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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성지(聖地)
함창석
- 1726
- 2019-09-08 04:19:21
(삼합지역을 중심으로)
산돌 함창석 장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5월 비준서를 교환한다. 고종 황제는 미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바로 보빙사(견미단)이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문을 열어 줘서 고맙다고 조선의 고위 인사 몇 명을 초청해서 미국견학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조정은 6명의 사절단을 꾸린다. 1883년 9월 볼티모어 러브레인교회 가우처(J.F.Goucher)목사는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 요청해 1884년 6월 일본주재 조선선교지방감리사 맥클레이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 고종을 알현 학교와 의료사업 윤허 1885년 4월 아펜젤러를 교육선교사, 5월에 스크랜턴 박사를 의료선교사로 파송한다.
가우처(J.F.Goucher)목사는 일본에 파송된 극동 지역담당 선교사인 맥클레이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낸다. 조선에 직접 찾아가서 그 나라를 살펴보고 하루 빨리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 달라는 편지였다. 월드 크리스천 마인드를 가진 가우처 목사는 견미단 일행을 놓치지 않았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 개화파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왔다가 예수님을 영접 한 이수정의 소개로 한국의 개화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김옥균과 각별했다. 맥클레이 선교사의 사정을 듣고, 김옥균은 고종황제 앞으로 보내는 친서를 써서 준다.
윤치호는 스무 살 때 고종의 허락을 얻어 1885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미국 총영사 G. 스탈의 알선으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했다. 여기서 3년 6개월 동안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고, 앨런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대학서 신학과 영어코스를 수학하고,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동안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수강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계몽활동의 필요성을 깨닫고 귀국하여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평양 대성학교를 세우고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말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기에 인천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기독교 복음을 먼저 접할 수 있었다. 아펜젤러도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하여서 한 주일 머문 후 일본에 갔다가 6월 20일 다시 나와 7월 29일 서울로 들어가기까지 38일 인천에 머물면서 한양 선교를 준비했다. 서울지역에 선교가 정착된 후 1888년 서울 정동에서 사역하던 올링거는 전도인 노병일을 인천에 파송해서 전도한 결과 김기범과 이명숙, 장경화 등의 교인을 얻어, 1890년 안골에 6칸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내리교회는 인천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로 처음에는 제물포교회라 불렸다.
1896년 4월 서울 이남지역 관리자로는 스크랜턴(施蘭敦) 선교사였으며 1898년부터 수원 공주지방 순회구역 전담선교사가 된 스웨어러(서원보 徐元輔 W.C. Swearer) 선교사는 1899년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이들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주시켜 정착시킴으로써 복음의 터에 수원종로교회가 태생되었다. 1902년 2월 7명(남3, 여4)이 등록을 하였다. 지역의 인사 김제원, 홍돈후, 김연구, 임면수, 차희균, 이하영 제씨는 메리 스크랜턴(M.F.Scranton)의 기도와 헌신, 베크(S.A.Beck)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5명의 학생으로 교회 안에 남자매일학교(삼일학교)와 여자매일학교(삼일여학교 현 매향학교)를 세웠다.
장호원감리교회는 1900년 4월 처음으로 죽골 김마리아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죽골교회가 태동되었으며 1903년 3월 속회가 조직되었고 1904년 4월 예배당건축을 하였다. 1913년 현재의 위치인 청미면으로 이주하였으며 1914년 장호원교회로 개칭하였고 2019년 현재 119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02년 8월 남한지방 수원구역 이천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3년 8월 초대 문경호 전도사 부임하였다.(서원보(W.C.Swearer)선교사 시무), 1904년 8월 2대 고시영 전도사 부임하였다.(변조진(G.M.Burdick)선교사 이천지방 선교책임자) 1905년 선교정책에 따라서 이천구역, 여주구역, 광주구역이 분리가 되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의 영향을 받았던 구연영 전도사는 1907년 7월 일제의 총살로 순교하였다. 그 후 1912년 2월 남한산성 임정재 성도 자택에서 현 광주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으며 이천지방 감리사 번교진 선교사가 겸임하다가 후에는 홍성하 목사, 함동회 목사, 장영준 목사 등이 목회를 하였다. 1904년 전덕기 전도사가 상동교회 안에 세운 상동청년학원은 1907년부터 신민회의 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감리교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당시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으로 불리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난 후 별세를 하였다.
