배운 낯선 노래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사노라면’, ‘가뭄’, ‘농민의 노래’, ‘아다다’ 등 민중정서에 바탕을 둔, 당시의 운동권에서 흔히 부르던 노래들이었다. 다정다감했던 그는 때론 무력감과 자기회의에 휩싸이기도 했다. 불철저한 논리전개와 이론의 미비로 인한 감상적 과격성은 특히 그를 괴롭혔다. 자기이론화, 이론의 자기화는 그가 늘상 염두에 두고 있던 목표였다. 강렬한 성취욕구는 그것이 충족되지 못할 때 자기연민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들은 결국 발전을 위한 진통에 불과했다.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한국 민중의 의지는 잔명하던 공화당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Y.H와 야당 총재제명, 釜馬사태 등 숨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은 돌연 내부변란에 의해 극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다. 대외적 고립과 내부봉기를 초조하게 관망하던 집권세력의 일부가 분열을 일으키고 점증하는 민중의 혁병적 기운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기성 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혁없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구책으로서 기도된 10․26 은, 그러나 불발로 끝나고 만다.
그 사건은 대중을 주춤거리게 만들었고 안보라는 구실 하에 외부의 위장된 간섭을 야기시켰다. 매판주구의 전위 군부 강경파는 뒤이어 12월 12일 유화적 온건파를 무력으로 축출함으로써 유신회귀를 실현했다. 이 군부내의 왕당파는, 80년 5월의 광주사태를 통해 그 본질을 충격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미국의 지원 하에 군부 왕당파는 재등장을 위한 작업을 재빠르게 진척시켰다.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고 미국과 대규모 군사작전(팀 스피리트)을 벌이고 건국이후 최대의 동계훈련을 실시했다.
남은 것은 표면적 부상을 위한 호기를 포착하는 일이었다. 직접 정권을 쓰러뜨리지 못한 민중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기존 정치권내의 여야정치세력들이 이 시기를 집권의 호기로 생각한 듯 활발하게 움직였고, 소위 재야세력으로 지칭되던 또 하나의 정치세력도 이에 가세했다. 신문의 지면은 이 세력들의 향배에 관한 기사들로 채워졌다. 학생들과 노동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학과 더불어 학원의 움직임은 증폭되어 갔다. 과도기적 집권관료들은 미국과 군부의 영향권 내에서 아무런 정치일정도 제시하지 않았다.
일제 고문관 출신의 이들 고위관료들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공공연히 옹호하면서 소위 “정치발전” 운운함으로써 사태를 호도시키고 있었다. 의기는 이 무렵 학생회 등 자율적인 학내 기구들과 그 활동을 부활시키거나 활성화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4월부터 병영집체훈련 거부농성을 시발로 시작된 정치집회에도 참여, 달변으로 좌중을 휘어잡기도 했다. 5월에 들어서 더욱 가열되고 있던 학원사태는 13일의 광화문 가두시위를 신호로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15일 서울역 광장 집결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5월 16일 마침내 군부는 행동을 개시했다. 남은 것은 폭력과 유혈이었다. 17일 의기는 교회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이것이 가족들이 의기를 마지막으로 본 셈이 되었다. 모든 운동세력들이 일시에 도피, 잠적, 체표라는 국면 속으로 휘말려들어갔다. 18일부터 광주사태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광주사태는 시민의 자발성과 질서정연함, 군부의 피비린내나는 진압 과정의 광포성,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특이성 등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그의 마음은 광주로 달려갔다.
그의 말대로 “말로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그의 행동성은 그를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광주사태의 처참하고 장렬한 광경을 목격했다. 삼엄한 계엄령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움츠리고 있던 대중들에게 이를 알려야 했다. 알려서 저 유신잔당의 마지막 발악을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온 그는 친구 집에 숨어서 쓰기 시작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언가를 정신없이 자꾸 쓰는 걸 본 친구 가족들이 무얼 쓰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니 알 것 없다고 말했다. 쓰기를 마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집을 나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능한대로 가족과 연락을 취했다. 주로 누나와 전화통화를 했고. 죽기 며칠 전 누나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여의치 못했을 것이다. 사흘 전에는 이모네 공장을 통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집에는 별 일 없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염려 마십시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집에 형사들이 와 있으니 앞으로는 전화를 하지 말라고 일렀다. 누나와 통화한 내용도 주로 자신과 집안의 안위에 관한 것, 부모에 대한 염려 등이었다. 집에는 보안사, 계엄사, 중앙정보부 등에서 나온 요원들이 그의 체포를 위해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그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5월 30일 오후 5시경에 경찰들이 와서 의기의 방을 면밀히 조사했다. 서류들과 7월 7일 입대날짜가 찍힌 군대영장 등을 압수해갔다. 집에서는 아직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저녁 8시경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그는 모종의 서류를 제시하면서 무조건 도장찍기를 요구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강력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영주 부석에 농사관계로 내려가 있었다. 천만 뜻밖에도 형사는 의기가 중태이며 서울대 중환자실에 있다고 말했다. 이레 웬일인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도장이고 뭐고 찍는 둥 마는 둥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여러 시간 전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경찰이 이를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종로 5가 빌딩 6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미칠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몸부림쳤다. “ 이놈들아! 내 아들 살려내라! 이 망할 놈들아!”
그의 사인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려가지 정황들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뿐이다. 살기 위해서, 옳게 살기 위해서 그렇게도 고뇌하던 그가 죽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이 죽음이다. 저 배반과 좌절의 계절, 그러나 또한 새로운 역사의 새벽에 그가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남긴 그 메시지야말로 올바르게 해독하고 실천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숙제로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상아탑에서 민중의 바다로
대학 생활을 중심으로
“나와 함께 출발한 다른 사람들이 벌써 저 만큼 가 있을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인간적으로 못 미치고 있는 거나 아닌가? 난 발악도 반항도 시기도 질투도 하면 안된다. 난 좌절의 극복이 필요하다. 난 젊었고, 그러므로 내겐 힘이 있다.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사고에 의한 행동, 겨를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그리고 좌절의 극복. 이게 지금의 내게는 가장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감(感)과 마음씨와 솜씨의 조화. 내 삶을 이끌어나갈 강력한 힘을 난 내 스스로가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초월해야만 한다. 초극해야만 한다.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적어도 신과 인간과 대지에게만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조금의 선입관이나 자기 변명 이전에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어야 하며, 그런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내가 와 있어야 할 곳과 내가 와 있는 곳과는 얼마나 많은 거리가 있는가? 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난 거기로 갈 수 있는가?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내가 최선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난 왜 거기고 가려고 하는가? 거기에 가려면 난 지금 뭘 해야 하는가?“
-김의기 열사의 글 중에서-
삶에 대한 애정과 역사의 실천에 값하는 김의기 열사의 죽음은 갑치고는 너무 헐하다.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많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동포에게 드리는 글」중에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그를 데리고 간 또 다른 세계는 얼마나 값나가는 세계일까? 80년도의 패배국면, 파쇼체제의 구축이라는 상황에서 기회주의, 패배주의로 모두 움츠려 들어버렸을 때의 운동자세를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보다 확고한 투쟁 자세를 견지하면서 5.17 쿠데타의 저지와 광주민중봉기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던 김의기 열사. 학생운동의 사회운동화, 특히 농민운동으로의 전환문제를 고심하면서 학생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적극적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김의기 열사. 선배 부재의 상황에서 후배들이 소그룹을 지도하면서 서강대학교 학생운동권의 확대재생산을 모색․실천했던 김의기 열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풍부한 인간성과 유머 감각, 재치와 기지로 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살고자 했던 김의기 열사의 대학생활을 추적한다.
1976년 3월의 서슬 푸른 유신군사독재와는 아랑곳없이, 이른바 꿈과 낭만의 새로운 대학세계에 던져진 김의기 열사의 가슴은 벅찬 기대에 펄떡이고 있었다. 입시의 열병, 제복의 구속 그리고 빡빡머리의 곤혹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된 그날따라 봄을 재촉하는 꽃샘 바람이 나부끼고 있었음에랴!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무역학과 1학년 김의기. 깨어진 꿈. 고등학교 시질. 대학에 들어가 국문학을 전공, 우리나라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를 축적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소개해 보겠다는 말을 김열사는 입버릇처럼 내뱉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을 품었어도 날이 서지 않는 현실을 어찌하랴! 단칸 방 애옥살이 살림은 그의 소박한 바램마저 곱게 돌보아주지 않았으니, 현실은 이 하잘 것 없는 사건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조차도 고려해 주지 않는 잔인함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내였던 김열사가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기의 우애 어린 희생에 힘입어 가족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대학문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어도 가족들에게는 과거의 가난에 대한 쓰린 추억으로만 남게 됐고, 적극적으로는 김열사에 대한 일말의 기대까지 생겼으리라. 또한 그로서도 가족사의 전환계기인 대학입학으로 가족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김열사는 잡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부모님, 피땀어리게 농사짓고 있는 큰 형님, 그리고 철공소 노동자인 셋째 형님에게 진 부채를 가슴 깊숙이 묻어둔 채 그의 주력화기인 활달함과 자신에 찬 기세로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종횡무진한다.
3월초, 학교 측에서 주관한 ‘신입생의 날’ 행사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김열사는 그 날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던 ‘예쁜 남성 선발대회’에 몸소 출전, ‘날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통기타 반주로 CM송을 골계적으로 변조, 열창을 아끼지 않았다. 단발머리 가발, 짧은 치마, 정열적인 빨간 입술, 뛰어난 노래 솜씨. 그 진짜같은 여자는 참석한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언제나 그맘때면 각 클럽의 선배들은 너나 없이 신입회원 유치작전에 열을 올린다. 별의별 ‘달콤한 사탕발림’ 식의 유혹이 뻗친다. 새물결 운동, 말만 들어도 가슴에서 노도광풍이 일 것 같았다. 김열사는 새물결 운동을 주창했던 유네스코학생회(KUSA)에 가입원서를 던졌다. 이로써 그의 대학생활의 초반은 ‘새물결 운동’의 지류로부터 흐르게 된다.
KUSA에 몸을 담으면서부터 김열사는 특유의 풍성한 인간성을 기반으로 한 유우머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로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갔다. 3월 하순경 있었던 KUSA의 수련회에 참석했던 한 여학생은 김 열사를 이렇게 회상한다.
‘일영에서 있었던 1박 2일의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다시피하고 나서 아침에 세수를 하려고 을씨년스러운 방구석을 기어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마당에 나와있던 어떤 남학생이 느닷없이 다가오면서 ’굶었니?‘하고 인사를 건네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바로 의기였는데 그는 항상 굿모닝(Good Morning)을 굶었니라고 했다. 익살꾸러기 남학생이려니 하고 빙그레 미소를 던져주었다.
‘의기’ 라는 이름이 항상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최초의 사건은 바로 그의 그 ‘익살스러운 도전행위’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다소 여성적이면서도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쳐졌다. 언제 보아도 부담스럽지 않고 사심없이 접근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사람을 웃길 줄 알고, 사람들의 호감을 유인해 낼 수 있었듯 생김새로 유머와 재치까지 갖춘 김열사의 잠재력은 출중했다.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철딱서니 없는 유치였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능력이었을까?
76년 1학년 2학기가 되면서부터 김의기 열사는 주위 사람들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도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식구들에 대한 부채를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그가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실패한 삶’을 간혹 독한 소주로 달랬어야 했고, 어머니는 철공소 노동자들에게 밥을 지어주며 거기에 매달려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며, 형은 철공소 노동자로서의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누나는 회사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가계에 보탬을 주어야 했다.
노동자인 형과 대학생인 아우. 가족들에 의하면 김열사는 6남매 동기 중에서도 고등학교 공부까지 어처구니없이 팽개치고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던 셋째형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장 깊게 가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발까지 들여놓고 자야했던 다다미방의 싸늘함에서, 그것도 한 채의 이불 밑에서 노동자와 대학생, 두 형제가 나란히 누워 부담스런 잠을 청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때 김열사는 무슨 꿈을 꾸고 잠들고 있었을까?
척박한 가족사와 쪼들린 가족현실은 김열사로 하여금 ‘주변의 형편’을 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다. 우선은 개인적인 관심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 셋째 형님은 왜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사람도 아닌데 학비가 없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막노동으로 저렇게 살아가야 할까? 왜 우리 큰 형님은 서울에서 없는 돈을 마련, 영농비를 내려 보내주면 열심히 일한 댓가는 아랑곳없이 빚만을 불려가고 있을까?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아와야만 했을까?
이런 소박한 물음은 책으로 쏠리게 된다. 도서관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광범한 독서에 열중하면서 거꾸로 뒤집어진 우리나라 역사를 발견한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왜 집도 절도 없이 사회의 냉대 속에 가난한 떠돌이가 되게 되었으며,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가두고 갖은 고문을 자행했던 친일분자들과 그 후손들은 왜 이 땅에서 한치의 부끄럼도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러나 주위에서 느끼거나 책에서 얻은 사회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김열사의 눈에는 일목요연히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절하게 널린 사회의 추한 구석들이 대중없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이렇게 대학시절의 1학년 후반기와 2학년 전반기를 스쳐지나온 김열사 앞에 ‘여름방학 때의 해볼만한 일’ 이 나타났다. 하계농촌봉사 활동. 농민들과 더불어 농촌에 가서 땀흘려 보는 보람. 하여간 한번 해 볼만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일부 클럽에서는 연례 행사처럼 농촌봉사 활동을 갔었는데 KUSA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열사는 농촌봉사활동 대장의 감투를 쓰고 강원도 벽지로 후배들과 함께 봉사활동 원정에 나섰다. 다리도 놓아 주고, 길도 고쳐주고, 아둥들도 교육 지도해 주고, 의료 활동도 전개했다.
대학시절을 통해 김열사는 10회에 걸친 농촌 활동에 참가하였는데, 이번이 그 처음이었다. 농촌 출신인 그는 도회지 출신의 다른 대원보다는 농촌에서의 모든 일이 손에 익었겠고, 일에 대해 저돌적이기조차 했던 그의 성격으로 보아 땀도 꽤 쏟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농촌봉사 활동은 대개 근로봉사, 의료봉사, 아동교육지도, 가족계획 지도 등 그 저변에 봉사라는 감상적 인도주의를 짙게 깔고 있어 농민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고, 따라서 농민과 괴리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입장’ 이라는 그릇된 생각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농민문제에 대해 올바른 접근을 할 수 없게 됐고 오히려 농민문제의 올바른 해결에 커다란 저해요인으로까지 등장했다. 방학 때의 여가 선용, 땀으로 얻는 보람,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농촌 봉사 활동은 항상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남의 이야기 정도에서 그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70년대에의 질식할 듯한 상황 속에서도 농민들은 자기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 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학생운동이 민중지향성을 점차 강하게 띠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농촌‘ 봉사’ 활동의 한계가 여지없이 지적되고 새로운 방향의 농촌활동이 모색․시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흐름은 예리한 그의 눈에 마땅히 포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승냥이. 한갓 창백한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인 내가 말없이 역사를 꿈틀거리게 하는 저 거대한 농민들의 흐름 속에 어떻게 끼여들 수 있을까? 그 해의 농촌 봉사 활동 이후 김열사의 머리 속에서는 상승하려는 욕구와 하강하려는 욕구가 팽팽히 대립하기 시작, 결국 김열사는 하강하려는 새로운 힘에의 동참을 선언했다. 그는 그 동참선언을 다름 아닌 KUSA 탈퇴라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 때는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어 오래지 않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농촌봉사 활동 이후 KUSA는 그에게 있어서는 시대착오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그러나 KUSA를 다서 앞질러가고 있었던 그였어도, 침체국면의 학내상황 속에서 기반없는 방황의 세월을 맞이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몇몇 선배들조차 서강대학교 학생운동이 확대재생산-기반의 양적 확산강화-문제를 다소 소홀히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의 활동도 교회와의 소극적 연결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간혹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과학학습 모임도 상황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배타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학내상황은 김열사를 운동의 흐름속에 합류시키지 못했다.
77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75, 76, 77년 초반까지의 다소 침체되었던 학생운동은 누적된 학생들의 주장을 유인물을 통해서밖에 표출되지 못했던 한계를 깨고, 연대 서울대 등에서 굵직굵직한 교내시위가 터지기 시작했다. 75년 10월의 지하신문「자유서강」 사건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던 서강대 학생운동이 그 해 11월 12일 3학년 교련검열 도중 유발된 교내시위로 그 침묵을 깨고 나왔다. 오랜만의 함성, 교련검열도중총기를 내던지고 외치던 ‘유신철폐’ ‘민주회복’ ‘교련반대’. 이 시위를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이틀간의 휴교로 돌입했다.
휴교가 끝난 14일 오후 3시경 유신철폐 구속학생석방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학생들은 재차 시위에 들어갔다. 경찰에 의해 시위가 잠재워졌을 때 또 다른 시위가 계획된다. 18일 아침부터 청승맞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국문학과와 사학과 중심의 자생적 사회과학 학습모임인 ‘황토’의 주도로 ‘서강선언문’ 1천여매가 강의실마다 뿌려졌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시위는 경찰에 의해 제기되었다. 김의기 열사는 세차례에 걸친 연속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처음으로 최루탄가스를 마셔보았고 처음으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토해내어 보았다. 김열사의 첫 시위가 담 경험을 시위직후 그를 만났던 한 동료로부터 들어보자.
“ 이번 데모때 나는 과학관, 교문 등지에서 적극적으로 뛰었다. 야 통쾌하고 신나더군, 그런데 그놈의 최루탄가스는 왜 그리 독하냐? 또하나 느낀 것은 난 이때까지 여학생들이라면 공부에만 열심이고, 혹은 자기들끼리 모여 히히덕거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데모할 때 보니깐 그게 아니더라. 그놈의 지독스런 최루탄가스에 눈물을 흘려가면서까지 투석으로 맞서는 남학생들에게 손수건을 소금물에 적셔 주더구만, 참 흐뭇한 장면이었어.”
