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설교에 대한 갖가지 반응(요한복음 7:37-44)

최세창
  • 1519
  • 2019-09-10 02:38:45
사도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의 설교와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갖가지 반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는 【37】“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하였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인 초막절과 그 기간은 7:2의 주석을 보라.
특히, “큰 날”에 대해서는 반즈(A. Barnes)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성회와 거룩한 대회의 날을 말한다(레 23:36). 이 날이 큰 날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첫째, 성회와 명절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둘째,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그 전날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지만, 이 날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때문이다(Lightfoot). 셋째,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여겨 그들이 모든 노동을 삼갔기 때문이다(레 23:39). 넷째, 이 날에 그들이 명절의 초두에 시작했던 율법 읽기를 다 마쳤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마도 이 날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긷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명절의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이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제사장들은 실로암 못의 물을 가지고 금항아리에 가득 채웠다.…그 의식은 성전의 대문을 통과하는 나팔 소리와 함께 포도주에 섞인 그 물이 희생의 제단 위에 부어졌다.
이런 관습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 관습이 이사야 12:3의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이러한 의식을 명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그 의식을 행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당당하게 그리고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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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서서 ‘외쳐”(7:28의 주석을 보라.) 설교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누구든지 영혼의 갈증을 느끼거든 예수님께로 와서 마시라는 것이다(4:13-14의 주석을 보라). 즉, 유대인들이 초막절(장막절)의 큰 날에, 조상들이 광야 여행 중에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을 기념하는데, 그 반석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형임(고전 10:4)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 당시에 조상들이 마신 물은 목마름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줄 뿐이었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영원한 ‘생수’(4:10의 주석을 보라.)의 원천이다.
이어서 사도 요한은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성경(헤 그라페, ἡ γραφή: 5:39의 주석을 보라.)에 이름과 같이”는 관사가 있어 성경의 어떤 구절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상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와 똑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는 없다. 아마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모형이 구약성경의 의미와 정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하신 것 같다. 실상, 구약성경에는 그와 같은 의미와 정신을 담은 구절들이 있다(출 17:6, 민 20:11, 사 44:3, 4, 55:1, 58:11, 욜 3:18, 슥 14:8).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를 들 수 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의 “배”(코일리아스, κοιλίας)는 “구약성경에서는 흔히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하고 있다(욥 15:35, 잠 18:8)”(Vincent in 이상근). 또, “종종 사물의 중심부나 핵심 또는 마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마 12:40)”(C. K. Barrett).
그러므로 이 문장은 생수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믿는(1:7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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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라.) 자”의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수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인데, 바클레이(W. Barclay)는 “그 의미는 예수님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베푸신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앞 구절에 대해, 【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하였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앞 구절에 대한 저자 사도 요한의 주석이다.
버나드(J. H. Bernard)는 “생수는 원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물, 특히 생명수는 간혹 성령의 상징으로 나타난다(S.B. Ⅱ. 434-35).…라삐의 주석에서 보면 초막절[장막절]에 끌어들이는 물은 성령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신의 생명을 중개해 주는 성령이다(참조: 고전 12:13).”라고 하였다. Beresh Rabba, 70:1에는, 장막절[초막절]에 물을 길어 제단 곁에 붓는 것은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의 상징이라고 하였다(in 이상근).
물론, 유대인인 사도 요한은 구약 시대의 족장들이나 사사들이나 예언자들에게 임한 성령 곧 여호와의 신의 역사(창 41:38, 민 27:18, 삿 3:10, 6:34, 11:29, 삼상 10:6, 16:13, 삼하 23:2, 왕상 18:12, 왕하 2:16, 대하 20:14, 시 51:10-12, 사 61:1, 63:14, 겔 11:5, 미 3:8)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아직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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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하나님의 뜻을 결정적으로 성취하는 대속의 죽음을 겪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직은 성령께서 기독교적 의미인 보편적 임재를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다양하였다. 그 첫 번째 반응에 대해, 사도 요한은 【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라고 하였다.
“참으로 그 ‘선지자’(4:19의 주석을 보라.)라 하며”는,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나타나리라고 기대했던 선지자들인 엘리야(마 11:14, 17:10-12, 막 9:11-13)나 예레미야(마 16:14)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반응에 대해, 사도 요한은 【41】“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라고 하였다.
두 번째 반응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Χριστός: 1:17의 주석을 보라.)라고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1:43의 주석을 보라.)에서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부류는 메시아의 탄생지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사도 요한은 【42】“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것으로 믿었으며(삼하 7:12-13, 시 89:3-4, 렘 23:5-6), 따라서 다윗이 나서 자란 베들레헴(삼상 17:11-15, 58)에서 탄생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 미가 5:2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갈릴리 지방에서 온 예수님이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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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실상,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나(마 2:1), ‘나사렛’(1:45-46의 주석을 보라.)에서 성장하셨으므로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바레트(C. K. Barrett)는 “예수에 대한 비판가들은 사실을 잘 모르고, 그가 갈릴래아[갈릴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곳이 바로 그의 출생지였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실상, 중요한 것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전승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메시아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영적 의미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출처에 대해서만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님의 출처에 대해서 위로부터 난 분이시요(3:31, 8:23),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요(3:31, 6:38, 41, 42, 50, 51, 58),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라(3:16, 17, 34, 4:34, 5:23, 24, 30, 36, 37, 6:29, 39, 44)는 것이다.
같은 예수님에게서 같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란 또한 듣는 자들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다양함에 따른 분쟁에 대해, 사도 요한은 【43】“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라고 하였다.
“쟁론”은 예수님이 선지자이시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부인하는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반응들 외에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극단적인 반응도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요한은 【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7:30의 주석을 보라.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295-299.


필자의 사이트 : newrema.com(T. 426-3051)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7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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