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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감리교회
도현종
- 1275
- 2019-08-23 23:51:56
감리교회의 비극적 결말이 눈에보인다. 감독회장 감독 감리사라는 직책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아니다. 땅이 갈라져서 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가? 그들이 한 말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회중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34절 말씀 끝을 보면,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고 했다. 이 말속에는, 나머지 회중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죄책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이리저리 도망을 간 것은, 단순히 땅이 갈라지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들도 스올로 내려갈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기 때문에, 도망을 가게된다.
10세기에 역사시대 가장 큰 폭발의 위용을 과시한 겨울철 폭발이 있었다. 엄청난 화산쇄설류가 녹은 눈과 함께 쏟아져 내려 주변의 생태계를 절멸시켰다. 화산재는 150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까지 퍼졌다.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離心乘 흔而動故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요사>가 전하는 항복의 순간은 치욕적이다. 항복의사를 전한 지 이틀 뒤인 14일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또 신하 300여 명과 함께(素服탁索牽羊 率僚屬三百人)’ 항복한다. 이로써 발해(698~926년)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발해의 장군과 왕·귀족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9월엔 500명에서 석달도 채 안된 12월엔 1000호로 급증하고 있다. 발해멸망 후 거란이 세운 동란국(東丹國)의 재상을 지낸 야울우지는 분명 발해의 ‘이심(離心)’을 틈타 제대로 된 싸움없이 승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역사이다.10세기 백두산 화산폭발로 대재앙을 맞았다. 화산재는 백두산 동쪽 지역을 휩쓸었다. 이 때 날아간 화산재는 일본열도까지 쌓였다.
발해 사회내부에 어떤 특정한 권력투쟁이 실재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926년 4월, 발해국 대인선이 대진림 등 116명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했다.”(<책부원귀> 등)
발해가 분명히 926년 1월 멸망했다면서 그 후에도 버젓이 ‘발해사(渤海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중국(후당)에 보낸 것이다. 그 후 935년까지 8차례나 발해가 사신을 파견했다.
거란은 발해를 정복한 뒤 곧바로 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요사>는 “발해땅이 중국 동북부의 오지여서 통치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따라서 거란이 떠난 후 발해의 고토에는 여전히 발해의 이름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이 격동의 시기에 발해인들의 대규모 엑소더스도 상상을 초월할만큼 이어진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고려로 투항하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927년(고려 태조 10년)과 928년, 929년, 934년, 938년, 979년에 걸쳐 많게는 수만명씩 고려행을 택했다. <고려사> 등 역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발해유민’은 10만여명으로 집계된다.
발해멸망 뒤 거란에 의한 강제이주자와 고려로 들어온 유민을 합하면 6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전성기 발해의 인구는 10여만호, 군사는 정예병 수만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발해라는 나라와 백성이 사라진, 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땅을 정복한 거란인도, 그 터전에서 살아가던 발해인들도 모두 떠나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특별히 원보(元甫)라는 관직을 내렸으며,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이미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라? 발해세자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고향땅을 떠나 고려로 내려온 것일까.
“10세기 어느 무렵 겨울날이었다. 백두산이 화산폭발의 순간을 맞이한다.백두산 탄화목 나이테의 중심연대는 933~934년 사이이다. 그렇다면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들 이끌고 고려로 내투했다는 934년은 어떤가. 926년, 즉 발해멸망연도는 <요사>에 나온 기록이다. <요사>는 발해멸망 이후 400년이나 지난 1344년 원나라 시대에 편찬한 기록이다.
체르냐치노 유적 인근에서 확인되는 발해의 절터 흔적. 화산폭발의 흔적인 현무암을 재료로 절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인들은 백두산 화산활동과 함께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926년 이후, 백두산 주변에는 아직도 발해의 세력들이 발해국를 자처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대폭발이 일어나 마지막 남은 발해세자 대광현 세력까지 고려로 귀부한 것이다.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다.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이다.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인 것이다.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