김열사에게 있어 학생시위는 적어도 단순한 젊음의 발산만은 아니었다. 쾌재를 불러일으킬 만큼 신명이 났었다. 그는 당시 ‘박통을 씹어대는 일’ 에 흥미를 느껴왔다고 하는데, 입으로 내뱉는 분노보다 한번의 둘팔매질이 그에게 있어 답답함을 치유 사는데는 더 좋은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11월 교내시위는 그 자체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 시위를 계기로 주위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그는 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교내시위에 대한 평가까지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위로 구속된 동료들에 대한 애정까지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김열사의 모습을 보자.
“우리들의 77년 교내시위를 섣불리하고 감방에 쳐넣어진 친구들의 잘잘못에 대해 씹고 또 되씹으면서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있었을 때, 우리는 너의 그 친구들에 대한 부채감을 읽고 있었다. 너는 개인적으로 그 친구들의 얼굴을 본적조차 없었겠지만 너의 표정엔 그 친구들에 대한 공감의 표시가 역력했었다. ”
교내시위가 끝난 그 해 겨울의 음산스런 추위는 김열사로 하여금 술집을 기웃거리게 했다. 가볍지 못한 가슴, 그러나 그는 뜨거운 정열을 유지하고 있어서. 가슴속엔 태극기를 품은 지사처럼 그때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김열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윽고 그의 입에서 ‘금관의 예수’가 흘러나왔다. 우연히 술집에 들른 한 학생이 그의 곁에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런 축처진 노래만 부르고 있느냐고 둘 사이엔 인사가 오고 갔다.
김열사는 그 학생의 국민학교 선배되는 사람이었고 둘이는 의기가 투합됐다. 한국경제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고 얘기가 끝날 즈음되어 김열사는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봉투 속에 든 태극기를 품안에서 꺼내 들고 “우리 언젠가 이것을 흔들 날이 있으리라. 그 날 흔들도록 하라” 며 그 후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얘기를 건네준 한 후배의 덧붙임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뭐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욕했었는데 얘기 도중 그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었다. 의협심이 강한 사람, 뭔가 한다면 할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의 인연을 계기로 나중에 의기형과 함께 농촌활동을 두 번이나 같이 가게되는 등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 학생운동의 전통이 빈약하고 일천하다고 해서 제자리걸음만을 할 수는 없었다. 걸음마를 거듭하면서 힘찬 활보를 내디뎌야 했다. 운동도 운동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확대 재생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78년 3학년이 된 김열사는 1,2 학년 때의 낭만성과 소극성의 티를 벗고 보다 적극적이며 실천적인 모습을 띤다. 객관적 상황의 요청과 주체적 실천요구는 김열사를 그대로 두지 않고 무언가 찾아 나서게 한다. 선배부재의 상황. 그렇다면 스스로 나서서 선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의기 열사는 과거 활동했던 KUSA의 1학년 학생들과 접촉을 시도, 사회과학 학습을 주도해 나갔다. 교재로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역사란 무엇인가」등이었다. 그 모임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김열사는 주위사람들과의 연계를 강화, 교회의 농촌문제연구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학내에 노래굿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보급하기도 했다.
78년 3학년의 여름방학이 임박해 오면서 김열사는 한 둘의 선배와 함께 서강대학교연합 농촌활동을 구상, 활동대장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까지 그는 교회의 농촌문제연구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농촌문제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어느 정도 닦아 두었었다.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전개되는 학생농촌활동은 70년대 초반까지의 계몽적, 감상적, 봉사적 태도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방향만 알았는데 데모할 때 보니깐 그게 아니더라. 그놈의 지독스런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려가면서 까지 투석으로 맞서는 남학생들에게 손수건을 소금물을 적셔주더구만, 참 흐뭇한 장면이었어.”
김열사에게 있어 학생시위는 적어도 단순한 젊음의 발산만은 아니었다. 쾌재를 불러 일으킬 만큼 신명이 났었다. 그는 당시 ‘박통을 씹어대는 일’에 흥미를 느껴왔다고 하는데, 입으로 내뱉는 분노보다 한번의 돌팔매질이 그에게 있어 답답함을 치유하는데는 더좋은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11월 교내 시위는 그 자체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 시위를 계기로 주위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그는 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교내시위에 대한 평가까지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위로 구속된 동료들에 대한 애정까지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김열사의 모습을 보다.
“우리들이 77년 교내시위를 섣불리하고 감방에 쳐넣어진 친구들의 잘잘못에 대해 씹고 또 되씹으면서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있었을때, 우리는 너의 그 친구들에 대한 부채감을 읽고 있었다. 너는 개인적으로 그 친구들의 얼굴을 본적조차 없었겠지만 너의 표정엔 그 친구들에 대한 공감의 표시가 역력했었다.”
교내시위가 끝난 그 해 겨울의 음산스런 추위는 김열사로 하여금 술집을 기웃거리게 했다. 가볍지 못한 가슴, 그러나 그는 뜨거운 정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슴속엔 태극기를 품은 지사처럼 그때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김열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윽고 그의 입에서 ‘금관의 예수’가 흘러 나왔다. 우연히 술집에 들른 한 학생이 그의 곁에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런 축처진 노래만 부르고 있느냐고 둘사이엔 인사가 오고갔다. 김열사는 그 학생의 국민학교 선배되는 사람이었고 둘이는 의기가 투합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고 얘기가 끝날 즈음되어 김열사는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고있는 것이 아닌가. 봉투 속에 든 태극기를 품안에서 꺼내들고 “우리 언젠가 이것을 흔들 날이 있으리라. 그 날 흔들도록 하라”며 그 후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얘기를 건네준 한 후배의 덧붙임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뭐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욕했었는데 얘기 도중 그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었다. 의협심이 강한 사람, 뭔가 한다면 할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의 인연을 계기로 나중에 의기형과 함께 농촌활동을 두 번이나 같이 가게되는 등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전통이 빈약하고 일천하다고 해서 제자리걸음만을 할 수는 없었다. 걸음마를 거듭하면서 힘찬 활보를 내디뎌야 했다. 운동도 운동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확대 재생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78년 3학년이 된 김열사는 1, 2학년 때의 낭만성과 소극성의 티를 벗고 보다 적극적이며 실천적인 모습을 띤다. 객관적 상황의 요청과 주체적 실천 요구는 김열사를 그대로 두지 않고 무언가 찾아 나서게 한다. 선배부재의 상황, 그렇다면 스스로 나서서 선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의기 열사는 과거 활동했던 KUSA의 1학년 학생들과 접촉을 시도, 사회과학 학습을 주도해 나갔다. 교재로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역사란 무엇인가」등 이었다. 그 모임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김열사는 주위 사람들과의 연계를 강화, 교회의 농촌 문제연구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학내에 노래굿 「공장의 불빛」테이프를 보급하기도 했다.
78년 3학년의 여름방학이 임박해 오면서 김열사는 한 둘의 선배와 함께 서강대학교 연합 농촌활동을 구상, 활동대장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까지 그는 교회의 농촌 문제 연구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농촌문제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어느 정도 닦아 두었었다.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전개되는 학생농촌활동은 70년대 초반까지의 계몽적, 감상적, 봉사적 태도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방향모색을 시작했던 시기였던 만큼 서강연합 농촌활동도 농촌활동의 전진적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농촌활동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농민운동이 서서히 가열되기 시작하고 학생운동이 민중지향성을 강하게 띠기 시작한 시기와도 일치하게 된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문제를 관심의 대상으로조차 삼지 아니하였던 당시의 봉사활동은 단순히 여가선용의 한 방법이나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게 돼, 알게 모르게 기존의 모순을 누적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고도 남았다. 이제 학생농촌활동은 관성의 반성과 평가를 토대로 새로운 방향이 수립되어야 했다. 농민을 객체로 놓고 대상화하던 데서 농민들 속에 뛰어 들어 그들과 고난을 함께 하려는 자기 참여의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농민문제의 핵심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모순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모순이며 사회구조적 측면에서의 해결 방향이 진지하게 모색되어져야 했다.
즉 수동적, 비자발적, 관념적, 노예적 태도에서 능동적, 실천적, 창조적 활동으로의 방향전환의 몸부림이 일어나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서강연합농촌활동의 대장으로서 김열사의 활동은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의 농촌활동 시의 모습을, 같이 농촌활동 갔던 한 선배의 회상으로부터 알아보자.
“우리가 어울려 농촌문제 공부도 하고 수련회도 가지고 해서, 여름에 충청도로 농촌활동을 갔었지. 낮에는 흙무지렁이처럼 일하는 농민들과 함께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밤에는 농촌 생활에 대해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리 생활의 주 내용이었지. 너는 그때 우리의 대장으로 통하고 있었는데 마을 아가씨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너는 농촌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밤 12시에야 시작되는 일일평가보고회가 끝나고 나면 두세시가 되었고 우리가 그 아쉬운 잠 속에 빠져 있을 때도 너는 잠들지 않았고, 잠깐 누을 붙여도 너는 무언가를 보고 하고 평가하는 잠꼬대를 하면서 벌떡 일어나 상다리를 하고 앉아 ‘김 의기 활동보고.... 이상 끝’ 이라고 해서 대원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었다. 우리대장 ‘병태’가 몽유병에 시달린다고 다음날 아침 개울가에서 너에게 농담조로 얘기 했을때도 너는 무슨 영문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지. 대원들이 대부분 농촌생활에 낯설었었으나 너는 농촌의 일과 생활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고, 농촌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누구보다도 뜨거웠었다.”
여기서 하나 설명해 둘 부분이 있다. ‘병태’. 이것은 그 해 농촌 활동 이후 주위사람들이 애용한 김열사의 ‘별명’이었다.
당시 제약된 상황에서는 농촌활동 자체가 ‘우리 쪽의 노출’이 되었으므로 가명을 썼었다. ‘병태’는 김열사에게 안성맞춤의 별명이었다고 모두들 이야기 한다. 그 별명의 연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농업경제 평론가인 김병태 교수를 그가 한때 좋아했던 점으로 보아 그가 자칭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외에 달리 생각이 안든다. 하여간 그의 인상에서부터 옷차림 등으로 보면 ‘병태’라는 별명은 무리없이 쓸수 있었다.
농촌활동을 끝내고서 김열사는 활동보고서 작성에 착수했다.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도출되는 문제점들을 그는 놓치지 않고 차후 보완시켜 나갔다. 농촌 활동 총 평가회 중 제기된 ‘준비 학습회 철저 강화’ 문제를 그는 이렇게 보완시켜 나갔다. 교재인 「한국 농업문제의 인식」은 일반적, 원칙론적 학습에는 도움이 되지만 현실적, 사실적, 구체적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있은 후, 그는 신문의 농촌활동 관계 기사를 모조리 수집, 분야별로 분리, 스크랩을 해 나갔고 그것을 토대로 분석까지 해냈다. 이를테면 그는 쌀 수매가 책정 문제에 대해 생산비를 조목조목 열거, 농민들의 피해액을 정확히 산출해 냈다
78년 후반 내부적으로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가 누적되고 국제적으로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경제적 제반 문제의 심화는 박정권으로 하여금 더욱 강력한 탄압정책을 유발하게 하여 내부적 모순은 날로 심화되어 갔으며 이로 인해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극심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2학기가 되어 김의기 열사의 학내외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유신독재의 단말마적 마수는 더더욱 강하게 뻗쳐왔다. 그때부터 그는 관할 경찰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어 담당 형사까지 따라붙게 된다. 유신독재의 주구, 앞잡이. 귀찮은 존재. 그러나 형은 체제에 대해서는 남다른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나 인간에 대한 애정은 또 누구보다도 강했다. 형의 인간관은 일기에도 잘 나와있다.
그 무렵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위 사람 몇 명과 싸구려 영화 ‘몬도가네’를 보기 위해 교문을 빠져나가 신촌 소재 신영극장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다급한 담당형사가 쫓아와 어디 가느냐고 대들었다. 그러나 그는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적으로 행선지를 일러주었다. 그랬더니 그 담당형사는 조금전의 태도를 일변시켜 미안하다고 하며 커다란 빵 하나를 사주었다. 형사하면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기피했던 일행은 그걸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79년 후반 정권의 극심하고도 가증스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은 77년 후반부터 침체의 늪을 벗어나 78년에는 학생운동 반정부 투쟁이 갈수록 고양되어 갔다. 각 대학별 시위도 고양되는 양상을 보이더니 유신 선포기념일을 D-DAY로 잡고 6개교 연합 시위가 계획․준비되는 가운데 학교에는 반정부 유인물들이 암암리에 퍼졌다. 10월 15일에는 서강대에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10월 17일 광화문 가투예고와 23일부터의 동맹휴학이 그 내용이었다. ‘폭풍이 예정되어 있는 전야의 긴장’(일기) 이 감돌았으나 광화문 가투계획은 사전정보누설로 성공하지 못했다. 김의기 열사는 광화문 네거리에 나갔다가 허탈한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23일 동맹휴학 때는 혼자서라도 결행해야겠다고 생각, 수업을 거부했다.
이 무렵 김의기 열사는 형제교회에서의 기존 농촌 연구모임의 분위기를 혁신 모임을 주도할 정도로 농촌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김열사는 기독교 청년 협의회(EYC)농촌 분과 위원회와 기독교농민회에 참여하게 된다. 선배의 소개로 학습분임에 참가하여 모임을 이끌어 갔던 김의기 열사는 의기 소침했던 분위기, 뭔가 잡힐 것 같으면서 잘 잡히지 않은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열사의 교외활동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각 대학생들을 규합 농촌학습모임으로 만들어 나갔다. 장소가 마땅한 데가 없어서 교회, 기독교선교교육원 등을 돌며 공부를 진행시켜 나갔다.
당시 김열사의 일기를 살펴보면 학습부족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고 ‘열심히 공부하기’라고 다짐했을 만큼 학습강화에 최선을 다했다. 학습강화, ‘그 커리큘럼에 의한’ 학습강화는 12월 15일부터 년말까지 1학년 몇 명과 함께 빈민촌의 방을 구하여 한 합숙생활로 구체화되었다.
학생운동에서의 역할을 진척 시켜 가면서 김의기 열사는 자신의 진로를 농촌에서의 농민운동 쪽으로 굳혀가고 있었다. 78년 후반기부터 김열사는 농촌문제, 농민문제, 농업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쏟았다. 방학이면 농촌활동의 경험을 축적하고 개학하면 이론화 작업 및 연구를 진행시키는 즉, 이론과 실천의 과정을 되풀이하였다. 79년 1월 초부터 6박 7일간 동계농촌활동에 들어갔다. 겨울활동은 대화활동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대화활동은 오히려 근로활동보다 더 어렵다.
근로활동은 몸으로 때우면 된다고 하지만, 대화활동은 농민들의 섬세한 생활감정, 의식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열사는 그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활동했던 사람의, 자신과 김열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다.
“나에게는 동계활동이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 육체적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일보다 농민들과 가슴을 트는 일의 어려움이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의기는 마을의 젊은 아저씨들과 격의 없이 가슴과 가슴으로 이야기를 해나갔는데 의기의 비상한 능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헌법까지도 쉽게 설명을 해줄 정도였다. 농촌활동평가회에서는 나는 겨울농활은 다시 가지 않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는데 의기는 겨울농활이 여름농활보다 보다 효과적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기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활동을 한 두사람이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내리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의기는 몸과 마음이 농민들과 통일되어 있었고, 나는 몸은 농촌에 있었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옳게 살려고 하는 사람의 길이란 순탄할 수만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저주스런 회의조차 감내하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고민을 하면서도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고민 아니한 만 못하다. 자신과의, 자신의 오염시키는 요소와의 끊임없는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비판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79년 2월 ~ 4월에 김열사는 자기 자신에게 잔인하리 만치 무자비한 공격을 했다. 그러한 자신과의 투쟁의 면모들을 실기를 통해 살펴보자.
“현재의 예수쟁이스타일을 철저히 부정하는데서의 크리스찬(2.1) 끝끝내 배우면서 일하는 태도를 고집하자(2.9) 양심적으로 살고싶다. 세상살기 참 힘들다(2.10)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걸까? 역사에 대해 양심 부끄럽지 않게(2.12) 기반, …… 비빌 언덕,……발붙일 땅, 내 목구멍, 사회과학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2.15) 내가 뭘 하여야 한다는 걸 아는 게 무섭다. 운동이며 혁명이며… 내가 받아야 할 잔이 아니라면 도망치고 싶다. 정리를 하나씩 해나갈 필요가 있다.(2.24) 세상. 세상 너무 한심하다. 살기 너무 슬프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비빌 언덕은 어디에 있나 (2.25) 주체, 내가 나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과 주체, 인간애, t소박한 자유주의자로 머물러서는 결코 아니 된다. (2.28) 자신이 없어진다. 정리가 필요, 하느님 믿습니다. 자 !시작(3.2) 왜? 왜? 무엇인가? 무엇 때문인가?
며칠 술마셨더니 몸이 견뎌내질 못한다. 정신조차 어릿어릿하다. 뭔가 할 일은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4학년이면 학생운동의 리더역할을 감당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꺼고. 때려 죽여야 한다. 말까지 요즘 너무 거칠다. 소영웅심의 극복, 최선의 방법을 모색, 선한 의지와 냉철한 이상, 추진시킬 용기(3.16) 답답함, 느끼는 것은 분에 넘치는 호사이다. 피곤함 느끼기에는 난 너무 젊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4.15) 만남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4.7).”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을 통해 김의기 열사는 좀더 굳건한 자신을 정립 할 수 있었다. 79년 오월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 할 무렵 김열사는 자신과의 전투를 마무리짓고 ‘하계작전’을 위한 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개인적 투병관계로 진용편성에 애로가 다서 있었다. 김열사의 구상은 1,2,3학년의 핵심적 인물을 망라(당시 학내에는 운동인자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서강대학교 학생운동의 체계화와 개별인자들의 의식 무장에 있었다. 그러나 늦게 출발한 탓에선지 계획 인원은 모두 흡수되지 않았다. 어쨌든 학내 비공개․공개 클럽을 중심으로 6월 8일부터 9회에 걸친 준비 학습회를 진행 시켰다.
