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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남아 동학혁명
도현종
- 1237
- 2019-06-20 06:24:05
한국 역사의 가르침에 분개한다. 거의 역사에서 제외한 인물들이 한 두분이 아니다. 단 한줄외에는 취급도 안하는 역사가 우리의 역사이다. 일제의 역사를 그대로 쓰고있다.
박근혜는 모 잡지사를 통하여 교과서 개편이라는 아주 못된 악상을가지고 이분들의 흔적을 지워버리려 하였다.
오늘 감리교회 일부 목사들의 행악과 전혀 다르지않다. 부귀, 영화, 권세, 직위에 겂없이 달려드는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예수는 광야에서 이 모든것을 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데두고 짚둥우리가 왠말이냐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거느리더니 끌려가다니 왠말이냐"
붙잡혀 끌려가던 김개남 장군을 두고 불렀다는 민중들의 한서린 노랫가락이다.
김개남 장군은(1853~1894)은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거두다. 전라좌도를 호령하던 그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인 강경파로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급진적 성향을 보인 장군이다.
1894년 8월 평양전투에서의 대승을 전기로 청을 굴복시킨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시작한다. 이 때 남원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은 좌도의 농민군 7만명을 남원에 집결시켜 대회를 열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은 후일을 도모코자 대회를 만류했지만 김개남 장군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 어렵다며 두 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봉건세력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실제 그는 집강소 시기에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전라좌도의 양반들을 가혹하게 치리했다.
화산 같은 김개남 장군의 폭발성과 추진력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그는 두말 할 것 없이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대원군의 밀지를 받을정도로 탁월한 혁명가이다.
김개남 장군의 경우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유언과 판결문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이 가슴에 져며온다.
1894년 12월 1일 측근의 고발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 장군의 위력에 위축돼, 그를 서울로 압송 중 농민군에 의해 탈취 당할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아무런 재판 과정 없이 체포 이틀 후에 서교장에서 참수했다. 1894년 12월 3일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남원 일대에서 핍박받은 양반 토호들에 의해 짓밟혔고 그의 간을 꺼내 씹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이송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시됐다. 8척 장신에 호령을 하면 앞산이 쩌렁거렸다는 무골은 판결문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갔다. 힘이 장사라는 이유로 양손 가운데 대못을 박고 효시를 당한 걸출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에서 소외당했다.
김개남 장군의 진짜 모습은 변할수없는 충심이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