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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온 자와 땅에서 난 자(요 3:31-36)
최세창
- 1482
- 2019-08-19 22:20:30
그는 이 부분을 【31】“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로 시작한다.
“위로부터 오시는 (3:2, 13의 주석을 보라.)는 만물 위에 계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지위와 권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시고(히 1:4),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시며(히1:1, 2), 모세보다 뛰어나시고(히 3:1-6), 모든 대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시다(히 4:14-16).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뜻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다(롬 9:5, 엡 1:21-22, 고전 15:25, 골 1:15-19).
“땅에서 난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자연적이며 육적인 출생 과정을 거쳐 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세례 요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요(1:6) 하늘에서 온 자이었지만(마 21:25),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명이라는 의미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세례 요한은 하늘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는 3:12의 주석을 보라.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를 반복 강조한 것이다.
“하늘로서 오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32】“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이 구절은 3:11의 주석을 보라(참조: 1:1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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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는 과장법이기는 하나 너무 사실적인 표현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로(6:26) 예수님께 나왔지만, 참된 제자가 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마 7:22-23, 26:56).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로 드러나고 말았다(6:15, 마 13:6, 눅 8:13).
예수님 자신도 구름같이 몰려와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다가, 또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막 4:9, 23, 눅 8:8)라고 부언하시거나,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13:9)라고 부언하셨다.
위와 반대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33】“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라본, λαβὼν) 그분을 약속된 그리스도로 온전히 믿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되시다’(알레테스, ἀληθής: 1:4의 주석을 보라.) 하여”는 예수님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이 거짓 신이 아니라, 진실로 말씀을 이루시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인쳤느니라”는 에스프라기센(ἐσφράγισεν)으로서 ‘인치다’, ‘봉인하다’, ‘날인하다’, ‘확증하다’, ‘보증하다’, ‘확정하다’, ‘약조하다’ 등을 뜻한다(계 5:1, 7:2, 9:4, 고전 9:2). 특히, 이 동사는 ‘진정성(문서의)을 보증하다’, ‘소유권을 표시하다’ 등을 뜻하였다(엡 1:13, 4:30, 딤후 2:19).
앞 구절의 이유는 【34】“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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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1:1)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1:14)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즉, 하나님의 교훈, 권면, 지시, 명령, 책망, 경고, 심판, 축복, 구원 등의 말씀을 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7:17).
“말씀”은 레마타(ῥήματα: 복수형)로서 ‘연설’, ‘강화’, ‘뜻을 표현한 말’, ‘표현된 말씀’, ‘인간의 발언’ 등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비롯한 당신의 종들에게 성령을 일시적으로, 또는 한정적으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무한히 주셨다(J. Calvin, H. Alford, “Augustine, Lke” in 이상근). 실상, “메시아는 성령이 거하시는 그릇이 아니라 끝없는 태양과 같은 원천이시다”(M. Henry).
참 목자는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서 일하고, 거짓 목자는 자기 심령을 좇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주체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참 설교란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거짓 설교란 자기 심령을 좇아 세상에 속한 자신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인 점은,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의 기사(마 11:27, 28:18, 눅 10:22)나 바울 서신의 기록(엡 1:22)이나 히브리서 1:2과 잘 병행된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므로, 【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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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고 하는 것이다.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의 “영생”은 3:15의 주석을 보라.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아페이톤, ἀπειθών: 불순종하다) 자” 곧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새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본서에는 이곳에만 사용된 “하나님의 진노”(ἡ ὀργὴ τού θεού)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롬 2:5, 5:9, 9:22, 12:19, 13:4, 엡 2:3, 5:6, 골 3:6), 본래 “희랍적 전통에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적‧유다적 묵시 문학에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감정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어떤 도덕적 세계관의 범주에서 볼 수도 없다”(E. Ksemann)}(롬 1:18의 주석).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민 16:33, 46, 25:3)와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핍박했을 때에(렘 1:11-17, 50:13, 겔 36:5) 하나님의 징계를 표시하는 말이었다. 또한, 후기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그 말은 ‘여호와(주)의 날’의 최후 심판을 표시하게 되었다(사 2:10-22, 13:9, 9:19, 겔 7:19, 습 1:14, 15, 3:8, 욜 3:12).
신약성경에서는 대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지시하지만(롬 5:9, 살전 1:10, 마 3:7, 계 6:16), 때로 현실적인 심판을 가리키기도 한다(롬 1:24, 26, 28, 살전 2:16, 엡 2:3). 이 현재의 하나님의 진노란 그의 종말론적 진노의 예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그 소극적 표현인 하나님의 진노의 역설적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르트(K. Barth)의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의 의이다.”라는 설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실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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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1:17)는 믿는 자에게는 그대로 하나님의 의(구원)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요한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라고 설명하고 있다}(롬 1:18의 주석).
{퍼키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변개될 수도 있는 하나님의 감정이나 의지의 반응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착오 없이 계속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심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였다}(엡 2:3의 주석). 죄에 대한 적대심, 즉 심판이란 곧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발로이며,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의 일면인 것이다. 마치 자식의 잘못에 대한 부모의 진노가, 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사랑의 발로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이어(H. A. W. Meyer)는 “하나님의 진노란 악에 대해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자의 사랑과 선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에 대해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경건하고 의로운 자를 사랑치도 않으실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도드(C. H. Dodd)의 “진노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우주 안에서 발생하는 필수적인 인과응보의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다.”(in G. R. Cragg)라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롬 1:18의 주석).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169-173.
필자의 사이트 : newrema.com(T. 426-3051) 저서: 신약 전체 주석/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7권/ 다수의 논문들/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