당시 준비학습회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①학생 농촌활동의 의의, 역사 및 방향
②한국농업문제의 개괄적 인식
③한국농업문제의 개괄적 인식
④한국농업문제의 현황분석(토지문제, 농산물가격문제, 농협문제, 농협정책)
⑤한국농업문제의 해결방안
⑥학생농촌활동의 방법
여기에서 김열사가 맡았던 부분은 ①②⑥이었다. 김열사의 설명이 쉽고도 이해가 잘 되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평가이고 보면, 몇 번에 걸친 농활경험과 전문적 연구․체계화 노력이 커다란 힘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열사가 발제한 부분들을 요약한 것이다. (당시의 설명은 한국 기독학생회 총연맹(KSCF)에서 1978년 발간한 「농촌활동지침서」에 의거했으나 1980년 초에 발간된 동연맹의「농촌활동안내서」가 김열사의 활동경험이 상당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게 김열사를 이해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1)학생농촌활동의 의의
①학생들의 사회참여에 있어서의 질적 수준의 향상을 위한 자체훈련 과정
②학생들의 정확한 사회인식과 민중민족의 고난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제공→농민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되는 계기
③농민운동의 간접적․측면적 지원
(2) 학생농촌활동의 역사
①일제시대의 계몽활동(브나로드 운동)
애국심의 발로였으나 낭만적, 감상적인 자선적 인도주의가 바탕. 시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의식에서라기보다는 방학중의 막연한 여가선용수준. 지속적인 현실개혁이나 역사 발전에의 창조적 기여라는 측면을 외면/포기→구조적인 농촌문제 및 모순의 악화
②60,70년대 초반의 농사 활동 및 개척 활동. 문제의 핵심을 농촌의 빈곤으로 봄, 그러나 농촌빈곤의 원인은 농촌자체의 모순이나 농민들의 게으름의 탓이 아니라, 역사적․사회구조적 모순의 농촌에서의 발현이므로 이 모순 해결이 없는 한 생산성 향상은 긍정적 해결책이 될 수 없음. 학생농촌 활동이 학생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베풀어지고 농민들은 단순한 활동대상으로 인식됐다.
③학생농촌활동에 임하는 자세
◦안이하고 낭만적 감상주의적 태도 불식
◦농민들을 의식화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태도의 극복
◦조급하고 성급한 태도 경계
◦자체 훈련을 통해 농민 문제에 몰입
◦유연성과 끈기있는 자세
◦유머감각과 낙관적 태도
◦농민에 대한 사랑과 신뢰
④학생농촌활동의 방향
◦방학중의 소일거리 및 추억거리로 생각하는 태도 철저히 불식→사회운동적 차원에서 인식하여 운동성 지향
◦학생․농민 쌍방의 적극적이고 주체적 참여 유도. 문제제기에 그치지 말고 철저한 평가와 후속작업 실시
◦농촌사회와 농민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구조적 모순에 초점을 맞추고 이의 극복을 위한 노력 경주
◦학생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
◦마을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문제라도 간과치 않고 깊이 파고 들어가는 문제제기적 태도.
김열사는 1박2일의 2차에 걸친 수련회에서 대원들에게 노래를 보급시키고 율동도 가르쳐주었다. 무슨 노래를 그렇게 많이 아는지 수도 셀 수 없을 정도 였다. ‘해방시켜라’, ‘아다다’, ‘농민가’, ‘호남농민가’, ‘작은세상’, ‘서울길(김지하詩)’ 등등.
그중 자신이 직접 대중가요에 노래가사를 붙여 지은 노래하나 소개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 도피적 가요라 해서 금지된 ‘고래사냥에 가사를 붙였다.)
농약값 비료값 모두 올라도
농민들의 쌀값은 오르지 않네
농민위한 농협은 장사만 하니
억울한 건 농민 뿐 설움만 당해
자 올려라 쌀값 올려라
올려 올려 쌀값 올려 쌀값 올려라
오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은
이나라를 살리는 지름길이네
……
자 올라라 불타 올라라
농민 농민 민중노동 불타올라라
형은 율동도 잘했다. 아동 반에서는 꼭 필요할 것이라면서 율동 시범을 했는데 이를 지켜본 모두가 신이 났다고 한다.
수련회 중 형은 생활규칙 및 활동 수칙에 대해서 완전히 외운 듯 메모도 없이 설명해 나갔다. 간단히만 소개한다.
①화려하지 않고 활동에 편할 뿐아니라 세탁이 간편한 옷을 입을 것.
②남자의 경우 단정한 머리. 장발금지. 혐오감 주는 머리스타일 하지 말 것.
③여자의 경우 속비치거나, 소매없거나, 홈파인 옷등 노출이 심한 옷 삼가. 색깔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몸에 짝 달라붙는 바지나 짧은 치마 입지 말 것. 액세서리 착용하지 말 것.
④작업화는 고무신을 신는 게 좋다.
⑤쌀 씻을 때는 한 톨도 흘리지 말고 먹고 남는 음식이 절대 없도록 할 것.
⑥밥은 쌀보리 적정한 혼식(마을 평균수준과 일치)
⑦식사 준비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 조용히. 식사는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낼 것.
⑧간식 절대 삼가
⑨활동목적상 필요한 경우(청년반의 경우)를 제외하고 음주 절대로 삼갈 것. 마실 때는 절대 취하지 않도록 할 것.
⑩합숙소 주변은 항상 청결하게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것.
⑪실내에 있을 때는 신발을 항상 가지런히 놓을 것.
⑫생활은 최대한 조용히 하고 웃음소리를 크게 내거나 유행가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⑬마을 사람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먼저 공손하게 인사할 것.
⑭영어나 서양 풍속, 은어는 사용하지 말 것. 특히 남녀대원간의 호칭에 주의.
⑮남녀관계를 특히 주의.
⑯길을 가면서 껌, 음식, 담배피우는 일을 삼가․칫솔을 입에 물고 다니거나 수건을 목에 걸고 다니지 않도록.
⑰마을 사람 앞에서 귓속말을 절대 삼가
⑱활동대장이나 책임자의 지시는 일단 따르고 대원들끼리 입에 모였을 때 이의를 제기토록.
⑲노래나 박수는 가능한 삼가고 지나친 농담과 음담패설에 주의.
⑳담배는 끝까지 피우고 마을의 연장자 앞에서는 삼가.
21. 농민들과 함께 있을 때는 농민의 생활방식과 수준에 맞추도록.
22. 농민들과 만날 때는 필기도구를 지참하지 말 것.
23. 쉬는 시간이라도 자세를 흐트리지 말 것.
24. 농민들과 대화시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섣불리 앞질러 말하거나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피할 것.
25. 대화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쉬운 말을 사용하고 어설픈 흉내를 내지 말 것.
26. 존댓말을 쓸 때는 존칭 어미를 확실히 발음할 것.
배경과 오시범 사례까지 들어가면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들은 대원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열사가 가장 강조했던 원칙은 민폐근절이었다. 어떠한 민폐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79년의 서강대학교 하계연합 농촌활동은 김열사의 뛰어난 업적중의 하나이다. 준비과정에서나 본활동에서 보여준 열사의 성실성과 열정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고문 역할을 했던 김열사는 규율부장 까지도 겸직, 대원들의 사소한 행동의 흐트러짐까지 바로 잡아 주었고 근로나 대화활동중에서 발견되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문제라도 문제제기형식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활동 중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대원들에게 느꼈던 것은 “자네들이 봉사활동합네하고 시골에 내려왔지만 저 곱고 보드라운 손으로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대원들도 무엇이든지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보였고 일도 열심히 했다. 그러자 그들은 대원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간혹 자기네 밭에서 나는 고구마나 옥수수를 쪄서 대원들에게 가져와서 성의표시니 들라고 했다.
민폐근절이란 대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으나 옥수수를 가지고 왔던 한 아주머니는 섭섭함이 극에 달해 동네방네 다니면서 도회지 학생들의 ‘인정머리 없는’사실을 전했다. 대원들과 농민들 사이에선 일종의 위화감이 감돌았다. 그 날 밤 평가회에서는 대책을 세우느라 부심했다. 그 자리에서 김열사는 민폐근절의 대원칙을 다소 후퇴시킨 듯 “우리의 활동 목적 중의 하나는 농민과 우리들 사이의 벽을 허무는 일인데 옥수수 문제로 벽은 두꺼워졌다.
이점은 우리가 농민들의 생활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데 기인한다. 시골 사람의 인정을 말로만 들었던 것이니 우리도 인정머리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칙이 수정된 것은 아니다. 차후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시는 신축성있게 대처하고 반드시 대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면서 대원들과 농민과의 괴리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0일 동안의 활동을 성공리에 끝내고 화양리 계곡에서 총 평가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 함께 참여했던 한 대원의 눈을 통해 김열사의 다부지고 억센 모습을 보자.
“대원들은 낮에는 땀을 쏟고 밤에는 수면에 쫓기면서 열흘동안의 기간을 잘견뎌냈으나, 마을을 떠나면서부터는 모두가 긴장이 해이되었고 화양리로 가는 버스안에서는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그러나 의기형은 버스에서도 메모를 하면서 평가회 준비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저런 지독한 사람. 화양리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지어먹고 평가회를 시작했다. 모두들 피곤이 엄습하여 하품을 하고 벽에 기대면서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기형은 샛벽 4시까지 자세하나 흐트리지 않고 대원들을 독려하며 진지한 평가 작업을 해냈다.”
그 농촌 활동을 마치고 김열사는 다른 농촌 활동 팀과 합류하여 또 다시 농촌활동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열사는 서강연합 농촌활동에만 활동을 국한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해 6월부터는 교내외의 각종 이념클럽의 농촌활동의 안내자가 되기도 했다. 78년 6월 서강대의 미등록서클인 ‘강회’의 농활에 대한 간접적 지도를 했고 심지어는 이대의 농촌 활동팀에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농촌 부분에 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존재가 되고 있었다.
강회를 이끌었던 김열사의 선배는 이렇게 증언한다.
“강회의 부활로 해서 분주했던 1학기 중반경. 신입회원들이 시각조정이 마무리 되었을 때 현실문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위해 하계농촌활동을 가기고 결정, 준비에 들어갔는데 클럽의 단절된 역사로 인해 다소 난감하기까지 했다. 적합한 조언자를 물색 중 마침내 아무도 면식이 없었던 의기를 우리 앞의 선생으로 모시게 되었다. 날카로운 눈썰미로 농촌활동에 대해 따발총처럼 설명해주던 그의 인상은 아직도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농촌활동을 전후한, 김열사 개인으로서는 너무나도 분명했던 이시기를 통해 우리는 보다 성숙해진 김열사를 만난다. 서강대 학생들의 맥을 짚고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한국근대사의 공부를 진행시키면서 4학년 모임을 주도했다. 더불어 학내 운동 상황의 점검, 앞으로의 방향설정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임에서 김열사가 힘주어 강조했던 것은 학생운동의 사회운동으로의 전환문제였다. “학창시절 한때의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이 척박한 세월을 종식짖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장기적 투쟁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때 김열사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남과 다른 학습방법을 개발하였다. 한국근대사 공부를 할 때의 그의 모습을 증언을 통해 되새겨보기고 하자.
“의기는 한국근대사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사의 정통성의 근거를 다른데서 찾았다. 당시 항일 무장투쟁부분은 거의 수용이 되지 않았던 부분인데, 그가 맡은 이 부분을 그는 도서관에서 일제시대의 신문을 복사하여 자료까지 제시하면서 분석해내는 것이 아닌가. 특히 보천보(普天堡)사건의 설명 때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79년 후반기 유신정권은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운명적 종지부를 예견한다. 경향 각지의 학생운동은 분화구처럼 터졌다.
’”김열사는 당시의 객관적 정황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차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농민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유신정권의 최후의 발악을 보고서는 다른 생각이 안들 수가 없었다. 9월이 되어 자신이 전개할 농촌에서의 현장운동을 위해서, 눈앞의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고 결단, 침체국면의 서강대 학생운동을 고양 진작시키기 위해 대규모 학생시위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같이 일할 동지를 찾고 거사일을 10월 28일로 잡았다. 그러나 10월 YH사건, 김영삼 총재 제명, 부마 민중항쟁 등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독재의 원흉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거꾸러졌다.
이 때문에 10.26 이틀 뒤로 예정했던 김열사의 거사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가 학내에서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졸업을 눈앞에 둔 열사는 학점을 고의적으로 소홀히 하여 한 학기를 더 다니기로 결정하게 된다.
10.26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각 학교는 제각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학원민주화 운동을 추진한다는 인식을 같이 하게 되었다. 11월 하순 수업이 재개되고 사회 민주화의 일환으로 학원 민주화 운동의 포성은 울렸다. 11월 27일 서강헤럴드 사무실에서 각과 대표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과대표도 아닌 김열사가 참석하여 정국추이를 설명하면서 학원민주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2월 3일 학생회관 3층 대형강의실에서 학원민주화에 대한 공청회가 전국 최초로 개최되었다. 이런 일을 그냥 넘길 김열사가 아니었던 만큼, 이 공청회에서 그는 학도호국단의 철폐와 학생회의 부활, 학내 언론자유보장, 학생활동 자유보장 등을 주장하며 사자후를 토해,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김열사는 학내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무렵, 서강대 민속 문화연구회(탈반)의 농활계획 소식에 접한 김열사는 스스로 농촌활동의 의의와 실천방침등을 설명해주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탈반 회원이었던 한후배는 김열사를 이렇게 회상한다.
“형은 겨울계획을 달리 갖고 있었으므로 우리와 함께 농활을 같이 가지 못했으나 우리의 농활에 큰힘과 격려가 되었다. 생활규칙, 농활의 자세, 일과 여가의 문제, 대민중관 등등……일을 하다 쉬고 싶을 때, 도시의 찌꺼기 문화에 대한 향수가 날 때, 평가회에서 졸음이 올 때. 우리가 하느라고 했으나 실제 생활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여 담담했을 때, 농촌 문제란 이렇게 철새처럼 한두달 왔다가 훌쩍 떠나서는 해결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농촌에서 살면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마을을 떠나면서야 얻고 참담했을 때,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지루하고 답답할 때마다 우리는 선한 얼굴로 웃으면서 얘기해 주던 의기형을 생각했다.
형이라면 이 문제를 쉽게 풀었을텐데, 형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까. 이제와서는 더 이상 물어볼 형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형이 던진 문제와 재미있는 어투 속에서도 날카롭게 드러나던 문제의 본질을 우리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80년의 해해가 밝아왔다. 그때까지 지속시켜왔던 4학년모임은 졸업을 앞둔 동료들의 합의 -졸업후 현장 쪽의 사회운동을 지속한다는 -하에 해체된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비빌언덕’이었던 농촌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가지게 된다. 아울러 학내의 민주화운동에서까지 적극 가담하면서 지지발언을 해주었고, 없는 돈에 시계까지 전당잡혀 학생회부활을 위한 공청회에 쓰여질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2월 25일 제 2차 공청회가 강당에 열렸다. 집행위원들의 발표가 있은 후 느닷없이 단상에 뛰어오른 김열사는 학도호국단의 역사적․구조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문교부가 발표한 학도호국단 설치개정안을 근저부터 비판하고 나섰다. 그리고 학생회를 왜 부활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쾌한 논지를 펼쳐 우렁찬 박수를 받고 민주주의 만세, 학생회 부활 만세를 삼창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80년 서울의 봄은 꽃샘바람을 타고 오고 있었다. 각 학교에서의 학생회 부활과 시국성토, 시위, 농성,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과 사북사태 등으로 민주화의 몸부림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때 김열사는 학내의 움직임에 직접․간접적으로 연관을 지으면서 호남지방 농민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호남 지방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에서도 학교행사에는 빠짐없이 나왔다.
서강대에서도 3월 28일 총학생회가 구성되어 민주화 일정을 착착 밟아나가고 있었다. 김열사는 당시의 전투론
과 준비론의 맹점들을 극복, 농민운동과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한편 민주화의 봄에도 적극 참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4월 19일에는 4․19행사와 함께 학생회 부활기념식, 복교생 환영식이 동시에 진행된 날이었다.
총학생회 주최로 학생회관에서 열린 복교생 환영회에서의 김열사의 모습을 한 선배로부터 들어보자.
“총학생회 주최로 C관 라운지에서 복학생 환영회가 열렸을 때였다. 72년 이후 계속된 반 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가 체포․투옥․제적 등의 핍박을 당했던 선배들의 복교를 축하하는 행사였기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분위기를 잡아가며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공식 식순이 끝나고 막걸리 잔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며 기세를 올릴 때, 의기는 이 좋은 날 노래 한 곡을 안부를 수 있겠느냐며 노래를 자청했다.
그리고는 식탁 위로 단숨에 뛰어 올라 한껏 목청을 높여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로 시작되는 농민가를 부르기 시작됐다. 순간적으로 탁자 위에 뛰어 오르는 그 성정(性情), 그 박력이야말로 의기의 사내다운 면모였다고 생각된다. 광주소식 이후 기독교회관에서 죽은 사람이 바로 의기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복학생 환영식장에서 비호같이 식탁 위로 뛰어올라 농민가를 불러대던 의기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80년 4월 하순, 1학년 학생들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병영 집체훈련 반대 철야농성을 계속하고 있었던 때에도 김열사는 낮에는 자신의 일을 정리해나가면서 야간 철야농성에는 반드시 참석 민주화토론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계엄 통치 당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농성 진행의 일정속에 강연회가 있었는데 의기형은 “오늘의 농촌문제”를 주제로 학생들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80년 3~4월의 학내 민주화운동은 5월들어 대사회투쟁으로의 노선 전환이 이루어졌다. 5월 12~3일 경부터 거리로 뛰어나와 가투를 감행하기 시작했고 14일에 이르러서는 교정에서 경찰병력은 완전철수, 저들의 아성만을 지키기에 급급하기에 이르렀다.