흔암리 선사유적은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로 쌀·보리·수수·조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유명해졌다. 집터는 남한강과 평행하는 긴 구릉에서 남한강 쪽으로 뻗은 지맥의 표고 123m 능선 위에 있으며, 이 지맥은 강가에서는 20∼30m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 3000년 전경 청동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단비교회,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부론교회,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삼동교회가 세 개의 도가 만나는 지역에 있으며 횡성 문막서 흘러드는 섬강이 강원과 충청북도 경계를 지나며 흘러내리는 남한강 본류와 삼합지역서 합류 여주 이천을 지나 팔당호에서 북한강과 만난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었던 흥원창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설치, 운영되던 조창 중 하나이다. 양광도 소속의 원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이나 한양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던 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조창 중 하나였다. 문막읍은 명칭이 사제면, 건등면, 문막면으로 변천하였고 과거 물막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광활한 평야 뿐 아니라 강원도 내에서 제일가는 선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과 각각 인접해 남한강 지류인 섬강의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곡창지대이다.
여주 강천섬 동편에는 강천면 굴암리, 서편에는 점동면 흔암리가 자리 잡고 있다. 문막 쪽에서 부평 가마섬을 지나는 섬강은 부론 쪽에서 흘러내리는 남한강본류와 삼합지역에서 만난다. 이 지역에 모래톱으로 강천섬이 생겨났으며 100여년 전만하더라도 이 지역에 이호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처리교회 류광형 목사는 처리교회(범솟교회)는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 선사유적이 았는 흔암리지역에 있던 나루에 주승구 성도가 세례를 받을 무렵 처리 큰 동네 임씨네 집에서 선교사들을 거처하게 하며 한강을 따라 원주(문막), 충주지역으로 선교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하였다.
1890년대 중반 미국선교부가 배를 타고 나루에 들려 선교한 12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강천교회와 분리되어 개척된 신암교회는 농촌지역에 있지만 윤재식 장로를 비롯한 권사들이 합심하여 해외선교를 비롯해 어려운 교회를 도와준 교회라고 이강민 목사는 개략적인 교회사를 들려주었다. 태국, 필리핀 등을 비롯한 해외선교에 열정을 다하는 윤재식 장로는 중앙연회 장로회 부회장과 여주시기독교평신도연합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모범적인 장로였다. 40년 된 신암교회는 교회설립 후 다른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도와주는 복을 누렸다고 감리사였던 이 목사는 자랑하였다.
삼군교회는 임성택 장로가 청장년선교회 미국 UMC연수에 동행하였으며 미국선교부가 육로를 통하여 선교를 할 때 여주지역에서는 중심이 되는 교회였다고 한다. 당시 강천교회, 처리교회 등이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세례를 베풀고 선교활동을 하여 오늘날 여주지역 감리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2019년 9월 현재 교회에서 발행하는 주보에 근거하면 1890년대 이후 원주군 서면지역이었던 강천교회(125권,1894), 북내중앙교회(121권,1898), 여주군 지역이었던 여흥교회(123권,1896), 처리교회(122권,1897), 삼군교회(121권,1898), 여주중앙교회(117권,1902) 등으로 창립년도를 기록하고 있다.
1895년 5월 지방제도의 대개편으로 8도제도를 폐지하고 23부제도를 실시하는 동시에 각 부에는 관찰사를 두고 군에는 군수를 두어 관할하였다. 23부제도는 1896년 폐지되고 전국은 13도체제로 하였다. 원주에 있던 강원감영(관찰사)은 폐지되고 춘천은 1896년 8월부터 강원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884년 일본 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가 고종을 접견하고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었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감영이 있던 원주를 찾아 관찰사를 접견하였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1898년 감리회 선교사들은 춘천, 충주, 문막 등 한강을 거슬러 선교 하였다.
1890년대 중국 선교를 담당하던 남감리회에 소속한 윤치호가 귀국하였다. 당시 고양 읍에 고양교회는 1897년 시작된 우리나라의 장자교회다. 1대 담임인 미국 남감리회에서 파송된 리드 선교사가 1897년 5월 장년 24명, 아동 3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자옹 윤치호 선생이 대지와 예배당을 기증했다. 1897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의 강원도선교 결정으로 1898년 나봉식 정동렬이 춘천지역 선교를 시작하여 퇴송골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1901년 춘천 퇴송골에 첫 속회가 조직되었다. 이덕수가 전도사로 내려와 아동리에 초가를 매입한 후 1901년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에 의해 교회 개척되었다.
