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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해보다가... 이경남목사님. 써본다.
민관기
- 1630
- 2019-06-08 21:20:26
42.895m/sec의 속도이다. 더구나 마음이나 느낌이 아닌 생각이니 얼마나 더 잘 돌았겟는지 또 생각한다.
참고지만, *. 머리엔 생각이 잇고 그 모양은 동그라서 잘 돈다(잘 바뀐다. 변덕이 심하다)
*. 가슴엔 느낌이 잇어서 그 모양이 네모라 동그라미보단 매우 덜 움직인다. 하여, 감동을 받기가 쉽지 않은 것인 것이다.
*. 배꼽과 성기 사이엔 마음이 잇어서 그모양이 세모여서 경장히 안 움직인다. 마음을 얻는것이 그리도 어려운 이유이다. 가끔 교만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해 뭐라 지껄이는 경우가 잇는데 이는 마음의 위치를 모르고하는 무식의 소치이다.
정리하면, 머리는 동그라미 = 생각. 가슴은 네모 = 느낌(감동). 배엔 세모 = 마음이다.
나는 2001~2년경 이경남 목사님의 글을 보았다. 거의 20 여년은 다 되어가나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중 하나인 진압군의 입장으로 광주를 지켜본 신학생출신으로 현재는 목사가 되어 잇는 이의 증언이라 기억하고, 하여 그 말은 다는 아니어도 어는 정도는 경험한 범위내에서 객관적으로 진실성이 잇다 판단하고, 나의 광주에 대한 기록과 영상 그리고 증언과 증인들을 통해 알게된 진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웟고 대개는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한 것들이 다수 잇을 뿐이었다.
또한, 다른 기록물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진압군의 한가운데서 경험한 이야기에 매우 놀라기도 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해 그 날 그 장면을 본 기억은 폭도들의 그것으로 알앗엇다. 1979년 박전 대통령의 시해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을 기억한다. 시해와 군부의 등장과 국민들의 시위 그리고 김대중석방, 계엄령철폐. 이 정도국민의 요구면 군부도 김대중을 죽이진 못할것이란 말을 듣기도 햇다. 그리곤 마지막 장면이 전남도청에서의 진압작전을 본것이다. 개략만 알뿐 구체적 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 등이 광주의 진실을 규명을 미국에게 요구하는걸보며 참 이상하다 생각했었고, 가끔 학교의 난간에 매달려 손메가폰으로 구속학우 석방하라거나 광주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행동들을 보며 참으로 마니 이상햇엇다. 여기까지가 내 중 3정도부터 고 3에 이르기까지 광주에 듣고 알게된 거의 전부이다.
1985년경 나는 그 해 그 날의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햇다. 독일에서 입수된 비디오 테잎과 국내에 떠도는 모든 자료들을 획득 학습하고 나름의 결론을 얻엇다. 전두환정부는 군사독재이며 학살정권임을 인식햇다. 나는 내가 할 수 잇는 모든것을 햇다. 하여, 1987년 6월 8일 모든 준비를 마친후 6월9일 감신 아레오바고광장에서 결단의 기도를 드렷다.
감신학우들과 감리교회 청년연합 그리고 감리교회 목회자 또 교수님들도 엿고, 다음날 6월 10일 승하하신 순종황제를 기려 일어낫던 610만세운동의 전통을 이어 전국적 시위항쟁에 돌입햇다.
아~ 허나 어쩌랴. 6월 9일 연세대 시위에서 이한열학생이 직격탄에 피격되엇다는 소식이 들어왓다. 1986년 건국대에 1,500 여명 학생들이 공산혁명분자가 되어 구속되고 그 사후 일처리 과정중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부터 1987년의 시작은 매우 엄중햇엇다. 감신에서도 수배자를 체포하려고 혈안이된 당국이 감신 학우들 15 여명을 차례로 연행하여 박종철과 똑같은 고문을 당하던 시기엿엇고, 우린 그냥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쳣다. 이젠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413호헌조치로 자기들만의 재미난 권력놀음을 벌이려던 그들에게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전역을 뒤덮기 시작한것이다. 610으로 명동성당에 포위된 2000 여 학우들을 구출키위한 눈물겨운 싸움이 잇엇다. 위수령 또는 계염령이 검토되고 잇다는 상황에 접하고,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위때의 김부겸처럼 나는 명동성당농성을 해산하거나 퇴각할 마음은 없엇으나 2000 여의 학생들의 안위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엇다. 다행히도 성당의 지도자들이 역할을 잘해주어 명동농성으로인한 참사는 발생하지 않앗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엇다. 하늘의 보우하심이다.