13일에는 서강대와 연대 학생 약 2천 5백여명이 광화문 일대에서 유신잔당타도, 계엄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14일 광화문 네거리에 진주한 장갑차를 보고 다소 동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37개대학의 학생들은 14일에도 연이어 대거 가두시위를 벌였고 15일에는 30개대학의 약 10만의 학생들이 서울역 앞 시위를 벌였다.
13일 교내시위현장과 15일 서울역 앞 시위 현장에 김열사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13일의 시위때는 교문 위에 올라가 확성기로 “유신잔당 몰아내자. 노동삼권 보장하라. 농민생계 보장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을 이끌었고 15일 서울역 광장에서도 그의 장점인 웅변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군부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당시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16일 이대에서 있은 전국 27개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교내 및 가두시위의 일단 중지라는 결의를 천명, 그이후의 학생들의 움직임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5월 18일 0시의 밤은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국무회의는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를 의결하고 휴교령이 내렸으며, 김대중, 김영삼씨 등 26명이 연행되는 등 흑색공포가 자행되었다. 이때부터 시위에 관련된 학생들은 너나할것없이 은신처를 찾아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형은 17일부터 집과의 연락을 끊고 재기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18일에는 등산을 가장하여 우이동 계곡에 나타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중앙일보사에 근무하던 누나에게는 거의 매일 전화를 안부를 전해 주면서 “나는 잘 있으니 아무걱정말라.”고 하면서 어머니 걱정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광주에서 의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즉시 광주로 내려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주 민중 항쟁을 직접 목격한 김열사는 결단이 섰던 것 같다. 광주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중, 5월 30일 기독교회관의 금요기도회라는 집회소식을 접한 형은 서울의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란 유인물을 등사제작하여 서울봉기를 선동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목격자로부터 상황을 증언한다.
“김의기를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는 기독교회관 607호다.(현재 EYC사무실은 7층으로 이전하였음.) 12시쯤 EYC 사무실에 나타난 의기는 ”광주에 다녀왔다. 심정도 복잡하고 뭐 좀 쓸 것도 있으니, 사무실을 좀 비워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계엄령 하의 질곡 속에서 젊은 기독청년들이 광주소식이 궁금해서 나와있었고, 사무직원과 간사 등 EYC 사람들로 사무실은 부산했다.
의기의 부탁을 받은 나는 사무직원과 간사들에게 별일 없으니 일찍들 들어가라고 얘기해서 퇴근시켰고, 방문객들도 자리를 뜨도록 했다.
그리고 건물내의 다른 사무실에 들러 얘기를 나누다 4시경에 EYC 사무실에 오니, 의기가 자기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전해주면서 “형 그럼 내일 만나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원본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햇볕을 보지 못했을 지 모른다. 당시 의기가 뿌리 유인물은 경찰에 의해 1백퍼센트 현장에서 수거되었기 때문이다.
유인물을 무심코 받아든 나는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무심코 이유인물을 받아들고 사무실을 나와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로 향했다. 상동교회에 도착한 것은 4시 40분 당시 감리교 상동교회 청년회장에게 의기가 만든 유인물을 건내주며 한번 보라고 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읽고 난 청년회장은 ‘의기가 큰일을 벌릴 것 같으니 급히 다시 사무실로 가서 만나보라. 내용으로 보아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내가 기독회관에 도착한 것은 5시 50분. 이미 일은 끝나 있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김의기는 이미 5시경에 기독교회관 앞에 포진한 두 대의 중무장 장갑차와 장갑차 사이에 떨어져 현장에서 즉사했던 것이고, 주검이 되어서도 평시에 그렇게도 쫓겨 다니던 전경들에게 포위되어 서울 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기독교회관의 금요일은 범상한 날이 아니다. 악랄한 박 정권의 그 숨막히는 통치 하에서도 기독교회관의 금요기도회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겨레의 등불이었다.
그 날도 6시에 금요기도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칠흑같은 계엄 하에서도 NCC는 금요기도회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그전주 금요일에도 1백명정도의 인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개최했었다.
그 날의 금요기도회에는 모 측의 주최에 의해서 대규모 집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기독교회관 주위에 나돌았다. 의기가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짐작도 가능하다.
즉 그 날 자기가 거사함으로써, 계엄령하의 광주 은폐 및 흑색 허위선전에 철퇴를 가하고, 그 날 금요기도회에 모인 민주인사, 교회지도자, 인권운동가들을 통해 그 다음날 서울역 광장에서의 대규모 시민 집회를 꾀하고자 순교의 길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상으로 김의기 열사의 대학이후 활동 상을 같이 활동했던 주위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았다.
숨막히는 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살려고 했던 김열사의 의지는 그의 삶 어느 구석에서라도 스며들어 있었다. 5.17 이후 패배국면의 상황에서 광주민중봉기를 악선전하고 흑색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반동적 집단에 철퇴를 가하려고 했던 그의 투쟁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 열렬한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아울러 학낸 선배 부재라는 상황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운동의 활성화를 시도했던 적극적 자세, 학생운동을 장기적 차원에서 사회운동화하려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내면적 투쟁자세, 이 나라의 고통받고 있는 민중에게 뜨거운 애정과 깊은 신뢰를 갖고 이 사회가 처한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던 그의 자세는 언제까지나 우리들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다.
제 3부 열사가 남긴 글
Ⅰ. 동포에게 드리는 글
Ⅱ. 일기
Ⅲ 한국 농업과 농지 제도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기어 놓으려 하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오후 4시 35분
김 의 기
열사의 일기
78년 10월 15일 일요일 맑은 듯한데.
시월. 몸은 편안(便安)하게 잘 쉬는데 마음이 불편(不便)하다. 어제 시험(試驗) 두 개 보고 내일 불란서 혁명사 있고 수요일날 또 하나 있고. 세수 양치질 모조리 생략하고 하루 종일 빈둥빈둥. 어제 학교(學校)에 유인물 뿌려졌다. 17日 광화문에 모이자고, 23일부터 일주일간 동맹휴학에 들어가자고. 방공(防空)등화관제가 내일에서 17일로 ‘사정상’ 연기 됐단다. 속 들여다 뵌다. 지난 목요일에는 중대(中大) 축제에 갔다가 상도동에서 자고 해서 너무 재미있고 좋았는데. 목욕이나 하고 와야겠다.
목욕하니까 졸립다. 정 상일이 BOXING 봤다. 멍청한 녀석 KO로 지다니. 오늘이 음력으로도 보름이라 그 부조인가보다. 달 밝다. 이번 주일. 폭풍은 예정되어 있는 그 전야(前夜)의 긴장.
’78년 10월 17일 광화문 시위 미수 - ’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잠시 주춤했던 유신 철폐투쟁은 ’76년 12월 [박동선 사건]으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투쟁의 선도체 역할을 담당했던 학생운동이 고립 분산적인 시위 차원을 벗어나 연합적이고 조직적인 투쟁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학생 운동권 내부에서 싹텄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시위를 벌여 박 정권에 일대 타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몇몇 대학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연합시위는 운동권 내의 역량 부족으로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으며, 몇몇 운동인자들의 불철저함으로 인해 사적 검문검색에 의해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연합시위를 이어받아 광화문 가두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이것도 사전에 검거되었다. 이 두 시위 건을 일반적으로 10․17 광화문 시위 미수로 말하고 있으나, 두 건은 별도로 추진되었다.
16日, 17日, 18日, 19日, 20日, 21日.
애써 태연해지려 한다.
젊.
10월 18일 목
경제학자(經濟學者)들, 특히 한국의 경제학자(經濟學者)들. 사회과학(社會科學)의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경제학(經濟學)을 하는 사람들은 우선 사회(社會)에 대한 기본적(基本的) 인식(認識)이 올바로 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다. 사회과학자(社會科學者)들은 동시(同時)에 철학자(哲學者)이어야 하고 역사가(歷史家)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과학자(社會科學者)는 죽은 사회(社會)를 대상(對象)으로 하는 것이지 산 사회(社會)를 대상(對象)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임 종철 선생, 박 현채 선생, 안 식 선생 같은 이들. A. Smith나 D. Ricardo나 K. Marx나 M. Dobb이나 Sweezy나 Schumpeter, Baran이나 등(等)의 사회적(社會的) 측면(側面)으로써의 경제(經濟)를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문제의 본질(本質)을 파고들어 그를 해명(解明)하려고 몸바쳐 노력하는 사람들. 경제학(經濟學). 이건 인간(人間)의 본질(本質)에 관(關)한 문제이다. 문제들 중에 하나가 아니고 문제의 본질 그 자체(自體)이다. 박 종철 선생. 한국경제(韓國經濟)를 너무 명쾌하게 시원스레 잘 써 놓았다.
Political Economy.
경제학(經濟學) POLITICAL ECONOMY.
사람들!
사람들 펀뜻펀뜻 새로움, 신선함, 색다름, 느끼면서 새로이 발견(發見)하게 된다. 전혀 그런 느낌 안 가지고 대했던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발견(發見) 할 때 무지 반갑다. 무지 정겹게 느껴진다. 너무 좋다. 그런 느낌 가지게 될 때의 만남, 참 귀(貴)하게 느껴진다. 꼭 얼굴과 얼굴과의 대(對)함이 아니더라도. 입 속에 이름만 가만 불러보아도 흐뭇한 웃음 감돌게 만드는 사람들. 전에 내가 친구(親舊)를 규정할 때 하던 말들 생각난다. ‘보지 않을 때 보고 싶고 만날 때 좋고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들’이라는. 수정(修正)할 필요(必要) 있을지 모르지만 그대로라도 좋다. 남(男)도. 여(女)도. 구별(具別)없이. 끝까지 함께 있기를 바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결혼(結婚)도 결국은 가장 좋은 이성(異性) 친구를 가장 가까이 놓아두고 싶음일게다. 더 이상(以上) 뭘 바라지 아니한다. 이거면 족(足)하다.
10월 19일 목요일
사회과학(社會科學)과 나와의 관련성(關聯性).
내일 H와의 만남 약속.
오늘 행군(行軍).
변증법.
흐뭇스러움. 불쾌(不快)함.
박 근창 선생의 농업경제학(農業經濟學)이 두 달쯤만에 끝났다.
‘좋은 만남으로 만들 수 있기’
나에게 있어서 귀중(貴重)한 사람들.
모든 사람들을 귀중히 여겨야겠지만 특히 귀중한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 그런 사람들을 내 가까이 있게 해주신 신(神)에게 감사(感謝)!
간다.
울지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환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10월 23일 월요일
오늘서부터 전 대학들이 일제히 맹휴(盟休)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우리 학교는 불발(不發). 혼자서 수업거부(授業拒否). 제대로 표현하면 땡땡이.
이 형사(刑事)의 규제가 내일서부터 좀 늦춰질 껀가부다.
숨통이 좀 트이려나.
가을, 가을.
10월 27일 금요일
슬픈 노래는 하지 아니하기.
승(勝).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는 주 예수는 이를 증명하여 준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것을. 몇 사람들, 그리고 Y, H, Z, K 등 외 수인(數人).
희망은 아직 있지 아니한가. 있다!!!
술 아무리 처먹었어도 강함 잃지 아니하기.
좋은 아이들. Why? Why? What?
OH!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10월 30일 월요일
나도 배우는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성급한 결론은 경계!!
아는 한(限)에 있어서는 체계(體系)를 세워야겠지만, 그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배우고, 공부하고, 얘기하는 중에 결론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
인간(人間), 역사(歷史), 사회(社會).
인간과 역사와, 역사와 사회와, 사회와 인간과, 신(神)과 해방과, 인간다운 세상, 정의로운 세상, 정의로운 인간(人間).
체계화(體系化)되지 못한 지(知)는 무지(無知)보다 더 위험하다. 지금까지의 생각으로라는, 이라는 전제. 많은 앎의 필요. 공부(功夫)하기!
사람들. 중요(重要)한 사람들, TYPE
11월 2일 목요일
즐거운 만남이라는 거. 인간애(人間愛).
선(善)한 뜻을 가진 사람들의 귀중한 만남.
따뜻하고 흐뭇한 사랑의 오고 감.
친근감(親近感).
이 가을, 오랜만에 편지를 써 보고 싶다. 잊혀져 가는 몇 얼굴들을 애써 기억 되살리면서, 한 잔 술로 회포도 풀고 싶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서로 살아가는 얘기도 하면서. 사랑하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11월 5일 일요일
어제 오랜만에 ○○○한테서 편지 받고 답장 쓰려는데 쓸 말이 너무 없었다. 말을 잊었나, 잃었나.
밤저녁.
내
11월 9일 목요일
춘천(春川).
형제(兄弟).
H.
11월 12일 일요일
운동(運動).
범위. LIMIT LINE.
H. 줄 끊어진 시계(時計)가 내 손에 붙어 있고자 한다.
조그만 까만색 시계, 정도유지(程度維持).
이성(異性)으로 대(對)하게 됨을 경계(警戒).
소박(素朴)한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나 박애주의자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박애의 기본(基本) 정신(精神)이 필수적이고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가 전제조건(前提條件)임은 틀림없으나, 그것이 절대로 전부가 아니다.
한국 사회(社會)의 ‘사람이 살 만한 나라화(化)’ 하는 데에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근본적 치유가 있지 아니하면 안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다 더 사람이 살만한 나라가 되게 하는 일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한다.
운동차원(運動次元), 혁명차원(革命次元)에서.
민족(民族), 인류(人類), 일반적(一般的)인 것과 특수(特殊)한 것.
식민지(植民地)와 전쟁(戰爭)으로 유지(維持)되는 이 세상(世上).
십자가(十字架)의 예수는 대답(對答)한다. 내가 세상(世上)을 이겼다고.
사람들, 사람 만나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11월 13일 월요일
쓸데없는 상상(想像)으로 사람 잘못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기.
사랑스러운 사람은 사랑스러운 대로 보고.
날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그 믿음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된다.
충분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해주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은 다르다는 그것 때문에.
나와 비슷한 생각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그것 때문에
술, 사람.
그림자조차 그리운 사랑하는 사람아.
그에게 축복을 내려주길 우릴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원하옵니다.
11월 18일 토요일
신(神).
사랑하기, 사람 사랑하기.
한 점 티없이 순수(純粹)함을 끝끝내 유지(維持)하기. 사(邪)사 끼어서는 아니된다. 비겁해서는 아니된다. 아낌없이 주고 그 대가를 원하지 아니함.
하늘 바라보면서
하늘 물 들면서 살아온 순이
하늘에서 찾아온 십칠인치 유리관 낮도깨비에 홀려
패션 쇼 하러 내려온 옥이 따라 봇짐을 싼다.
11월 23일 새벽
곧 방학.
이번 방학기간에는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 열심히 하기.
인간애(人間愛), 사회혁명(社會革命), 신(神)의 의지(意志).
희영.
농촌(農村)모임. DATE.
교회(敎會).
자유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유, 민주, Liberty, FREEDOM, DEMOCRACY.
슬프다. 우리 젊은 학도들이 학원 내에서 학업에만 열중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정치적 외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時代)가, 백성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압살해버리고 만 유신 6년 동안의 기간에 얻은 것은 거의 대다수 백성들의 입과 눈과 귀를 봉해버린 총칼의 번득임이요 얻은 것은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파쇼적 독재주의요, 잃은 것은?
유신(維新).
11월 23일 밤.
이 땅은 무덤,
축축한 삼천리의 무덤 속에서
밤에도 낮에도
울다 간 사람아.
엊그제 우리들은 가슴을 치며,
헝겊처럼 찢어진 가슴을 치며,
꽃잎보다 뜨거운 이야기들을
밤 새워 살 맞대고
나누지 않았느냐,
젖은 눈으로
한 세월 떠다니며
울다 간 사람아.
풀잎이 되었느냐 돌멩이가 되었느냐.
살아서도 우리들은
휴지가 되어
어디론가 소리 없이
흘러가는구나.
먼지뿐인 마을,
날 선 칼끝만 보이고,
천지에 화약냄새 가득하니
굽은 등 부벼 댈 언덕이나
있느냐
바람 속에 소리 지를
대숲이나 있느냐
허이 허이 거친 들 진눈깨비 속을
골 붉은 설움만 몸에 두르고
어찌 갈꺼나 어찌 갈꺼나
빈손 흔들며 흔들며
울다 간 사람아.
이 땅은 무덤,
네가 깊은 밤
혼자 간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떼지어서 네 목을 조르고
네 몸을 지근지근 밟아 댔구나.
네가 잠든 사이
커다란 칼이 너를 찌르고
날카로운 어금니가 너를 물었구나.
한 번도 큰소리로 웃어보지 못하고
울다가 울다가 떠나간 사람아.
남의 집 문칸방 벼개 맡에
한숨만 두고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나간 사람아
돌아오라
오는 봄에 웃으면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 양 성우의 [울다간 사람아]
주여!
잠든 마을에도 꽃이 피게 하시고,
썩은 숲속에도 새가 울게 하소서.
밤새 맺힌 한 방울 이슬방울로
목마른 우리들을 목축이게 하시고,
얼어붙은 산천에도 4월이 와서
불같이 이글이글 타오르게 하소서.
지금은 진눈깨비,
묶인 몸으로 피를 토하며
사람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얼음 위에 짐승들만 짖어대는데
주여, 오소서
병든 이 땅에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주여, 오소서
사나운 총․창끝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서글픈 영혼들을 위하여
당신의 포옹과 속삭임을 주소서.
겨울은 너무나 길고
사슬은 뼛속에 스며듭니다.
주여
어서 오소서
당신의 빛나는 모습으로
날마다 날마다 오소서
주여!
김 정호 동지
동지여!
당신은 살아 있소, 당신은 결코 죽지 않소. 당신은 살아 있소, 당신은 결코 죽지 않소. 황소웃음 웃으며 말없음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던 동지여, 당신의 고무신은 아직 살아 있소.
당신은 바라고 사는 농사꾼들이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죽지 않소, 당신은 절대로 죽을 수 없소.
울다가 울다가 간 스무한 해 동안 당신은 결코 울지 아니하였소.
