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생활(사도행전 2:44-47) : 원시 공산 사회?

최세창
  • 1472
  • 2019-05-28 02:08:42
초대 교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 누가는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하였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는 초대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였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각지에 흩어져 사는바 줄잡아도 삼천 육백 이십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가정을 유지하거나 해체한 채, 어느 한 장소에서 집단생활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삼천 여 명 중에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대 각지의 주민과 외국 각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사실(2:5-)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예수님과 추종자들을 대적하던 유대인들, 특히 유대 교권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민란을 두려워하는 빌라도 총독 역시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것 같다.
아무튼, 모여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이 원문(εἶχον ἅπαντα κοινά)은 ‘공공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또는 ‘공동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로 직역된다.
黑崎幸吉은 “모든 신자가 모든 재산을 모두 내 바쳐서 공동 소유했다는 뜻도 아니다(행 5:4, 6:1). 저들은 서로 사랑한 결과로 서로 한 가족처럼 친히 왕래하고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에 응하여(45절) 이것을 남을 위해 쓰는 것도 마치 자기를 위해 쓰는 것 같은 태도였던 것을 보여 준다.”라고 하였다. 렌스키(R. C. H. Lenski)도 “단지 자신의 개인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누가는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고 하였다.
黑崎幸吉은 “모든 신자가 그 모든 재산을 팔아서 분배했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 중에 가난한 자가 있어 이들을 도울 필요가 있을 때 이들을 돕기 위하여(6:1) 자기의 재산을 팔아 이를 도와 주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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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과 앞 구절은 원시 공산주의적 이념이나 그와 유사한 제도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한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당연히 불신자들에게까지 행해져야 한다.
웨슬리(J. Wesley)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만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멸망한 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물질 분배는 결코 강제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의 열매로서 공동체 안에[의] 신도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했다는 증거가 된다.”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누가는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하였다.
“마음을 같이하여”는 호모튀마돈(ὁμοθυμαδὸν)이며 ‘같은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성전”은 히에로(ἱερῷ)이며, 지성소와 성소를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의미한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작업이 계속되어 주후 64년에 완공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더욱 자세한 설명은 저자의 마가복음 11:15의 주석을 보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이다. 그들이 솔로몬의 행각이나 그 밖의 주랑이나 홀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3:1, 11, 5:12. 참조: 눅 22: 53)는 점과 각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점은 초대 교회가 스스로 종전의 유대교 제사(예배)와 어느 정도 구별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날마다 “집에서”(κατ’ οἰκον: 복수형)에 대해 앞의 “성전에”와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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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바 단순히 ‘집에서’라는 설①과 ‘집에서 집으로’, ‘집집이’, ‘각 집에서’(15:21, 마 24:7, 눅 8:1)라는 설②이 있다. 전자를 취할 경우에는 “떡을 떼며”가 단순히 식사하는 것③이 되고, 후자를 취할 경우에는 성찬이 포함된 애찬, 즉 예배 행위④가 된다.
“집에서 떡을 떼며”에 대해, 럭크만(P. S. Ruckman)은 “이 구절이 지난 1000여 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행해진 성사에 대한 구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전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나 성당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와 47절의 “하나님을 찬미하며”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를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발전케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집에서 식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 건물이나 성당 같은 것이 아니라 집-교회이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것은 행복한 교회이었다. 기쁨이 거기에 있었다. 침울한 그리스도인이란 모순이다.”라고 하였다. 네일(W. Neil)은 “누가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습관적인 행위를, 성전에 참석함으로써 유대교 종교 생활의 확립된 법령에 충실하고, 또한 특별하게 그리스도인의 성찬 의식을 위해 각 집(집-교회)에서 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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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Calvin, H. Alford, J. A. Bengel, “Meyer, De Wette”(in 이싱근), A. C. Hervey, R. N. Longenecker, P. S. Ruckman, T. Whitelaw(p. 45), ASV.
2) “Erasmus”(in 이상근), J. Wesley, E. Haenchen, A. C. Hervey, R. C. H. Lenski, I. H. Marshall, R. Earle, G. H. C. Macgregor, 黑崎幸吉, 이상근, KJV, AV. F. F. Bruce, The Book of Acts.
3) J. Calvin, , H. Alford, R. C. H. Lenski, A. C. Hervey, P. S. Ruckman, R. N. Longenecker.
4) J. Wesley, I. H. Marshall, J. R. W. Stott, W. Neil,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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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요약하였다. 그 묘사는 일반적으로 행복한 교제이며, 깊은 헌신적인 정신으로 충만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토우센트(S. D. Toussaint)는 “그들이 비록 매일(참조 47절) 성전에 모이기를 계속했다 하더라도 교회는 전통적인 유대주의와는 달랐다.”라고 하였다.
끝으로, 누가는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찬미하며”(αἰνούντες τὸν θεὸν)는 누가의 애용어(3:8, 9, 눅 2: 13, 20, 19:37. 참조: 롬 15:11, 계 19:5)이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 최고의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감격의 표현이다.
성령 충만하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생활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은 “온 백성”, 특히 온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또한, 그 교회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구원받는 사람”(τοὺς σωζομένους)은 “명사화한 현재 분사로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더 이상 없는 특성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R. C. H. Lenski). 이 표현의 의미는 ‘구원받을 사람’이나 ‘구원받아야만 할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는 숙명이나 예정에 대한 암시가 하나도 없다. 이것의 헬라어가 아주 명백하게 말해 준다”(R. Earle).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 구원받는 것(엡 2:8)은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순전한 마음의 예배 및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13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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