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논개님

도현종
  • 1047
  • 2019-06-27 18:55:21
(사돈될 해주 최씨 가문에게 감사를 드리며 후손인 주논개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왜 일어났는가?
사건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부정한 역사는 덮는다고 덮어질일이 아니다. 충신의 고장 꽃마음 꽃심 전주에 살면서 드는 생각이다. 중 고등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둘째의 생각도 같다.

한 평생 올바로 짖다가 간 똑똑한 바보 주논개가 그리워진다.

이러한 역사의 평점에서
나라를 위하여 충열을 바친 분들이 기생인지 부인인지도 모르고 일제에 의하여 지워져버린 역사를 믿고 여전히 기생이라 믿고 따르는 한심한 시대에 살고있다.

논개는 주씨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지만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이 어려워지자 삼촌이 다섯살짜리 어린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았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논개를 피신시켰지만 결국 계약 위반으로 잡혀가 현감 앞에 가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논개와 논개 어머니를 구명하고 아내로 맞은 현감이 바로 남편 해주 최씨 최경회다. 이를 계기로 생활이 어려웠던 논개와 그 어머니가 최경회의 집에서 살게 된다. 이후 18살이 된 논개는 부인을 잃은 최경회의 부인이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는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이후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강에 투신한다. 남편과 부인은 결국 같은 충심으로 남강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산화한다. 고려 시대 해동 공자 최충의 걸출한 후손들이다. 누가 주논개를 기생이라 부르는가?

왜군은 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였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이곳에 참석한다. 그녀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다. 

주논개의 순국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일을 계기로 왜군의 기세가 꺾여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그녀의 공이 컸다는 것은 이후 일제강점기 때, ‘주논개의 고장’인 장수 일대의 주씨를 모조리 말살하려고 했던 일제의 만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논개의 신분을 기생으로 조작하고 덮으려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조차 주논개를 기생으로 인지하고 살아간다.

슬픈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일제를 증오한다. 분명 기생이아닌 충렬 부인이다.

그런데 조선은 논개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여자라는 편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논개는 순국 후 100년도 더 지나서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산화한 때가 1593년이지만 1721년이 돼서야 경상 우병사 최진한이 국가에 포상을 건의했다. 그렇게 조금씩 논개의 일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바위다. 의암은 진주에 있는데 의암호는 장수에 있고, 생가는 주촌마을에 사당은 의암호에 있다. 하여 논개사당의 이름은 ‘의암사’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9월3일에 주논개제가 행해진다.

주논개의 고향인 장수 사람들의 논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남다르다. 1846년 현감 정주석은 논개 생향비를 건립했는데, 이후 그들의 장수가
충절의 여인에게 죽임을당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조치로,일제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땅속에 파묻어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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