당신은 바라고 사는 촌놈들이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죽을 수 없소.
오늘
당신을 빙자하여 우린 술을 마셨소.
당신이 즐겨 부르던 아다다며 갑오농민혁명가를 부르면서
책 보자기에 책 싸다니던 동지여,
당신은 결코 죽지 아니하였소.
징을 울리고 죽창을 든 당신을 봤소.
징의 울림 소리에서 죽창의 날 번득임에서 우린 당신을 보았소.
장군이며 장수인 당신을 보았소.
동지여
우린 오늘 농민의 노래를 소리 높이 불렀소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불렀소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 휘날리기를 소리 높이 기원했소.
동지여
당신이 누워있는 땅은 당신이 항상 그리던 흙이요, 생명이요.
동지여, 농민의 아들이여.
하늘 바라고 하늘물 들면서 살아가던 동지여.
‘김 정호 동지’ - 1956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 74년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 이때부터 고인은 농민의 아들로서 농업 문제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몇몇 대학생들과 함께 농업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며 학생운동 속에 농민운동을 보급하여 학생운동의 민중 지향성을 높여 갔다. 짧은 기간이나마 고인은 언제나 웃으며 말없이 모든 일을 실천해나갔던 농민운동가였다. 76년 11월 23일 음산한 겨울에 김 정호는 농민운동을 같이 했던 몇몇 사람들과 농촌문제에 관한 토론을 마치고 헤어진 후 장충동에 있던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11월 24일 금요일
김 정호의 무덤 앞에는 그의 꿈을 말해 주듯 파란 쑥이 소담스러이 돋아나 있었다. 한 잔 포도주로 인사 나눈 동지(同志)여.
당신이 매일 누워 있는 발치엔 이런 글이 쓰여 있소.
“아 애통하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
한국의 젊은 예수
농민의 아들
바쁜 손길을 멈추고
항시 조용하던 모습
고요히 묻히다.
당신의 육신은 갔으나
님의 뜻은 이 땅에 영원하리라.
이 강토에 찬연히 농민과 민중의 깃발이 휘날릴 때
그날
꽃바람 속에
우리 당신과 함께 한데 엉겨 춤추리라“
몸으로 뜻을 펴다 간 동지(同志)여. 울다가 웃다가 먼저 가 날 기다리고 있는 동지여, 사랑하는 동지(同志)여.
11월 25일 토요일
보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다.
이런 보고 싶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이미 오래 전에 났어야 했을 사람이었는 듯 싶은 사람.
희영,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놀라우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 바칩니다. 당신 뜻에 따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이 땅 위의 인간들이 당신의 뜻을 그르치고 있음을 당신께선 이미 잘 보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람을 손수 지으실 때 내려주신 사람답게 살 권리를 힘과 돈과 무력으로 박탈하고 있는 저 악한 자들,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의로운 이들을 박해하는 저 사악한 무리들에게 놀라우신 당신의 힘을 보여 주소서.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함은 어떤 방해에도 이를 이겨 끝끝내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을 제게 내려주소서.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이들 곁에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온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용기를 잃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게 붙들어 주소서. 특별히 당신께서 제 곁에 보내주신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양 희영에게 아버지께서 항상 그 곁에 함께 하셔서 그를 돌보아 주소서. 이 모든 것 온 백성을 위하여 나무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11월 29일 수요일
白凡 선생, 親日亡國事大附逆輩 이승만. 민족, 백성, 민중, 겨레.
이 나라 좀더 살 만한 나라 만들자고, 우리가 당해본 남의 나라 침략하기는 말고 남의 나라 침략받지도 말고
우리들아,
우리나라 정말 살 만한 나라 만들어 보자. 알맹이는 쏙 빼서 남 다 주고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져 후여후여 하지 말자. 저 사악하고 불의한 무리들 제 배 채울려고 나라 팔아먹는 수작 똑똑히 보자.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나마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앙앙대는거 집어 치우자. 그런 수작 벌이는 자들 장단에도 놀아나지 말자. 그런 자들 편안히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것들 끌어내어 민족 앞에 무릎 꿇리우고 단호히 정죄하자.
남의 입, 귀, 눈가리는 놈, 한자리하면 마르고 닳도록 그자리 해처먹을려고 별별 개 같은 짓들 다 하는 놈. 자기 배 부른줄만 알고 남 배고픈줄 모르는 놈, 우리 백성 고혈 짜내서 남의 나라 시중 드는 놈, 남의 나라 돈에 환장해서 우리 처녀 팔아처먹는 놈, 제 가진 것 아까와서 알면서도 바른소리 못지껄이는 놈,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놈, 등치고 간 빼처먹는 놈, 한자리 해처먹을려고 오만 방정 다 떨고 오만 아첨 다 하는 놈, 이런 아류에 속하는 망족부역노들에게 민족 무서운줄, 역사 무서운줄 알게하여 주자.
억눌리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협박당하고 그러면서도 할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듯이 지내는 민중 무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자.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다.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단 두개의 길에 대한 대안밖에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아니하다. 일시 사는듯이 보일 무릎을 꿇고 사는가 아니면 일시 죽는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인 끝끝내 서서 죽길 고집하는 가의.
11월 말일 목요일
내가 願하고 理想世界로 상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社會가 社會主義적인 색채를 띤 것이 아닌가. 經濟, 民族, 政治 이 모든게 어울어진 社會.
民族, 民族愛, 民衆
革命, 프랑스 대혁명, 甲午農民革命, 러시아 볼셰비키 革命, 中國革命, 쿠바革命, 필리핀 등지의 東南아시아, 이란 등의 중동, 탄자니아 등의 아프리카, 베네줼라 등의 라틴아메리카의 第3世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일랜드, 버마의 인도지나.
미국, 소련, 독일, 일본, 영국, 불란서, 화란, 서반아, 포르투칼의 帝國主義 내지 新帝國主義.
中國革命과 文化大革命에 對해 철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가장 中國的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 世界史的 관점에 가장 충실해질 수 있는 것일게다.
중국이 점점 불안해 진다. 日, 美와 修交를 하게 되면 한반도 주변정세는 대폭 재정리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바깥이 어지러우면 나라안이라도 평안해야 할텐데, 평안을 가장한 엄청난 不平安이 南北의 문제, 북한內의 김일성 神格 독재의 문제, 南韓의 某氏의 유신독재, 類는 조금 다르지만 그 軌는 같이 하고 있는듯 하다.
資本主義와 基督敎, 이란事態도 예상하기 어렵다. 美國때문에. 美國이 어떤 要素든지 직접적 개입이 不가피할 것 같고.
양력 섣달 초하루
비 오고 우박 오고 눈 오고 바람 불고 여하튼 괴상한 날씨,
내일이면 試驗 끝나고 放學.
12月 2日 - 2月 28日까지 석달동안 기나긴 放學
희영. 보고 싶다.
運動과 革命과 同志
農村, 農民, 農業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 우리는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 우리는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
희영. 보고 싶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여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이 세상 모든 것 내게서 멀어져가도 언제까지나 너만은 내게 남으리.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平安과 安樂을 가지고 싶다. BUT! 우리 겨레 中에 어느 누구 하나라도 他意的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는限 유보해야만 하는 바램이다. 겨레에 對해 앎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自體가 이미 그에게는 벗을 수 없는 짐을 지게되는 것이다.
그림자조차 정다운 사랑하는 이야.
하느님 품안에서 平安을 가져라. 따뜻함과 포근함 지니기를 끝끝내 고집해라.
그리고 동료 人間들 생각을 끝끝내 멈추지 말아라.
멀리서 祝願 빌어주는 마음이 하느님을 매개로 하여 그에게 전달하게 하여 주옵소서. 神이여!
우린 이길 것이다. 이기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젊은 혈기로만 그러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이런 생각 견지하기를 붙들어 주소서, 하느님.
ALMIGHTY GOD! 全能하신 하느님.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밝혀 알게 하여 주옵소서.
全知全能하신 아버지 하느님.
기쁘다 救主 오셨네
당신에게 저를 바칩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十字架, 구원
12月 5日 화요일 아침
合宿
農村活動
雜念을 털어버리고
確信은 장차 疑問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疑問은 장차 確信을 가져오게 된다.
農業問題의 本質理解
앞으로 제 3세계는 어떻게 되고 民族主義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先進 資本主義 국가는 살아남을 것인가.
남북문제는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있는가.
한국경제는 어디에 와 있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勞農운동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이고 韓國에도 혁명이 일어나겠는가.
統一은 ?
- 저 녁 -
할일이 있다. 많다.
神.
農民, 국가독점 資本主義 下의 小農문제.
어떻게 해결되어져야 하는가.
政治的 범주에 속하는 農民문제.
經濟的 범주에 속하는 農業문제.
이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社會的 次元에서의 農村문제.
이 엄청나게 큰 문제를 앞에 놓고 내 힘 미력함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1,300만의 農民, 천 삼백만의 농민을 관심대상으로 삼는, 아니 3,500만의, 아니 5,000만의 우리 배달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일의 어려움.
세계사와 민족사의 맥락 속에서 오늘의 세계와 우리 민족과 앞으로의 세계와 우리.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졌음은 이미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회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혹 그럴 수 있다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다.
이 멍에는 우리 오천만 모든 겨레 위에 덧씌워져 있어 우리 모두가 이 멍에를 벗기 前에는 아무도 벗을 수 없다.
문제의 核心과 正面으로 맞닥뜨리는 일 이외의 아무런 다른 해결책이 없다. 냉혹하고 살벌한 제국주의 단계의 서구 독점자본의 논리 속에서 정치인 資本家, 知識人, 言論 모든 것들이 한통속이 되어 事大와 賣國과 매판과 아부와 不義가 판치는 世上에서 짓밟히고 억눌리고 빼앗기면서도 그냥 당하고만 있는 이러한 사태의 本質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인식의 實踐에 따를 힘 이외에 다른 해결책은 아무 것도 없다. 신동엽, 김지하, 양성우의 시집이 禁書가 되고 박현채, 이영희, 김동길의 책까지도 禁書가 되는 世上에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굴종을 의미할 뿐이다.
갑오년, 기미년 사람들이 힘을 준다.
어머니의 땅에 묻혔어도
편히 돌아누워 볼 한치 땅도 가지지 못하고
그날도 오늘도
날선 칼로 죽창 깎고 있는
갑오년 사람들아
장성 갈재 뜨거운 피로 피 도배하고
황룡강 피눈물로 홍수내고도
아직도 못다 울은 서러운 울음.
서러운 황토 밑에 길게 누워서
그날도 오늘도
날선 칼로 죽창 깎고 있는
갑오년 사람들아.
날선 칼끝 타는 울음소리처럼
그렇게 서럽게
울어봤을 턱이 있겠느냐
사천년 묵은 분노 터지니 폭풍이고
사천년 삭힌 억울 터뜨리니 노도구나.
갑오년 사람들아.
오적육적 날뛰는 꼴 지켜보고 있느냐.
어서 정을 울려라
무덤을 열고 모두모두 나오너라.
창의 격문 읽어 내리던 그 겨울이 춥더냐.
유신헌법 긴급조치 이 겨울도 꽤 춥다.
조총으로 무장한 관병 왜병 세더냐.
기관총 탱크로 조지는 요즘 犬도 꽤 세다.
오늘부터 담당이 바뀌었다. 당분간은 좀 괴롭겠다. 담당을 떨쳐버릴 마땅한 좋은 方法이 잘 생각 안난다.
지금 내가 處해 있는 곳이 어디인가.
人間, 사람, 사랑, 社會
資本主義의 基本的 主모순은, 생산은 社會的 生産인데 生産手段은 私的 所有라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生産手段을 가진 계층과 勞動力을 팔아서 먹고사는 계층間에 계급적 利害의 對立이 첨예화된다. 그리고 生産手段의 사적 소유는 경쟁의 논리에 의해서 점차 集中化 되어가고 資本의 유기적 구성도가 점차 고도화된다. 이에 따라 賃金의 分配分은 점차 감소하게 되어 수요는 일정 수준에서 정지 또는 低下되는데 生産은 그 自體 無政府性 때문에 점차 增加되어 공황이 發生한다. 공황은 주기적으로 확대․심화되어 계급적 이해의 대립과 결합되어 결국 자본주의의 사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적 논리이다.
그러나 歷史는 이와 똑같이 進行되어지지 못했다. 우선 資本主義 國家들은 非生産的인 대량소비의 방법으로 戰爭이라는 方法을 찾아냈다. 그리고 植民地도 이러한 資本主義體制를 계속 유지해 주는 큰 役割을 하게 된다. 이들 식민지는 상품 生産市場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황전가 mechanism으로도 기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식민지와 戰爭을 기반으로 先發資本主義帝國의 勞動者들은 小부르조아가 되어 계급적 이해관계의 對立도 완화된다. 이러한 것이 資本主義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key일 게다. 그렇다면 제 3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 3세계는 이미 이러한 資本主義의 論理를 理解하기 始作했다. 물론 宗主國의 이해관계와 同一한 이해관계에 서 있는 부류들-기득 이권을 가진 Group들-이식경제의 매판세력과 執權계급들의 개발주의的인 호도책이 얼핏 효과를 보이기도 하지만 民衆的 理解와는 상반되는 것이 물론이다. 제 3세계 Group들은 先發資本主義國들의 피착취 국가라는 데에 그들의 理解관계를 같이 한다. 제 3세계의 민족주의는 자기들을 착취하려는 국가에 對해서는 反發力, 抵抗力으로 作用하지만 同一한 처지에 놓인 國家들과는 결속력으로 作動하게 된다. 核무기 등 고도 先進무기를 배경으로 하는 막대한 金力을 가지고 있는 先發資本主義國들이 앉아서 이런 일들을 간과하지는 절대로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힘의 作用은 일시적이고 미봉적일 뿐 항구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 물론 資本主義 경영제도에 對한 代案으로서는 社會主義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사회주의에 필적한 다른 制度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2월 6일 水요일
農民․農村문제의 根本的 解決은 經濟的 문제의 농업문제가 해결되면 된다. 農業문제가 農村에서의 모든 문제의 出發點일 수밖에 없다. 資本主義가 支配하고 있는 國家經濟的 상황에서의 農業은 결국 資本制化 하지 않으면 안된다.
小農문제의 정확한 인식이 해결방법을 스스로 제시한다.
한국 農村. 답답하고 寒心하다.
農民分解, 小農, 農業노동자, 資本制化, 대규모 경작, 기계화, 이윤추구, 生産性.
땅에 얽매여 사는 상태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까지 低노임 노동자 공급자 겸 저가격 농산물 공급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선 小作制의 철저한 철폐가 있어야 한다.
農産物 가격이 적정한 이윤보장 수준에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모든 生活태도에서 봉건적, 권위주의적 폐쇄적인 것들을 불식하고 近代的 民主主義的, 開放的으로 되어져야 한다.
農業生産方式은 資本制化 되어야 하고 이는 점차 社會的 生産으로 轉換되어야 한다. 小農的 生産수단 소유자, 단순 상품 생산자에 安住하는 태도를 털어버려야 한다. 부의 균등한 분배가 전제되어야 한다.
農民, 우선 가까운 힘 닿는 일부터 시작해서.
12월 7일 목요일
韓國農村.
誠實하다는 것.
희영.
12월 8일 금요일
오랜만의 金曜기도회.
할아버지, 이 목사, 문 박사님.
湖南 農民歌, 甲午農民革命歌
三南 農民들
희영, 보고 싶다.
아버지 하나님.
이 밤 다시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기도 시작합니다.
당신께서 이미 익히 보아 아시고 함께 하시는 우리 농민들에게
당신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끝끝내 우리 형제 농민들 버리지 마시옵고 그들의 고난 받음에
당신께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왜 가난한지 조차도 모르고 왜 착취당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그들을 당신의 따뜻하신 손으로 어루만져 주소서.
당신의 그 크신 힘과 영광을 우리 형제 농민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이 힘을 잃지 아니하게 당신께서 붙들어 주소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당신의 모습이 깨뜨려져가고 있는 우리 형제 농민들에게 빛이며 진리이신 당신께서 그들에게 밝음을 주소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행하다가 고난받고 있는 여러 형제들에게도 당신께서 함께 하셔서 이 추운 겨울 몸은 비록 꽁꽁 얼어붙을 만치 춥더라도 마음만이라도 항상 훈훈하게 있을 수 있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하기로 작정한 여러 형제들에게는 당신께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그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게 되더라도 당신과 함께 그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겨레,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당신께서 그 놀라우신 힘을 보여 주소서….
그리고 특별히 당신에 충실한 종 희영이에게 당신께서 함께 하셔서 그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일을 쉬이 물리치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항상 하셔서 끝까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늦춰지지 아니하도록 당신께서 돌보소서.
이 모든 것 온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하옵고 기도 드립니다. 아멘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는 주의 말씀이니라.
희영아, 잘자라. 내일 시험 잘 봐라.
12월 12일 화요일
人間, 人性
動物的 慾望
주여, 제게 힘을 주소서. 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당신께서 주신 인간에 대한 사랑함 끝끝내 고집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당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좋은 만남들 끝끝내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제게 깨끗함과 순수함을 허락하소서.
克己, 克己, 克己, 克己, 克己
12월 14일 목요일
오랜만의 귀가
複雜한 世上에서 淸淨劑가 가끔씩 必要할 때가 있다.
마음 탁 풀어 놓을 수 있음이 너무 반갑다.
마음껏 웃어볼 수 있고 가난하지만 즐거울 수 있음이 너무 고맙다. 고마운 만남일 때의 만남.
12 월 15일 금요일
어쩌다가 내가 仁川까지 흘러와서 여관에 묵고 있는가.
정신차려라, 의기야.
정신차려라, 의기야.
희영아, 미안하다. 내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내가 이러해서 너무 未安하다. 우리 희영아.
많이 슬프다. 너무 많이 슬프다.
人間을 믿지 않고 돈을 믿는 世上, 개판도 이만저만 개판이 아니다.
우리 희영아.
우리 희영아. 사랑하는 희영아.