1887년경 윤치호와 남궁억은 선교 영어학교 출신으로 나중에 사돈관계가 되었다. 윤치호는 상하이로 건너가 남감리회가 운영하는 중서서원, 미국 에모리 등을 거쳐 교육, 사회, 청년활동을 하였으며 남궁억은 성주 목사, 양양군수를 역임하다 홍천으로 귀향하여 모곡학교를 설립 해 무궁화를 보급하였다. 1898년 의병출신 장춘명 권서(勸書)가 전도하였다. 한강을 따라 강천. 문막 등에 전도로 기도처소를 마련하였다. 1905년 남감리회 무스(J.R.Moose, 1864-1928) 선교사가 장의원 권사와 같이 원주를 방문 본부면 상동리 풀밭에서 한응수, 한치문, 장호운, 김용덕, 엄용문, 윤만영 등과 첫 예배를 드렸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주도하던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으로 도피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1896년 23부로 개편된 지방조직은 관찰부로 하였다 1년 후 재개편 13도가 되었고 서대문 밖에 있던 경기는 수원, 원주에 있던 강원은 춘천으로 변경되었다. 1885년 한양으로 입성한 미국감리회 선교부 아펜젤라, 스크랜톤은 정착이 되자 1888년 아펜젤라를 중심한 미국감리회 선교부 일행은 1896년 지방조직 개편이 된 충청남도 수부 공주, 충청북도 수부 충주, 강원도 수부 원주 등 주요거점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관리들과 선교정책에 관한 담화를 하였다.
미국감리회 선교회 조선본부가 있던 한양과 남한강을 통하여 수로를 이용하던 교통망에 의하여 강원 수부 원주군 서면(강천면, 지내면)이었던 지역에는 1894년 이호나루가 있던 강천교회가 설립이 되었으며 여강 건너편 흔암나루를 통하여 1896년 여흥교회가 설립되었고 1897년 처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여주는 1902년 1월 초대교역자로 장춘명 전도사(1902. 5 - 1913. 6)부임하였고 그 해 11월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Mrs.Mary F. Scranton)의 주선으로 여주읍 창리에 여주중앙교회 개척되었다.충주는 1905년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에 의해 충주 서문 밖 근처에 교회가 개척이 되었다.
현재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경기도 접경지인 부론면(동부, 부론교회), 점동면(중앙, 삼동교회), 앙성면(충북, 단비교회)이 섬강, 청미천, 남한강이 만나는 삼합지역이다. 여주지역은 충주 수부에 속하였다가 수원 수부로, 강천, 북내지역은 원주 수부에 속하였다가 수원 수부로 변경이 되기도 하였다. 1880년대 조선의 정치상황인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고종의 개혁정책과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의 선교정책이 만나게 되었다. 가우처, 김옥균을 통하여 학교, 의료 등 협약이 맺어지며 1890년대 중국을 거점으로 하는 윤치호 등 미국 남감리회가 합세 하였다.
1890년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 등으로 지방간의 경계가 변경되며 현재 경기도지역은 미국 북감리회의 선교가 선교초기부터 계속되었으나 충청북도, 강원도지역은 미국 남감리회의 선교가 활발하게 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강원도 삼도경계지역은 지방행정구역 개편 영향도 받게 되었다. 지방행정구역에 따라 교회 행정구역인 연회와 지방회도 달랐다. 현재 강천면과 북내면 지역은 강원도 원주군 서면, 문막면과 경계를 이루다가 경기도 여주군에 편입되며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중앙연회로 교회행정구역이 되었다. 삼합지역 가운데 충주시 앙성면은 동부연회에서 충북연회가 되었다.
미감리선교부는 1898년을 기점으로 나루가 있던 강천,처리와 문막, 춘천에 선교하였으며 1901년 춘천중앙교회, 강릉중앙교회, 1902년 이천중앙교회, 여주중앙교회, 1905년 원주제일교회, 충주제일교회 등이 설립되었으며 1905년에는 감리교회는 110여개이었다. 1906년 횡성교회, 1907년 제천제일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감리회 선교 100주년을 넘어 200주년으로 향하는 현 시점에서 교회사를 정립하고 감리회 선교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해 후세에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함께 하는 남한강 삼합지역인 강천섬이 적지로 판단이 되어 성지추진위원회 구성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