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충신

이주익
  • 2312
  • 2019-09-06 17:15:18
- 正義大節 : 殉國大節 -

이준에게 이 땅 한반도는 목숨 그 자체였다.

“만고의 경풍(勁風)은 지금 李君이로구나.
장풍만리(長風萬里)에 일어나는 의운(疑雲)이로구나.
피를 열강(列强)에 뿌려 능히 충렬(忠烈)을 씨웠으니, 이제부터 한국에 사람이 있다 하겠다.”
- 이준 열사의 순국을 애도한 金瑋의 時 일부.

1858년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정리(중산리) 발영동에서 이병권과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이준(李儁/이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 1904년 개명)의 초명은 성재(性在)이다.

이준이 태어나고 자란 북청군 속후면은 동쪽의 하늘을 찌를 듯한 대덕산과 북쪽의 개마고원에서 갈라져 나온 차일봉 등 높은 산들이 둘러싸여 있는 외진 곳이었으나, 후치령(1,335m)에서 발원한 수량이 제법 풍부한 맑은 남대천이 질펀하게 북청을 가로질러 푸른 동해로 흘러가면서 하류에 널따란 북평 평야를 형성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했던 일성(一醒, 아호/이 세상을 한 번 깨우치겠다는 뜻)은 1861년 연이어 자애로운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천애 고아가 되었으나, 그나마 할아버지 사랑을 받아 가며 여섯 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며 비교적 넉넉한 유년기를 보냈다.

일성의 조부(이명섭은 북청의 대학자요, 뛰어난 문장가)와 부친은 학식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분들이었다.

북청은 조선 대 유배지로 지목될 만큼 중앙과는 격리되었지만, 나름대로 유학(儒學)의 기풍을 간직한 곳으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가 된 노덕서원(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북청 유림들이 세움)이 위치했다.

이런 영향으로 수많은 서재와 서당들이 생겨났으며 자연스럽게 유학적 면학 분위기가 크게 일어나 거유(巨儒)를 적지 않게 배출했고, 관북지방의 문향으로 일컬어지는 연유가 되었다.

이준은 어린 시절 선산 기슭에 있는 그의 선조 이원계(李元桂)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기형사(機形祠)를 찾곤 하였다. 완풍대군(完豊大君)의 묘소는 함흥 북주에 있지만, 그의 후손들이 함흥, 북청, 명천 등지로 흩어져 정착하게 되면서 그의 사당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완풍대군의 이름은 원계(元桂,1330-1388/배필 문익점의 여식)이며 고려 말 충신 환조대왕(李子春)의 장남인바,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의 시조로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맏형이다.

이원계는 고려 왕조에서 팔도 도통사의 조전원수(助戰元帥)와 우군도총사(右軍都總使)를 지낸 장군으로, 영상(領相)의 벼슬까지 오른 공신(功臣)이었다.

완풍대군은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 4대 불가지론을 주장하며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자 아우인 이성계의 건국(建國)의 길도 열어주고, 고려 왕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에 따라 고려 왕조를 지켰다.

1388년 이원계는 자신의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숙부(태조)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고 유언한 뒤 “필명시(畢命詩)”를 써서 남기고 음독 자결의 최후를 마쳤다.

三韓故國身何在(삼한고국신하재)/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디인가.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죽어 지하에나 가서 태백, 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同處休云裁處異(동처휴운재처이)/같은 처지에서 처신(마름질)함이 다르다고 말을 말아라.
荊蠻不必海棦浮(형만불필해쟁부)/형만으로 가는 바다에 뗏목 띄울 일 없으리라. - 이원계 지음.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의 형이었음에도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완풍대군의 모습이다.

이원계의 언행을 태조의 언행, 네 아들의 언행과 비교할 때,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한 태조나 그것을 반대한 그의 행위, 쓰러져 가는 고려 조정을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태조와 자정(姿情)한 그의 행위가 모두 스스로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의 봉행(奉行)이었다.

이원계의 자정과 숙부를 도와 새로운 왕조창업에 동참하라고 한 네 아들에 대한 유언 역시, 역사적 사명의 봉행이었다고 하여야 옳다.

완풍대군이 남긴 필명시의 비장한 충의의 넋은 지금도 만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완풍대군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옥동자(玉童子)가 곧 이준이다.

완풍대군 제17대 후손 이준 열사야말로 어린시절 기형사에서 제(祭)를 올리면서 집안의 절개를 익혀 간 그 특질이 빛나는 민족의 정화(精華)가 되었다 할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 집사(상동교회 청년회장), 일성 이준은 1907년 7월 15일 세계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여, 회의장 연설대 위에서 일본의 국권강탈을 세계만방에 호소했으나, 한국의 억울한 일을 표결에 부치지 아니하자, 즉석에서 미리 준비하였던 보검(寶劍)을 주머니에서 빼어 들고 “대한독립 만세! 약소국가 만세”를 크게 외친 후, 단숨에 쥐었던 칼로 할복하여 솟구치는 신성한 선혈을 만국 사신 앞에 뿌리고 쓰러졌다.

황제의 특사, 이준은 이렇게 할복자결함으로써 대한남아(大韓男兒)의 의기를 세계만방에 보여주었다.

한국의 특사, 이준 열사는 죽고 삶을 힘써 안 우국지사로, 천고(千古)에 빛을 품는 일월 같은 상징이요, 한국 역사의 가장 밝은 별이다. 일성은 만국을 경동(驚動)시킨 겨레 영세의 거룩한 사표(師表)로 선생의 영혼은 영구불변할 것이다.

오직, 국왕과 조국(祖國) 그리고 겨레를 위하여 그 몸을 던진 이준의 세혈(洒血)은 이 민족의 죽은 혼을 수없이 부활시켰고, 앞으로도 부활시켜 이 민족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 만대를 굴복케 할 것이다.

만국충절(萬國忠節), 한국 혼이 부활한 일성 이준 열사는 조선 말부터 대한제국 시까지 패퇴해가는 국운을 세우려고 신명(身命)을 불태운, 100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마지막 충신이요, 법통(法統)을 튼튼히 펴 놓은 공평의 잣대요, 정의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이겨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12세 때 “살기 위하여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글귀를 책상머리에 써 놓고 나라를 위하여 이 한 몸 기꺼이 바치리라는 다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자나 깨나 오직 나라만을 걱정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이준, 그는 위대한 선각자이다.

求學切於春望雨(구학절어춘망우)/학문을 구하는 마음은 봄에 비를 바람보다도 간절하고, 持心恒苦夜聞雷(지심항고야문뢰)/마음을 가지기는 항상 밤에 우뢰를 듣는 것 같다. - 이준 지음.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

이전 장운양 2019-09-06 목원 선배 목사님들께 많이 서운하다 ㅠㅜ 그런 스승이 떠나셨는데....
다음 장병선 2019-09-06 제비뽑기도, 감독회장 2년임기제도 바람직 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