仁川. 지금 여기는 仁川이다. 世上 슬픈 仁川이다. 世上 슬픈 조선이다.
세상 슬픈 한국이다.
우리 희영아. 사랑하는 희영아.
Humanization. Humanity. Human.
喜英아. 喜英아, 喜英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건 너무했다.
어떠한가.
喜英아, 未安하다. 이건 너무했다.
12월 16일 토요일
집
그리 따뜻하지도 않고 그리 안락하지도 아니하지만
날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부모형제가 있는 집.
그런데로 便安한 房이 있고 아랫목이 있고.
九老洞과 馬場洞
촌놈―나까지 포함해서―들에게 너무 했다. 정말 너무들 했다.
참기 너무 어렵다. 쌀 한 가마 팔 때마다 만 오천원씩 손해 보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해도 너무한다.
그러면서 막대한 양의 외곡 도입까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하는 짓이다. 곡식뿐 아니고 고기와 양념마저도.
우리 農民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양적 축적은 질적변화를 일으킨다. 불만과 불안의 누적은 결국 革命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들아.
우리 농사꾼들 농민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제멋대로 다루지 마라.
이 놈들아. 이 망할 놈들아.
농민들이 죽창을 다듬고 있다.
79년 2월 1일 춥다.
어제 눈 오고 오늘은 많이 춥다.
너무 오랜만에 日記 써 본다. 별 일은 없는 것 같은데도 바쁘다.
사람 만나느라 바쁘고, 선교 교육 대회는 마음만 바쁘고.
농민운동. 학생운동. 운동 Movement
희영아, 고운 꿈 꾸면서 잘 자라.
2월 2일
생각들, 政治, 民主主義, 人民主權.
現在의 예수쟁이 Style을 철저히 否定하는 데서 최선의 방법이 나올 수 있을 게다. 지금 같은 극단의 상태에선. 구조적 모순.
모순이 응결된 모든 힘이 集結되어야 할 곳
人間化
運動, 동기, 확신, 眞理.
옳음.
秘密
사랑하는 거.
희영
2월 9일 금요일 달 밝다.
弱해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자.
JESUS CHRIST 힘을 주소서.
몸은 바빠도 마음은 결코 바쁘지 말자.
農村, 農民, 革命.
近代史
社會思想史
經濟史
學生運動
끝끝내 배우면서 일하는 태도를 고집하자.,
힘을 주소서. 힘을 주소서.
내 能力이 어느 정도인가, 나는 어느 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나.
人間化
인간, 사람다움이라는게 뭐냐, 사람스러운게 어떤건가.
술, 왕창, 이빠이, 해롱해롱.
희영. 未安스러움.
잘자라. 내 사랑하는 이야, 고운 꿈 꾸면서.
2월 10일
良心的으로 살고 싶다.
眞實되게 살고 싶다. 전혀 邪가 끼이지 아니하고.
왜 나를 그냥 놔두지 아니 하는가.
眞實되어 良心에 따라 살고 싶다.
世上 너무 많이 슬프다. 사는 게 너무 많이 슬프다.
희영. 警. 희영아.
세상살기 참 슬프다.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自由 오! 자유
2월 12일 월요일
희영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걸까
글로 쓴다는 그 자체가 꺼려진다.
狀況
어찌갈꺼나 어찌갈꺼나
歷史에 대해 良心 부끄럽지 않게
2월 15일 목요일
西方 八面에 모든 것이 나를 죈다.
답답. 숨통 트일 곳
利用價値
이용가치. 基盤
學校, 校外. 敎會
眞正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人間化를 외치는 곳 自體에서 非人間化가 이미 始作되고 있다. 이런 方法으로써도 眞正한 人間革命이 可能한가.
意識化 , 人間化
어떤 한 인간을 人格體로서 인정하지 않고 客體로서나 조작 가능한 것으로 보고 대상화 하는 데에서도 인간화가 가능한가.
利用가치가 있는 限에 있어서만 그가 必要하다고 할 때.
利用가치가 없어지고 말면?
도태, 소외, 밀려남
人間과 眞理를 위한 싸움.
사랑하는 이가 있는 한.
“不安定” “不完” 허공에 붕 뜬.
비빌 언덕 발 붙일 땅아 있어라. 그도 결국 내가 만들지 않으면 아무 데도 없을 것 아닌가.
내 목구멍.
社會科學이 밥 맥여 주지 않는다.
아가리로 떠드는 理想이며 運動이며가 밥 멕여 주지 않는다.
내 밥 내가 찾아 먹지 않으면 아무도 밥 멕여 주지 않는다.
희영아.
답답하다. 한심하다.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희영아. 잘자라.
2월 24일
희영아, 이 밤 저녁 또다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뭘 하여야 한다는 걸 아는 게 무섭고 두렵다. 운동이며 革命이며 ..... 사랑한다. 희영아 내가 받아야 할 잔이 아니라면 도망치고 싶다. 整理를 하나씩 해나갈 필요가 있다. 내가 당장 없어진대도 달라지는건 아무 것도 없게 되기 爲해서라도.
희영아.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라는 걸. 보고 싶다.
주여, 이 깊은 밤에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사랑하는 주여.
제게 제가 하여야 할 일을 가르쳐 주소서. 제게 확신과 힘을 주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 희영에게
당신의 은총이 가득하게 하소서.
2월 25일 일요일 밤
희영아, 사랑한다. 世上, 세상 너무 한심하다. 살기 너무 슬프다.
내가 주체적으로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던 게 전혀 한심한 오해이고 착각임이었을 때.
세상 너무 무섭고 살벌하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희영아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희영아
비빌 언덕은 어디에 있나
눈둘 하늘은 어디에 있나
사랑할 사람은 어디에 있나
絶望, 굽은 등, 비빌 언덕
희영아
굽은 등. 굽은 등
희영아, 우리 희영아
너 보기 너무 미안스럽고 寒心하다.
볼 資格조차 없는 건데.
世上
우리 희영아. 우리 희영아.
2월 28일 수요일
主體
내가 나의 主人이지 않으면 안된다.
논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과학은 과학이고 이론에 불과하다.
과학은 결코 人間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人間. 내가 나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된다.
人間이 社會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싸우는 이유는 진리를 위해서 옮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이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속박하고 얽어매고 누르는 모든 사회, 제도, 인간 이 모든 것들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인간을 위해서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것의 이유가 될 수 없다.
人間愛가 기반이 되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껍데기를 붙잡고 날뛰는 것일 뿐이다.
人間이 제거되고 사랑이 빠져 있는 세상에서는 모두는 미쳐 날 뛸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인간은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그 自體가 바로 目的이다 主義니 이즘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모든 것은 그 自體 결코 目的으로 될 수 없다.
사람이 보다 더 사람스럽게 살 수 있는 世上.
그것만이 眞實이다.
人間 至上, 사람이 보다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世上을 위한 싸움만이 聖戰이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기반하지 않은 어떠한 이에 대항한 싸움도 허구이다. 가짜이다.
資本主義의 모순이 첨예화되어 있더라도 투쟁의 목적은 오로지 그 모순에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에 두어야만 한다. 소박한 자유주의자로 머물러서는 결코 아니 된다. 어떤 世上, 어떤 사회에서도 人間愛에 기반을 둔 싸움은 계속되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그 때서야 비로소 문제의 핵심에 대한 도전은 시작될 수 있다.
3월 2일 금요일
많은 일들에 자신이 없어진다.
막상 닥쳐 있는 몇 가지 일들
희영아, 희영아
지금까지 내가 알아 왔던 앎이 內部로부터 허물어짐, 내가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있나?
희영아 時間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한도에서 하나하나 정리해나가는 일이 必要.
아버지 하나님 믿습니다.
자! 시작
3월 8일 목요일
희영아.
人間, 社會, 心理, 文化, 人類, 科學. 왜?
왜? 무엇인가? 무엇 때문인가? science, what? ??
사랑.
인간과 인간과.
사회, 세상.
투쟁, 싸움, 갈등, 모순.
사랑, 희영아 사랑한다.
3월 9일 금요일
이 저녁 술 한잔했다. 머리가 알딸딸하다. 글자가 잘 안 써지는 듯한 기분 느낀다. AMEN. 희영아. 슬픈 世上.
유토피아, 아무 데도 없는 곳.
UTOPIA, UTOPIA, UTOPIA
살며 사랑하며 하는 世上.
오로지 ONLY LOVE
3월 16일 바람 분다.
며칠 간 술을 좀 했더니 몸이 견뎌내질 못한다.
정신조차 어릿어릿하다.
희영 덕에 많이 부지런해진다. 지금 환자들 틈에서 시달리고 있겠지 싶으면 나의 안일하고 싶어함이 자꾸 채찍질되어진다.
뭔가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4학년이면.
學生運動의 LEADER 役割을 감당해나가지 않으면 안될꺼고.
돈이나 권력을 가진 놈들이나 그들에 붙어먹는 亞流들이나 기회주의자들에게 감정 次元에서 깊은 중오감이 자꾸 느껴진다. 모조리 깨부숴버리고 샅샅이 제거해내지 않으면 안될꺼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들이 자꾸 든다. 모조리 때려 죽여야 한다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말까지도 요즘 아주 거칠어져 있다.
욕이 입에 붙어다닌다. 正常軌는 좀 벗어난 것 같다.
小英雄心의 克服, 最善의 方法論의 모색.
善한 意志와 冷徹한 理性, 維持시킬 勇氣.
歷史와 民族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하늘 앞에 떳떳하게 行動하면된다. 하늘 꼿꼿이 서서 응시하면서 대결. 참 眞實과 眞理와 義 . 희영아, 나 잘래. 잘 자라.
3월 17일 토요일
내일은 희영이 보는 날
錦江
별 생각없이 일들을 벌여 놓고
寒心한 생각이 앞선다.
3월 23일 금요일
비 온다. 비 제법 온다.
비 오는 소리 좀 가까이 듣고 싶어서 창을 열어 놓고.
희영아. 보고 싶다.
희영이는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비가 조금 가늘어졌나 보다.
저녁 무렵 어두어져가는 걸 학교 라운지 창을 내다보면서 생각하던 거.
희영이는 내게 무엇인가?
친구? 아니!
애인? 아니!
희영이는 희영이다. 어떤 단어로써도 형용될 수 없는 그 자체.
희영아! 우리 희영아.
3월 27일 화요일
原始社會에서부터의 人類史의 整理. 經濟史 공부를 다시 정리하려다가 發見한 새로운 것들의 만남이 너무 반갑다. 문제의 핵심인 分業과 계급분화와 이에 合理的이지 못하게 생산물이 소유가 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不平等의 문제.
“권리와 재산의 불평등”
∙ 많은 문제들의 깊은 뿌리
∙ 더 많이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 經濟史와 文化人類學과 先史時代史와 文化史 등
∙ 世上을 보는 눈의 再發明, 人間 문제의 核心, 사회문제의 뿌리
歷史, 人間史, 人類史.
게을러지려는 나를 경계
희영 지난 토요일 3월 24일. 가로등. 잔디밭.
싱그러운 머리칼 냄새. KISS. 아름다움.
열심히 한 주일 살고 일주일 뒤에 만나자고.
희영아, 잘 살자. 열심히, 떳떳하게,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른 人들의 눈쯤이야 다음다음 문제.
4월 5일
일기를 참 오랜만에 써보는 듯하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길래.
熱心히 살아야지, 사람보기를 하늘 보듯이.
사람 우러르길 하늘 우러르듯이
기댈 언덕을 찾기 전에 눈 둘 하늘을 찾아야 하고 디딜 땅을 찾아야 한다.
내 할 일이 아직 쌓이고 쌓여 있는 지금 여기서 개비는 일은 내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답답함 느끼는 것은 내 분에 넘치는 호사이다.
지금은 답답함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내 할 일을 해나가야 할 때이다. 느끼는 것을 할 만큼 난 한가할 수가 없다.
답답한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모조리 다 운수 사나운 탓이라고 돌리는 사람이 이 땅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피로함 느끼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피곤함 느끼기엔 난 아직 너무 젊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아무곳에도 눈돌리지 않고 힘 흐트리지 않고 내가 산 만큼 내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世上살이는 그렇게 寒心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가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한심할 리가 없다.
이 세상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내가 할 일은 世上에 맞아지게 날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내게 맞게 맞추는 일이다.
힘이 必要하다.
힘. 힘.
내가 빼지 아니하는 한 힘이 제 스스로 빠질 턱이 없다.
이 좋은 봄날 내가 축 쳐져 있기에는 너무 안 어울린다. 두 평도 못되는 감옥속에서 나를 바라고 사는 同志들과 친구들이 있는 한 난 한심해질수도 호사스러울 수도 없다.
감옥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덤은 깨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부숴져야 하고 무덤은 무덤이기 때문에 깨쳐져야 한다.
더운 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너무 안 어울린다.
革命은 革命이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끝끝내 이뤄지고 또 이뤄지고 또 이뤄지고 또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革命이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한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왜 두려워 하는가.
맑은 하늘 우러르길 왜 꺼려하는가. 알몸으로 하늘과 맞대면 하는 걸 두려워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全身에 힘이 솟구쳐서 내 조그마한 몸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서 내 머리를 뚫고 내 가슴을 뚫고 하늘 끝까지 뚫고.
自由! 平等! 平和! 사람답게 살기! 革命! 사랑!
再生, 復活, 自由, 絶對自由, 鬪爭, 革命, 永久革命, 사랑.
열심히 살기
약해지지 아니하기
꺾이지 아니하기
죽어서 살지 아니하기
꿈을 잃지 아니하기
사람으로 살기
누가 나를 꺾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스스로 꺾이지 않는 한.
힘!
힘!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기
깨어서 살기
두 눈 똑바로 뜨고 정신 바짝 차려서 살기
죽음 두려워 않고 살기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살기
후회 절대로 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기
후회하기 없기
1초도 헛시간 보내기 없기
열심히 사랑하기. 열심히 열심히.
4월 7일 토요일 비 온다.
문제는 만남들에 대한 재 검토가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함 느끼게 되는 데에는 모임으로 만남과 개인적으로 만남과 모두가.
엉성하게라도 관련가져온 많은 것들에 대한 재검토가 必要.
喜英 열심히 살자.
4월 11일
運動이 革命이 그 自體가 生活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는 거 따로 운동 따로는 엉성해질 도리밖에 없다.
통째로 내 生活이 되어야 한다.
生活이 삶이 절대 거짓스러울 수 없듯이, 운동도 절대 거짓스러울 수, 형식적일 수, 껍데기일 수 없다.
運動 그 자체가 삶이라면 온 힘을 바쳐서 열심히 살고
내 삶이 곧 運動을 하는 것이라면 온 힘을 바쳐서 열심히.
구분되어져서는 안된다. 完全히 同一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운동에 내가 끌려다녀서는 안된다. 내삶 그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겠지…….
희영아
사랑한다. 속 터지게 외치고 싶음. 사랑한다.
혁명과 사랑과 아름답게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보고싶다……. 희영아, 손을 다오.
사랑을 사랑함을
내 삶의 모든 것들이 이 둘로 귀착되지 않으면 안된다.
열심히 산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없다.
절대로 낭만적일 수는 없다. 단순히 감상적일 수는 없다. 삶은 장난이 아니다.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가장 열심히.
警 ! 소 영웅主義
보고 싶다. 희영아 내 사랑하는 이야.
4월 18일
來日이 4․19
理論的으로 철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피상적, 감정적, 비판이 아닌 논리적 체계적 비판과 합리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經濟發展과 後進國의 문제, 史學과 文化人類學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다져지는 經濟史, 理論 經濟學的 논의를 충분히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經濟史, 구구한 現實해석에 대해 명백히 밝혀지게 할 수 있는 社會學. 억지스러워서는 안된다.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문제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무시하거나 해선 안된다.
歷史를 단순히 피상적으로 내 구미에 맞도록만 이해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事實을 事實 그대로 볼 수 있게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일할 것도 너무 많고
네 개의 모임. 공부. 사람 만나서 얘기하기.
時間을 더 더욱 쪼개서 써야겠다. 낭비하는 시간이 없게 現實에 기반을 두는 디딜 확실한 땅이 있을 때.
“韓國”
주여 이 나라를 보살피소서.
확실한 논리, 고도의 기술적 방법론, 확고한 신념, 용기, 인내, 그리고 사랑. 비빌 언덕은 아무 데도 없다. 모든 일은 내 책임下에서 내가 해나갈 수밖에 없다.
후진국
경제발전론
神.
人類史, 歷史, 經濟史
社會學, 社會心理學
우선과 나중이 있을 수 없다. 살며 사랑하며 일하며 공부하며
Action And Reflection
Action And Reflection
喜英, 喜英, 喜英.
끝끝내 싸우기를 고집하기.
분노 끝끝내 간직하기
문제의 根本的 해결!
革命, 革命
거리에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골 처박고
오늘 밤 꿈엔 희영이를 봤으면 좋겠다. 끝까지 꺾이지 않게 붙들어 주는 사랑하는 이야. 神은 나에게 힘을 주려고 우리 희영이를 내게 데려다 주었나 보다.
4월 20일
편지: 희영한테
싸움의 땅에서 한 발자욱도 되물러설 수 없다. 항상 싸우며 바로 그 싸움이 내 삶으로 되며 그렇게 사는 삶.
잠시의 편안함을 거부하는 자세로써 내 진실을 채찍질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대강 정리들 좀 했다. 이 Note도 정리할 것 중에 하나인데, 마지막 남은 내 이야기 써놓은 것
이 것까지도 없애버리고 싶음을 애써 참은 게 잘한 건지 그 반대인지 지금은 모르겠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람들에 이어서 양 선생님, 박현채 선생님도 붙잡혀 들어가고 불은 나한테 가까운 쪽으로 붙어온다. 딴에는 조심하느라고 했는데 언제 나까지 그 불에 휩싸일지 짐작도 못하겠다. 그건 그 거고, 살 때까진 열심히 살아야지. 이제부터는 글 쓸 기회가 없겠지. 고등학교 때 친구한테서 온 편지말고는 모조리 없앴다. 그것도 없애야 하겠지만.