우린 617 최루탄추방의날로 다시 맞섯다. 경찰력을 절반 이상 무력화시킨 대규모의 치열한 전투도 치럿다.
마지막을 기획햇다. 626국민대회. 그야말로 젖먹던 힘도 모두 짜내 이 동반도 역사상 한 날 한 시 최대의 인원인 200 여만명이 혼을 쏟아부엇다. 종철이를 부활시키고, 한열이를 소생시키는 우리의 외침은 "나도 죽겟다"엿다.
마침내, 629 호외가 뿌려졋다. 학생운동사에 수 많은 항쟁이 잇엇지만 그 유일한 승리 쟁취의 순간이 그 날이엇다.
감신대생들은 학부의 전체 학우가 1000 여명이다. 99%의 학우들이 학내와 거리투쟁에 나섯엇는데, 6월 10일부터 6월26일 16일간 연행학우의 수가 1000이엇다. 이는 전체 학우가 다 연행되엇다는 말이 아니라 16일간 연행학우수가 1000이란 말로 2~3번 연행된 경우도 많앗으며 연행되어 몇 대 쥐어터지고 뚜드려 맞앗다고 겁나서 다음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없엇단 말이다. 어떤 날은 한꺼번에 200 여명의 연행학우 명단이 자보판에 게시된 적도 잇엇다.
"니 들이 나를 어째도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의 그 정신으로 하나된 그 것.
내 얘기는 여기까지이다. 작게는 1500 여명의 학우들이 공산혁명분자가 되엇엇던 1986년 11월부터 1987년 629까지의 개략이다. 곧, 1985년 광주학살의 원흉들을 타도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시키는데까지 성공한 것이다. 다 아는바와 같이 1987년의 대선은 김현희 등과 그렇게 갓다.
... 1988년의 5공청문회... 1996년의 전노구속... 백담사... 29만원... 또 그럭저럭 30 여년이 또 흐른것이 2007~8년이되니
완전히 끝장을 안보고 지내오니 지만원이란 자가 뭐라고 떠들기 시작햇다. 참 말이 안되는 소리엿다. 그런데 참말이라 여겨보앗다. 그럼 당시 해안경비사령괸이든 국방부장관이든 국가보위를 책임지는 모든 단위는 사형에 준하는 처벌을 받음도 마땅하다 여기기는 햇으나 사실관계에서 맞는 점이 하나도 없음에 좋을 수 기회도 없어져 한편 아쉽다.
난 이경남목사의 글들을 보아왓엇다. 햇수론 20 여년은 다 되어간다. 난 남의 말을 매우 잘듣기도하고 믿기도 한다. 한편으론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이경남 목사의 글을 보는 나의 태도는 음~ 그런 일이 잇엇을 수 잇엇군이엇다이며, 요즈음 어느 언론에 인터뷰한걸 이렇네 저렇네하는걸보니 아니 이건뭐지?이다. 자기 혼자만의 글도 아니고 독백도 아니고 가족에게나 털어놓는 말도 아니고, 교계언론도 아니고... 전 국민에 상시 노출된 언론 인터뷰해놓고 내가 이랫는데 니가 그렇게 썻다는 둥하니 어이가 상실이다. 수 십만이나 수 백만이 그 글을 봣다니...
아니 뭐 그렇다고 역사가 바뀌진 않는다.
이 목사의 글은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로 주목하는게 아니다. 진압군중 하나엿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광주에 대한 나의 삶속에서 경험도 있고해서 생각나는 대로 잠시 생각해보다가 써본다.
근데, 거의 다 끝낫는줄 알앗는데 아직도...
글 쓰는 겸 이경남 목사님에게 한 마디.
앞으로 준비가 안되어잇거나 미진하면 세상으로 출사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