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황아 두황아

도현종
  • 1596
  • 2019-08-28 23:17:55
流水不復回
此頭可斷 此髮不可斷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자른다. 이모습이 강제적 단발령에 의거했던 민족의 혼이다.악한 물 또한 돌아와서는 아니된다. 감독회장직에 썩어진 감리교회를 향한 성서의 엄중한 경고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명성황후 시해 가담 인물, 전주 기린봉에 이두황의 묘가 버젓이 존재한다.

하루에 한번씩은 견훤 산성 기린봉을 오르는데 기분이 상한다.

"친일파 이두황의 죄를 묻기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기린봉 초입에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를 설치했다.

매국노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이다.이 비에는 이두황의 친일 행적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이끌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이 '조선의 국모'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것보다 먼저 칼을 들이댄 악적 친일파다 .

항일 의병 투쟁 시기였던 1908년에는 호남 지역 의병들을 초토화하는 데 가담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토지수탈을 돕는 등 식민지 정책에도 앞장섰다.

수상 이력도 화려했다. 1912년 일제로부터 경술국치 기념장을 받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에서 유공장을 수상했다.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도 그에게 돌아갔다.

단죄비에 빼곡히 적힌 이두황의 친일 행적은 대한민국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을 보여준다.

단죄비로부터 365m 떨어진 곳에는 이두황의 묘가 있다.

비석 높이만 2m에 달하고 제단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묘명은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가, 비문은 친일파 김윤식과 정병조가 작성한것이다.

이두황은 죽어서도 친일의 길을 간 인물이다.

항일 의병을 초토화하고 일본작전 명 여우사냥 명성황후를 시해한 공로로 1910년부터 사망한 1916년까지 전북 도정관(현 도지사)을 지냈다.

서울 태생인 그의 묘가 전주에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도 묘 일대의 땅 1만2천여 평은 이두황의 후손이 소유하고있다."이두황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모멸감을 안겨준 인물이다. 친일 행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뼛속까지 민족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때 친일 행위자 재산 환수위원회가 해체돼 사실상 친일 후손의 재산을 환수할 방법이 사라졌다.재산환수위원회를 부활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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