絶對孤島에 선 듯함 가끔씩 느낀다.
우리 희영이를 생각하면 이내 사라져 버리지만.
희영아. 사랑한다.
이 Note도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살 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한가해지면 쓰고 쓴 것도 내 얘기 제대로 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세상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바로 이 어려워지는 것과 싸우려는데도 일이 점차 더 많아지고, 많은 이들이 얘기하는 “이런 상황”이라는 전제를 하는 바로 그것과 싸우려는.
어떻게 되든 우리 희영이 만은 날 믿을 것이라는 바로 그 한 믿음이 큰 힘이 된다. 내가 옳다는 믿음이 내게 남아있는 한 절대로 꺾이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장래의 일은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라.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든 넌 지금 너 살아가는 패턴 그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조급할 것도 초조하게 생각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안타까와 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고, 모든 일은 잘 되게 돼 있는 거야. “그건 그거고”라는 말을 항상 되새기면서 세계를 주관하시고 역사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 희영이 곁에 함께 계실꺼니까.
주여, 우리 희영이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여, 제게 힘을 주소서
주여,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사랑의 주여.
잘 자라, 우리 희영아.
4월 20일 밤. 의기.
4월 21일
편지: 희영한테. 또 너에게 편지.
술 한 잔 했다.
엄마가 오늘에서야 내가 뭐 하고 있는지 알았나 보다. 친구한테서 온 편지 태우고 있는거 보고선 “이제야 너가 뭐하는지 알았다.”라고 하시던 말씀…….
農村 모임 오늘 새로 시작했다. 이젠 ○○兄이 해나갈 꺼구. 잘 될거야.
우리 희영이 사진보면서 이 편지 쓰고 있다.
너무 이쁘다. 꼭 껴안아 주고 싶을 만치.
革命, 世上! 不義!
그리고 사랑, 하느님.
하느님, 당신께선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 희영아.
난 이길 꺼다. 결코 이길 꺼다. 절대로 지지 않을 꺼다.
희영아. 내 사랑하는 이야.
슬픔, 슬픈 革命.
희영아. 우리 희영아.
한국농업과 농지 제도 이 글은 1979년 9월 28일자 「서강타임즈」(현 서강학보)에 실린 김열사의 유고이다. 열사의 요청에 따라 서강타임즈 측에서는 필자를 <본사편집부>로 게재하였다.
1.문제제기
최근 들어서 농지법 개정안이 다시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개정안의 골자는 농지소유상한을 현행 3정보 (9천평)에서 8정보 (원안은 10정보)로 확대하고 소작을 허용하겠다는 것, 그리고 농지소유자격을 확대하고 농지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네 번에 걸친 농지법개정안도 이번 시안과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부작용이 크다는 여론에 부딪혀 폐기 되였었다. 정부의 입장은 “농․공간의 균형성장, 영농합리화와 농업 생산력의 증진” 등으로 밝히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급격한 이농현상과 이에 따른 농촌노동부족이라는 것에 크게 자극을 받아서 인 것 같다.
계속 생산비를 밑도는 농산물 가격, 농축산물 수입으로 인한 축산물과 소득작물가격의 하락 그리고 누증되는 농가부채 등으로 이촌농민은 작년에만도 78만 명을 넘어섰다. 부락마다 빈집이 늘고 품값은 등귀하고 일손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농촌일손 부족과 농촌임금상승으로 농업기계화는 불가피하고 현행 농지임대차 관계는 봉건적 소작이 아니므로 농업 기계화나 기업농 육성을 위해서는 농지소유상한선의 완화와 소작금지의 완화가 필요하다고 하여 농지법의 개정을 추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유 상한선의 완화와 소작양성화가 과연 농업생산력의 증진, 농민생활의 향상, 영농의 근대화라는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농지제도는 농업 생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는 것이고 새로운 농지제도는 농업에 관한 제제도의 유기적 연관성을 가질 때에 비로소 효율성을 가지는 것이다. 농지제도만의 개혁으로 농업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리라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견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2.한국 농지제도의 전개과정
1949년에 제정된 농지개혁법은 사회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식민성지주적 토지소유라는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한국농업의 근대적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해 토지소유의 상한선 (3정보)제정, 소작금지, 비농민의 토지소유금지 등으로 자작농창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완전한 농지분배와 진행과정의 무리, 농업생산 지지기반의 미비로 이 목적은 실패하고 말았고, 과중한 농민담세와 외국농산물의 도입은 자유로운 농업발전의 장애요소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저농산물가격에 의해 지지되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몇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에 있어서의 농민소외는 생산확대나 기계도입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 등장했다. 농경련의 조사에 따르면 1977년 현재 총농가의 36.1%가 소작농가이고 전체 경지면적의 16.5%가 소작지임이 밝혀졌고 1정보 미만 소유농가는 전 농가의 67%에 이르고 있는데 2정보 이상 소유농가는 6%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생산력은 그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포함한 농업전반에 걸친 제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3. 농지법 개정시안의 문제점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위해서는 영농기계화나 기업농의 필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어떤 제도가 시대적 여건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와 지역에 타당하다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서 영농기계화나 기업농으로의 발전이 지연된 것은 상한선에 얽매였기 때문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농업수익 보장문제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농정 빈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3정보 상한의 현 상황에서 2정보 미만 소유 농가가 전 농가의 93%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잘 증명해 준다.
농업에서 수익이 보장되지 못하는 현재의 농산물 가격체계나 농산물 유통체제와 농업생산기반의 부재에는 현 상황에서 상한선만 확대된다고 기업농경영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인지, 토지가격의 10%에 불과한 토지임차료 (농수산부 농산물생산비 자료근거)와 현행 금리수준인 18%와 비교하면 과연 정당한 이윤(내지 지대)동기는 토지투자가 이루어 질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 농민의 토지소유가 현재의 상한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유상한선을 확대한다는 것은 영세농의 영세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대량이농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농민들의 전업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마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또 현재 도시근교나 고속도로변의 농지가격이 수익성을 훨씬 웃돌고 있음을 상기할 때 비농민의 투기 대형화 우려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소작양성화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 현행 농지임대차 관계가 현상적으로 봉건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를 근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논리상의 비약이다. 우리나라의 현행형태는 소농적 차지농이라는 과도기적 단계이고 이는 결코 근대적 성격의 임대차관계가 아니다. 이러한 것은 농업생산력 발전에는 장애요소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농업생산력 증진이라는 목표와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다.
농지위원회의 권한강화도 이른바 “농민의 민주적 역량이 부족해서”농민의 자주적 협동조직인 농협의 임원마저도 임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현 상황과 관련시켜 보면, 만약 농민과 정책당국과의 입장이 상반될 때 농지위원회가 과연 농민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적자영농이나 농민이동의 원인을 토지제도상의 문제 때문만으로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발상으로 볼 수 있다. 현 농산 가격 정책이나 농정부재의 상황에서 비롯된 바가 그 핵심적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이의 개혁을 위한 새로운 정책제시 없이 농지 문제만을 거론한다는 것은 본래의 의도되는 상반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농지개혁법, 농지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 등에서 상한선 제한, 비농민 토지소유금지, 농지타용도사용금지 등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도시자본의 토지투기와 소작은 계속 확대되어 왔다. 이는 바로 농전실패의 한 단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소유상한선의 완화나 소작농 양성화는 결코 실패한 농정의 효과적인 치유책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4.문제해결방안모색
우리가 토지소유상한의 확대나 소작양성화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소농우원론이나 소농온존론의 입장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하에서 농업발전은 대경영의 길을 모색함으로써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농업의 현 상황에서 농지소유상한선의 완화나 소작양성화등의 농지제도의 개혁만을 통해서 농업생산력 정체화요인을 없애고 영농의 합리화를 도모하겠다는 논리에는 아무래도 수긍이 되지 않는 많은 의문이 있다. 농지 상한선의 완화는 농업에서 수익보장이 되어 농지상한선이 더 많은 수익을 위한 대규모 영농에 장애가 된다는 농민적 요구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타당할 수가 있다.
결국 현재의 농업생산력의 정체라는 것은 농산물의 수익보장이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농업정책, 농협의 효율적 이용, 기타 농업생산지지 기반의 확충 등 농업과 관련된 제제도의 전반적 개혁으로써만 그 해소가 가능해 질 것이지 농지제도의 개편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토기투기로 인한 농지잠식이나, 농업생산력 정체의 한 원인으로서의 농지문제 등에 대응할 새로운 대책의 수립을 전제로 하였을 때에만 본 농지법 개정시안이 본래 의도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완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농지상한선의 완화나 소작양성화가 당면 농업문제를 해결하고 영농의 근대화․합리화와 농업생산력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차제에 농산물 가격보장이나 농산물 유통구조의 개선, 농협의 본래 목적으로의 환원, 그리고 농민적 요구로서의 농지제도의 합리적 개편 등 제도의 제제도의 종합적인 개편을 통해서 진정한 농업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장기적 경제안정과 성장의 기반으로서의 농업을 살리는 정책이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과 김의기열사
산천의 신록이 푸르름으로 물들어 가는 5월이 돌아오면,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김의기 열사의 피맺힌 외침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의 피를 끓게 한다.
군사독재에 의해 18년 동안 얼어붙었던 이 땅에 민주주의가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던 1980년 서울의 봄은 포악한 매판군사독재집단의 군화 발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러나 이러한 매판군사독재 집단의 폭압에 대한 민중의 항거가 마침내 광주에서 폭발했다.
‘군부통치 결사 반대’ 라는 기치를 내걸고 처절하게 싸웠던 광주민중항쟁은 일단 매판군사독재집단의 잔인한 피의 살육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분할․착취하고 있는 거대 독점자본의 대리자인 미행정부의 묵인 하에 이미 퇴색해버린 냉전체제의 부산물인 안보논리를 내세워 동족을 부인하는 반민족적․반민중적․반민주적인 동족살인극을 벌였다.
동족의 군대에 의해 동족이 처참하게 난자 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의기 열사는 입이 있으나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광주의 참상을 직접 선봉에 서서 알리려 했다. 김의기 열사는 총칼의 시위 앞에서 웅크러들기만 했던 서울시민에게 동족의 비극을 폭로하여, 서울시민으로 하여금 민족적 분노를 불러 일으키도록 하려 했다. 김의기 열사는 서울시민에게 패배주의와 기회주의를 극복하고 동족을 살인하는 자를 처단하는 역사적인 투쟁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려 했다.
매판군사독재집단에 의해 자행된 민족의 위기를 구하고자 생사를 무릅쓰고 앞장선 김의기 열사의 장거는 오늘날 광주민중항쟁과 더불어 2천여 광주시민의 피를 뒤집어쓰고 들어선 현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족․민중․민주 운동의 귀감이 될 것이다. 특히 극악한 탄압책을 위장하고 있는 유화국면 하에서 “입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바른 길을 향해 몸으로 일해나가야 될 것이다. ” 는 그분의 강렬한 외침은 투쟁의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 광주민중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
M16을 꼬나 쥔 공수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시가지를 진군해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외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잘려진 어느 소녀의 머리채를 휘돌리며 희죽희죽 웃기도 하며 지나간다. ………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 “광주시민 70%는 죽여라” 라고 외치며 그들은 대검과 철봉을 마구 휘두른다. 어지럽게 달아나는 시민들이 등에 대검이 꽂히고, 개머리판에 골통이 깨진다.
누군가의 목숨이 날아가는 비명소리, 고막을 찌르는 M16소리, 드르륵 콩볶는 LMG소리 등이 어우러져 아비규환을 이룬다. …골통이 짓뭉개져 뒹구는 시체, 터진 창자를 움켜지고 웅크리고 있는 시체, 선혈이 낭자한 채 잘려진 유방을 움켜쥔 시체, 시퍼런 두 눈을 부릅뜬 채 담벼락에 기대여 있는 시체, …속이 메슥거리는 피비린내, 아스팔트 위를 흥건하게 적신 피, 피, 피.…………
이러한 살육장면이 바로 21세기의 장미빛 지상천국을 외치고 있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했던 동족살인극의 일부이다. 현재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소수 정치군인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소집된 민족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의무인 국토방위를 내팽개친 채 자신의 뿌리인 동족을 살육하러 나섰던 것이다. 이 얼마나 반민족적․반민주적․반민중적인 만행인가.
5년이 지난 지금 이 비극적 사실을 되뇌이기만 해서는 안되다. 단지 사건 자체를 폭로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이제는 광주민중항쟁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를 밝혀 처단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는가? 왜 서울의 봄 이후 광주에서만 민중항쟁이 일어났는가?, 왜 자랑스런 대한의 군대가 동족살인에 동원되었는가? 누가 이 만행을 주도했는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은 왜 광주데모를 진압하는 데에 사용할 목적으로 한국군에게 4개 대대를 풀어주었는가? 왜 우리는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넘겨주었고, 미국은 한 나라의 생명선인 작전지휘권을 남용했는가?
그렇다면 진정, 미국은 우리의 우방인가? 미국의 민중은 이러한 미행정부의 야만적인 결정에 동의했는가? 등의 물음에 대답이 주어져야만 한다.
지금 우리들은 이들 물음 중 몇 가지에 대해 답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답이 보다 근본적이고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첫째, 80년대에 한반도의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게 된 정치 경제적인 원인을 규명해야만 되고, 그 원인이 국내․외의 어떤 조건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밝혀내야만 된다. 나아가 광주학살의 비극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전운동권이 인식하고,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주요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반성해야만 한다.
둘째, 서울의 봄 이후 광주민중항쟁까지 전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광주민중항쟁 자체는 어떻게 발전해 갔는가를 규명해야만 하고 동시에 이 항쟁에 참여했던 각계 층의 요구조건과 그것을 실천에 옮긴 양태를 분석하여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을 규정해야만 된다.
이들 두 요인을 명확히 규명해야 비로소 모든 운동은 올바른 정치투쟁노선을 확립할 수 있고, 이 노선에 따라 전운동권은 통일적으로 투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제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로서 모든 운동의 전략․전술과 결부된 과제이다. 또한 광주사태와 미국과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내어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될 것이다.
또한 자국의 독점자본을 바탕으로 경제적․군사적으로 신 식민지화한 미국가독점자본은 국내의 매판자본과 결탁하여 우리나라의 민중을 이중적으로 착취하고 있으며, 미국가독점자본은 신 식민지의 존속과 근로대중의 이중적인 착취를 온존하기 위해 그들의 대리통치세력인 매판군사독재집단으로 하여금 독재와 폭력을 사용하도록 사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직시해야만 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된다.
예속자본, 매판관료, 반동군부독재집단 등의 한쪽과 노동자, 농민, 학생, 근본적 지식인 등의 다른 쪽이 전선을 이루어 대치하고 있는 현 국면에서 적대적 측면에서는 예속자본, 매판관료, 반동군부독재집단 등의 반민족적․반민중적․반민주적인 작태를 폭로하고 이들 적대자들을 지원하는 미국의 흉계를 폭로하여 적대자측의 약한 고리를 타파해 나아가면서 그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 약한 고리가 바로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이고, 적대자군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여주었던 위대한 민중의 힘이다. 1980년 5월 30일 적대자측의 약한 고리인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하고, 적대자측의 흉계에 마지막 철퇴를 가할 것을 서울시민에게 호소하였던 김의기열사의 장거는 민족․민중․민주적 투쟁의 가장 올바른 길을 제일 먼저 제시했던 위대한 사건이다.
가장 앞서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 책임자인 매판군사독재집단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던 김의기 열사는 민족․민중․민주적 투쟁의 뛰어난 화신이다. 현 군사독재정권을 몰락시키고, 민족의 통일과 민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만 될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중요한 과제와 함께 김의기 열사의 강렬한 외침을 깊이 명심해야만 될 것이다.
2. 김의기 열사 죽음의 의미와 진상
①김의기 열사 추락사의 진상
광주민중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직후 전국은 살인마 군사독재집단의 쇠사슬 하에 침묵이 강요되었다. 특히 중심부 서울에서는 비상계엄 하에서 자행된 동족살인극이 유포되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군사독재집단의 쇠사슬이 이중삼중으로 둘러처졌다. 비상계엄군이 서울의 요소요소를 점거하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것조차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저해사범을 색출한다며 민주인사를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불신검문을 강화했으며, 폭력사범은 일련의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잡아들여 정화교육을 받게 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도 서울역에서 모이자, 파고다공원 앞에서 모이자 등 광주사태의 진상을 서울시민에게 폭로하기 위한 가두시위 계획이 있었으나, 살벌한 경계망을 뚫고 사람들이 모일 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살벌한 상황에서도 광주학살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이 여기저기에서 나돌았으나 폭력의 위압 앞에 분위기는 점점 침잠해 갔다. 그런 분위기에서 김의기 열사는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보아 자신이 목격한 이 어마어마한 동족살인의 민족적 비극을 알리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김의기 열사는 새로 정권을 장악해가고 있는 소수 정치군인들의 반동화와 유신잔당에 대해 최후의 철퇴를 가하기 위해 서울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김열사는 서울의 봄에서 보여주었던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꺼져가자 이 열기에 다시 불을 붙이려 했다.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에서 정기적으로 가져왔던 금요기도회를 이용하여 광주학살의 참상을 포골하기로 했다. 기독교회관 주변은 이전에도 자주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있었으므로 다른 곳보다 훨씬 삼엄했으며, 당일에는 사전에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만일의 사태를 위해 일반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김의기 열사는 금요기도회는 취소되었지만, 시위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모인 진정한 운동인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작정했던 김의기 열사는 12시경에 기독교회관에 들어갔다. 준비과정에서 조차 희생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실무적인 일을 혼자서 다 했다. 6층 ○○○방에 들어가 사전 양해를 구하고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 쳐서 인쇄했다. 여기까지는 확인된 얘기이다.
