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 김춘배

도현종
  • 1039
  • 2019-07-03 03:51:06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주님이 더욱 슬퍼하신다.

일제는 김춘배 열사에게 탈취당한 보복으로 의적 소리는 버리고 괴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위의 사진 참고)

천재적 열사 독립운동가 김춘배는 1904년 전주군 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학교인 영신학교를 다녔고 1917년 일가 모두 간도로 이주했다.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에 1927년 가입했고, 중국 연길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을 하다가 붙잡혀 8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 풀려났다.

그해 10월 홀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를 공격해 총기 8정과 실탄 700발을 탈취했다. 2만여명이 동원된 일제 포위망을 피해 일본인 순사부장 등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활약했으나, 서울로 내려오다가 19일 만에 붙잡혔다. 혼자서 주재소를 습격한 이 항일운동은 ‘함남권총사건’, ‘북청권총사건’ 등으로 불렸다. 해방 뒤 출옥했지만 1946년 12월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1독립선언서에 참가한 33인은 최고형이 대부분 징역 3년 정도인데, 김춘배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독립운동이 모두 소중해 활약상의 경중을 따질 순 없지만, 홀로 치열하게 무장활동을 한 김춘배 열사의 조명이 제대로 이뤄져야한다.”

독립운동으로 도피 생활을 했을 땐 신분을 숨겨야 해서 이름도 ‘길동’, ‘춘산’ 등 여러 개였다. 묘지도 확인하지 못했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기록도 찾지 못했다.

늦게 정부는 1990년 독립운동가 김춘배에 대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지금이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올바른 출발점이 돼야 한다. 신문·방송에 일회성으로 한 번만 소개된 채 끝나선 안 된다.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조명해서 후속 조처를 끌어내야한다. 흔히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위한 지속적인 선양 사업이 가능해지려면 기념사업회가 조직돼야 한다. 유족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많다. 행정기관 등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고민해야 한다.

이전 현종서 2019-07-03 한국교회와 통일 대한 민국의 영적 정신적 기초확립의 사명을 가진 한국 감리회 신학대학교
다음 장병선 2019-07-03 담임목사 임기제 도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