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신행(信行)

함창석
  • 1046
  • 2019-08-09 21:33:47
신행(信行)

산돌 함창석 장로

내 형제들아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인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다 들어가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부터 표현된 것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결여된 자에 대해서 극한 가난한 처한 형제, 자매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가식성을 지적하고 있다. ‘일용할’ ejfhmevrou(에페메루)은 양식이 모두 다 떨어져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평안히 가라.’ Upavgete ejn eijrhvnh/(휘파게테 엔 에이레네)는 유대인들이 해질 때 사용하는 통례적인 인사법이다. 배고푼 사람에게 이러한 인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더웁게 하라.’ qermaivnesqe(데르마이네스데)는 '알아서 스스로 더웁게 하라'는 말이다. ‘배부르게 하라.’ cortavzesqe(코르타제스데)는 방목하는 짐승에게 실컷 꼴을 먹인다는 뜻이다.

바리새인같이 위선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들이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말은 죽은 것이다. 결국 이렇게 입으로만 형제를 위하는 척 하는 믿음은 외식 적인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그 자체’ kaq! eJauthvn(카드 헤아우텐)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란 뜻으로 믿음의 사망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멸망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는 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인가? 행함은 믿음으로 온 열매임이 분명하나 반대로 믿음 없는 행함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행함으로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어떤 방법으로 보일 수가 있는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유일신에 대한 믿음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사실이며 야고보도 여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귀신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우 행함과 믿음이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어 온전케 된 것을 설명한다. ‘행함 없는 믿음도 안 되지만, 믿음 없는 행함도’ 무익한 것을 말한다. ‘온전케 되었느니라.’ ejteleiwvqh(에텔에이오데) ‘완성하다, 마치다’로 믿음의 완성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는데,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30년이 지나서였다. ‘응하였고’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언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 30년의 세월과 더불어 3일 길을 걸어갈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야고보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로 재강조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로 보아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함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구속의 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 없는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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