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죄 제사가 무슨 속죄의 효력이 있나(히브리서 10:1-4)

최세창
  • 1573
  • 2019-08-05 22:05:25
앞(9:23-28)에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제사의 영원한 구원 효능을 논한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는 그 그림자요 모형인 율법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가르(γὰρ)가 있어 앞 구절의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은 9:11의 주석을 보라.
“그림자”(스키안, σκιὰν: ‘개략적인 윤곽’이란 뜻도 있다,)는 문장 초두에 나타나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8:5의 주석을 보라). “그림자를 아무리 쌓아도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Davidson in 이상근). 그림자란 아무리 반복해도 그림자일 뿐이지 실체가 되지 않는다. 그림자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림자 자체가 아니라, 실체를 지시해 준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율법이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는 것은 율법 체제가 구원의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뿐인 그리스도의 제사의 영원한 구원 효능을 예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구약인 율법 체제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인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의 제사를 지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참 형상이 아니므로”는 율법이 “참 형상” 곧 영원한 구원 효능이 있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모형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비유의 원리는 방금 언급한 것과 같다.
율법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고, 원형이 아니라 모형이므로 율법의 규정을 따라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7:27과 9:25의 주석을 보라.)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이다(7:19과 9:9의 주석을 보라.).
히브리서 저자는 방금 언급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라고 가정법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은 ‘율법의 제사가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의 효능이 있다면’이라는 뜻이다.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란 율법을 좇아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단 한 번으로 깨끗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죄를 깨닫는 일”(συνείδησιν ἁμαρτιών)은 직역하면 ‘죄의 인식’ 또는 ‘죄의 자의식’이다. 따라서,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는 다시 죄를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의 “죄”(하마르티온, ἁμαρτιών)는 1:3의 주석을 보고, “깨닫는 일”(συνείδησιν)은 9:9의 “양심”의 주석을 보라.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는 제물을 바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겠느냐는 뜻이다.
결국 이 구절의 요지는 율법의 제사가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의 효능이 있었다면, 바치는 자들이 단 한 번의 제물로 정결케 되어 다시는 죄를 알지 못하여 더 이상 제물을 드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 반대의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모페트(J. Moffatt)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한 민수기 5:15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 견해에 대해 휴스(P. E. Hughes)는 “외견상으로는 양 구절이 비슷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서로간의 내용이 다르다. 민수기 5:15은 문맥상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 그 범죄 사실이 확증될 수 없는, 은밀히 범한 특정 죄를 밝힌다는 의미이다.”라고 잘 비판하고 있다.
“이 제사들” 곧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1절)는 죄를 속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마다” 돌아오는 대속죄일인 7월(Tishri) 10일에 온 백성에게 죄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폐단이 있다. “물론, 날마다 드리던 수많은 제사가 죄를 상기시켰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P. E. Hughes). 율법의 한계는 죄를 가르쳐 주거나 상기시켜 주기는 하는데, 죄를 이길 힘이나 죄를 해결할 힘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될 필요가 없이 단 한 번으로 영구적이며 완전한 어떤 제사의 필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속죄 제사가 해마다 죄를 상기시키는 이유(원문의 4절 첫 부분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 대해서,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속죄일에 제물로 사용된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즉 속죄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1-3절에서 설명된 원리와 같은 것이다. 즉, 속죄 제사가 반복되었다는 것은 제물인 황소와 염소의 피를 반복해서 드렸다는 것이고, 반복되는 제사가 섬기는 자를 정결케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반복해서 드린 황소와 염소의 피가 섬기는 자를 정결케 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반복되는 제사가 죄를 없애기는커녕 도리어 죄를 상기시킨다는 것은 반복해서 드린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기는커녕 도리어 죄를 상기시킨다는 것이고, 반복되는 제사가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구원 능력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제사의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은, 반복해서 드린 황소와 염소의 피가 단 한 번의 보혈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구원 능력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이다.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은 주목할 만한 강해를 하였다. “사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속죄 제사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는 히브리서의 가르침이 이러한 의미이다.…레위 제사는 단지 미래의 속죄를 지적해 준다는 차원에 한해 속죄 제사라고 불릴 수 있었다. 따라서 레위 제사는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율법의 의를 회복시키는 속죄제 역할을 하여 범죄한 자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당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계시가 온 후, 그 제사는 중단되어야 했다. 옛 제사는 진정한 속죄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장차 속죄를 제공할 목적으로 약속되었던 것이다.”(in P. E. Hughes.)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 25)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구약 곧 율법의 핵심 사상은 속죄나 정결, 은혜와 축복, 해방과 구출 등 온갖 구원이 율법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바 영원한 성자 그리스도의 성육과 속죄의 죽음을 근거로 행해지는 것이다(엡 1:4, 창 3:15. 참조: 무수한 메시아 약속들).

출처: 최세창, 히브리서(서울: 글벗사, 2001, 1판 1쇄), pp. 297-301.

필자의 사이트 : newrema.com(T. 426-3051) 저서: 신약 전체 주석/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7권/ 다수의 논문들/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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