그러나 김의기 열사가 죽을 당시의 정확한 정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러 사람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제작하고 있었던 광경이 무엇인가를 사전에 알고 올라온 계엄군에게 발견되었고, 그들은 김의기열사를 잡으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때 김의기 열사는 계엄군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반항을 했으며, 반항하면서 여기저기에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때 힘의 열세로 인해 계속 한쪽 구석으로 몰렸고, 밀리는 중에 헛발을 디뎌 6층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이 길바닥에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상점주인들이 “앗 사람이 떨어졌다.” 라고 소리쳤다. 바로 그때 밖에서 겹겹이 지키고 있었던 계엄군이 사람의 접근을 막고 김의기 열사를 즉각 가마니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하고, 앰블런스를 불러 시신을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이때가 오후 5시경이었으며, 이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 이후 김의기 열사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 채 “시위를 모의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계엄군에게 반항하던 중 실족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다음날 가족이 시신을 확인했고 6월 2일 일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②누가 김의기 열사를 죽였나?
80년 살벌하기만 했던 그 상황에서 누구도 광주사태의 진상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때 분연히 일어나 진실을 외쳤던 그분을 누가 죽음으로서 몰아넣었나? 국민의 안녕을 지켜야 할 군대가 민족을 부정하는 동족살육을 자행했을 때 동포여! 모두 일어나서 이러한 민족의 위기를 구하자고 외쳤던 김의기 열사를 누가 우리의 곁에서 영영 빼앗아갔나?
첫째, 비상계엄 하에서 광주사태의 실상이 퍼져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계엄당국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따라서 그 책임의 소재를 밝혀 책임자를 처단해야만 할 것이다.
죽음에 이르렀던 바로 그 당시의 정황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김의기 열사가 유명을 달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최후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이나 계엄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동안 옆방에 있었던 사람들이 진실을 증언해 준다면 정확한 원인을 밝힐 수 있겠으나 무슨 일인지 증언해 주는 사람도 없고, 알만한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단지 시대의 어려움만을 탓할 수 없는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숨어 있다.
김의기 열사가 시위를 준비하는 동안 만났던 주변의 여러 동료들이 그 당시 느꼈던 느낌을 종합해보고 마지막으로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을 본다면, 분명히 시위를 계획했을 때 죽으려 하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려고 했을 때 가장 사랑했던 동료에게조차 자신의 결심을 말하지 않았을 리 없고, 또한 유인물 내용에서도 알 수있듯이 김의기 열사는 광주사태의 민족적 비극 이후 패배주의의 늪에 빠져있었던 서울의 시민에게 유신잔당과 동족살인극을 서슴없이 벌이고 있는 매판군사독재집단의 숨통을 끊고, 민족의 반역자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역사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 또는 선동하였을 뿐이다. 만약 사전에 죽으려 했다면 적어도 유서 한 장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전혀 없다. 그렇다면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6층의 창문 높이가 ㏐ 가까이 될텐데 어떻게 실족 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실족 사했다는 항간의 소문은 도저히 실상을 밝힐 수 없는 음흉한 음모를 은폐시키기 위해 어느 기관이 유포한 유언비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인가?
사전에 기독교회관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계엄군과 실랑이를 벌였을 때 몇 번 밀고 밀리다 힘의 열세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당했을 것이다. 또한 광주사태의 진상이 서울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지극히 꺼려했던 그때의 험악한 분위기에 비추어 보아 계엄군들은 열사를 상당히 거칠게 다루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몰리다가 순식간에 결정타를 당하여 유명을 달리한 김이기 열사를 추락사로 가장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내던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여러 정황을 종합한 결과로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2천여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계엄군은 능히 그런 일을 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반민족․반민중적․반민주적인 만행인가?
㉡극악한 상태에까지 몰리자 순간적으로 창문에 올라섰다가 추락사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이미 계획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혹독한 고문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하면서 순간적으로 결심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사전에 죽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의기 열사는 매우 급박한 상황에 몰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 어는 경우라도 계엄군에게 책임이 있다. 비록㉡이 사실이라 하더라고 죽지 않으면 안될 급박한 상황을 조성했던 측은 어디까지나 계엄군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계엄군이 지어야 한다. 계엄이 해제된 지금 계엄군이 없어졌다 해도 책임소재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현 군사독재집단이 바로 2천여 동족을 살해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현 군사독재정권이 광주사태의 반민족적 작태의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의기 열사를 죽인 장본인이다. 따라서 광주사태의 책임자와 김의기 열사를 살해한 당사자를 처단하는 것은 바로 현 군사독재집단을 처단하는 것이 됨으로, 우리는 모두 힘을 합쳐 그들을 처단해야만 한다.
둘째,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한 교회운동권은 광주사태를 폭로할 시위에 대해 김의기 열사와 사전에 같이 상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했고 급기야 김의기 열사를 죽게 했다.
교회조직의 폐쇄적인 특수성 때문에 평상시에도 기독교회관에서 시위를 벌이기 위해서는 기독교회관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사전에 의논해야만 가능한데, 그렇데 어려웠던 상황에서 또한 누군가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해야만 된다는 당위가 우세했던 때에 기독교회관의 어느 관계자와 사전에 논의하지 않고 금요기도회를 택하여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하려는 시위를 벌일 수 있었을까? 누가 보아도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앞에 나서는 주동자와 뒤에서 필요한 연락관계를 점검하고 인원동원과 인원의 분배를 책임지는 보조자가 있기 마련인데, 교회운동의 총본산으로 모든 교회권 운동을 관장하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관계자들이 이렇게 중요한 시위를 사전에 문의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김의기 열사는 기독교회관의 어느 관계자와 시위를 사전에 같이 계획했고, 본인은 주동자로 앞에 나서며 관계자의 누군가는 각 교회단체에 금요기도회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이니 인원 동원하도록 사전에 통보했을 것이다. 80년 5월 그 당시에 금요기도회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유포되어 있었음은 그러한 사전적인 작업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가 시위가 있기 바로 전날 (1980년 5월 29일 목요일) 에 금요기도회는 주최측에 의해 취소되었다. 그러나 김의기 열사는 미리 기독교회관에 들어와서 시위 준비를 강행했다. 이 때 김의기열사는 자신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E.Y.C.의 어는 관계자에게 “지금 기독교인은 비겁하다.”라고 말하며 다음에 보자고 악수를 했다 한다. 왜, 그랬을까? 적어도 시위에 대해 사전에 논의했던 관계자중 누군가는 금요기도회가 취소되었고 시위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었던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김의기 열사가 시위를 감행하려는 것을 미리 막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시위가 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회관을 거의 비워놓았었고, 김의기 열사가 감행하는 시위 준비가 사전에 발각되어 검거될 것이라는 위험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또한 김의기 열사가 준비를 하는 도중에 발각되어 계엄군과 서로 실랑이를 벌였던 순간에도 옆에 혹은 옆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기에 전혀 손을 쓰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누구도 말하지 않으니 알 수 없으나, 김의기 열사와 하느님은 알고 계실 것이며, 역사는 이런 사실을 올바르게 평가할 것이다.
금요기도회가 취소되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에 의해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거나, 시위 이후에 올 여파를 교회 자체가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목요일 저녁에 금요기도회 취소결정이 났다면 적어도 이 계획에 관여했던 관계자는 이 결정에 대해 김의기 열사와 상의했어야 했고, 그런 상황을 올바르게 대처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의기 열사와 사전에 시위를 상의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기독교회관의 관계자는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김의기 열사가 “지금 기독교인은 비겁하다.”라고 말했듯이, 교회운동권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금요기도회를 취소했던 것이다. 이런 책임회피는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한 교회운동권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으로 운동의 과정과 내용을 중시하기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기회주의적인 업적주의에서 기인한다.
교회운동권도 운동단체로서 한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극히 자유주의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교회라는 울타리는 좋은 방패막이가 되었으나, 운동이 치열해짐에 따라, 과학적이고 투쟁적이 됨에 따라 교회가 갖는 폐쇄성 때문에 교회운동권은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교회운동권도 운동단체로서 운동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다. 객관적으로 치열한 싸움이 요구되나 교회운동권 자체는 치열한 싸움을 따라 갈 수 없으므로 피해자는 적으나 이름만 크게 나는 업적주의를 선호하게 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교회운동권은 김의기 열사를 책임지지 않으면서 우연히 시위가 성공하면 교회운동의 업적으로 돌리고 실패하면 “어느 양심적은 청년이 금요기도회를 이용하여 시위를 벌이다. 죽어다.”라는 기회주의적인 업적주의의 입장을 보였다. 이런 사실을 막판에 가서야 알았던 김의기 열사는 “지금 기독교인은 비겁하다”라고 말한 게 아닐까? 이런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한 교회운동권의 기회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김의기 열사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지만 광주사태의 실상을 폭로하는 시위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의기 열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결국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한 교회운동권의 기회주의적 업적주의도 김의기 열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하겠다.
셋째, 광주민중항쟁의 실상을 알고도 침묵하고 있었던 80년대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다.
80년 당시 서울에는 동족살인의 일면을 내용으로 하는 무수한 유인물과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여러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용감히 나서서 동족의 비극을 폭로하고 그 책임자였던 매판군사독재집단의 반민족성․반민중성․반민주성을 문책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김의기 열사가 그 짐을 혼자 지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그러한 짐을 지도록 했다. 또한 광주살해의 책임이 매판군사독재집단으로 하여금 그러한 엄청난 작태를 자행하도록 방기한 국민 모두에게 있다면 김의기 열사를 죽게 했던 책임 또한 국민 모두에게 있다.
③김의기 열사의 죽음이 주는 의미
광주민중항쟁은 “단순시위투쟁→폭력투쟁→무장투쟁”과 같이 대중투쟁의 가장 일반적인 길을 따라 발전했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을 중심으로 단순한 가두시위를 계속했으나, 5.18 이후 계엄군의 무차별 대량학살이 시작되자 대중은 그 위대한 투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몸싸움이 치열해지자 노동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익혔던 집단행동은 바로 집단적인 투쟁으로 발전해갔다. 정규군과 같은 훈련된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조직력은 이제까지 자연발생적이고 고립 분산적이었던 투쟁을 체계적인 투쟁이 되게 했다. 이러한 투쟁의 질적 비약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동시에 의식의 비약적 발전을 수반하게 된다. 투쟁뿐만 아니라 의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투쟁의 목표도 보다 근본적인 것에로 발전해 갔다. 계엄군의 동족학살이 잔인해지면 잔인해질수록 광주의 민중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게 된다.
무장된 시민 군을 구성하여 계엄군의 반민족적․반민중적․반민주적 작태에 대항해나갔다. 그러나, 너무 급속하게 발전해갔으므로 대중투쟁의 목표인 공동의 이해를 확보해 가지 못했다.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의 힘으로 묶어낼 공동의 이해가 확립되지 못함에 따라, 내부 구성원의 다양한 욕구에 따라 크게 강․온파로 나뉘어졌고, 기회주의적인 협상파의 과오에 의해 공수부대의 정예군에게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은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우쳐주었다. 변화를 위한 투쟁은 힘을 바탕으로 해야지 힘이 없는 투쟁은 말만의 투쟁일 뿐이다. 이 힘은 바로 대중을 개반으로 한 조직체 속에서 나온다. 따라서 모든 운동은 거대한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려 끊임없이 대중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대중의 공동의 이해를 확립하여 이러한 공동의 이해를 기반으로 세계적이고 과학적인 조직을 확대 재생산하여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야만 한다.
대중운동이 올바른 궤도를 따라 발전에 나가고 대중의 힘을 모으기 위한 조직운동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첫째 현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문제의 근본적인 법칙성을 찾아내어 운동의 목표를 정확히 수립하여야 하는 것과, 둘째, 이 운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근본적인 법칙성에 따른 원칙에 입각하여 방법을 수립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의 목표와 원칙은 조직운동의 생명으로 객관적 특수성에 따라 적절히 이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대중운동과 조직운동은 그 운동에 참여하는 각 구성원이 대중에의 헌신과 운동가의 책임감을 겸비해 나감에 따라 발전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원칙이 수립되었다해도 운동원들이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공리공론이 될 뿐이다. 김의기 열사가 누구도 광주사태의 실상을 말하려 하지 않을 때에 분연히 앞장섰던 것은 그 당시 운동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 투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의기 열사의 이러한 자세는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한 교회운동권 운동인자들이 지니고 있는 운동과 동료에 대한 무책임과 그들이 고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회주의적 업적주의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입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바른 길을 향해 몸으로 일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 라는 그분의 주장은 대중운동과 조직운동의 운동인자가 지녀야 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입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는 주장은 대중과의 접촉면적을 끊임없이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말로만 운동을 논하는 공리공론자들을 배격하는 주장이고, “ …바른 길을 향해…” 라는 주장은 올바른 인식에서 올바른 실천이 행해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다” 는 주장과 일맥상통한 주장이고, “…몸으로 일해 나가야 될 것이다” 라는 주장은 아무리 올바른 사상도 실제로 실천하지 않으면 공리공론으로 될 것이니 실천을 통하여 올바른 사상을 확립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속에는 “실천→이론→재실천” 이라는 운동의 제 1원칙이 숨어 있다. 김의기 열사는 이 원칙을 수행하다 매판군사독재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누구나 죽을 때까지 완벽한 삶을 살수는 없으나 올바른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운동인자로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고 세속적인 명예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언제나 운동에 책임을 갖고 자기가 세운 운동의 원칙을 끊임없이 실천하다 가신 길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김의기열사의 삶은 모든 운동권인자의 귀감이 될 것이다.
④왜 김의기 열사는 열사이어야만 하나?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야만 할 것인가를 결정하려 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농민운동을 함께 해나갈 것을 서로 굳게 약속한 반려자, 어깨를 부비며 함께 농민의 해방을 위해 같이 가자던 동지등이 머리를 스쳐갔을 것이다. 한발 한발 조여오는 온갖 채찍을 막아내며 뒤로뒤로 밀리다 죽음에 이르렀던 김의기열사는 굽힘없이 끝까지 항거했던 것이다.
아무도 같이 해주지 않은 외로운 상황, 무수한 군화발과 채찍에 몰리면서도 비장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떳떳이 불의와 폭력에 항거하자고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한때나마 추구했을 모든 욕구를 버렸을 때 지금까지의 생이 허망했을 것이나, 이제 평온한 마음으로 내려찍는 폭압을 감내했을 것이다. 김의기 열사는 죽음이 엄습해 와도, ‘동포여! 동족을 무참히 살육한 남도의 실상을 직시하소서’ 라고 외치며 매판군사독재의 총칼에 항거했다.
아직도 그분이 죽음을 바쳐가며 외쳤던 민중의 승리는 오지 않았고,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고 그렇게 동포에게 외쳤던 유신의 후예인 현 군사독재정권은 공포와 폭력정치를 더욱 더 강화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군과 관료기구를 한 손에 거머쥔 군사독재집단은 물적․물리적 억압구조를 계속 강화시키고 있다.
오직 체제를 지지하는 자유만 보장된 현재의 유화국면도 언제 탄압국면으로 전화될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그분의 의로운 외침은 우리의 자세를 숙연하게 만든다. 어떤 폭압에도 굴함이 없이 당당히 맞서간 그분의 자세는 굴욕적 삶을 강요받는 지금 모범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의기 열사라 부른다.
⑤진정 김의기 열사는 죽었는가?
“아직도 광주는 계속되고 있다” 라는 구호와 같이 광주사태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그 책임자가 버젓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미국을 왕래하고 있다. 2천여 광주시민의 죄를 뒤집어 쓰고 등장한 현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예속국 가독점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계속 은페하면서 반민족적․반민중적․반민주적인 작태를 계속 일삼고 있다.
현 군사독재정권은 수출주도형 산업구조와 성장정책을 고수하면서 78년부터 계속되는 장기적인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층민중의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소수 국내 독점재벌의 이익을 보장해주기 위해 현 군사독재정권은 수출증대와 물가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저곡가정책과 저임금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족재체제의 구미에 맞는 재벌에게 도산해버린 기업들을 떠맡겨버리는 방식으로 독점자본의 구조적 모순을 해겨할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체제에 기생하는 독점자본에 자본집중을 강화시키고 있다.
자본이 집중된 독점재벌들은 열약한 재무구조를 금융정책의 혜택으로 극복해나갈 뿐만 아니라, 미 ․일 독점자본과 밀착되어 계속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고 있다 따라서 군사독재와 독점자본은 더욱 유착되어가고, 국내 독점자본은 미․일 독점자본에 더욱 더 예속되어간다. 이는 국내 독점자본의 매판성이 높아가고, 미․일 독점 자본에 경제적으로 더욱 예속되고, 세계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기에 대한 부담이 독재체제의 지지의 대가로 전가됨에 따라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군사적 예속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예속독점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의 피해자는 이들에 의해 이중삼중으로 착취되는 노동자와 농민이다. 이들 기층민중은 착취가 가중될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을 더욱 강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이중삼중으로 기층민중을 속박하고 있는 독재자의 쇠사슬이 끊겨지지 않는 한, 매판적이고 반민족적인 현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기층민중의 민족․민중․민주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어마어마한 물력과 물리력으로 좌절할 수도 있으나, 그때마다 김의기열사는 우리의 손을 잡고 힘 모아 동족도 살육하는 현 군사매판독재정권에 싸울 것을 독려할 것이다.
기층민중의 착취를 강화하면서 미․일 독점자본의 이익을 보장해주려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작태를 계속할 때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외치며 우리를 반파쇼투쟁에 앞장서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인간적 삶을 부정하고, 억압의 사슬에 묶여 생존권조차 박탈하는 반민주적․반민중적․반민주적 군사독재정권이 계속되는 한 김의기 열사는 우리 곁에서 “입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바른 길을 향해 몸으로 일해 나가야 될 것이다. ” 라고 외치며 울바른 길을 인도할 것이다.
김의기 열사는 이 땅에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민주주의가 수립되는 날까지 우리의 투쟁을 인도하며, 같이 투쟁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같이 살아, 민족이 해방되는 날 우리와 한데 어울려 “농민가” 를 드높이 부를 것이다.
-4월이 오면 접동새가 혁명의 피냄새를 몰고 오고,
5월이 오면 그분의 외침이 민족의 가슴에 메아리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