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의 벽을 넘어서야(9.22 주일낮 설교요약)

오세영
  • 1415
  • 2019-09-25 01:52:43
요21:17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참담한 가슴을 안고 고기잡이에 나선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지를 확인하는데 베드로가 부인한 숫자만큼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세 번째 동일한 질문을 하시자 너무도 답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더 잘 아신다고 진정성 있게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가슴을 열어 보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겠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상당한 거리인데 예수님이라고 누군가 확인해 주자 베드로는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배보다 먼저 육지에 도착하여 주님을 반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말하실 때 절대로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죽으신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함께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떠나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어이없게도 하룻밤사이 닭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부인했던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보다 더 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지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심정은 정말 주님과 함께 죽고자 하였는데 결정적 순간에 그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이야기는 베드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감성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백 번 천 번 다짐해도 생활 속에서 무참히도 넘어지게 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선하심 자체였기에 그 인품을 보며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주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채찍으로 성전을 정화 할 때 상을 둘러엎었다면 무척 과격한 것이지만 그 누구도 주님께 항의하지 못하였던 것은 주님의 모습에 압도되었던 것이지요.
거기에 하늘로 부터 직접 주시는 듯한 주님의 말씀, 그리고 기적과 표적 등 놀라운 일들이 날마다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 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끔찍했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배반한 것은 그 신앙이 감성의 벽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의 수련은 주님께 대한 감성적 교제의 수준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들려주는 저 하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과 지옥을 믿게 하고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사는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신자 된 이들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 앞에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 있을까요! 복음 안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이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틀림없이 주님을 사랑하지만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가 부인 된다면 역시 베드로처럼 감성의 벽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는 탄식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감성적 신앙에 속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히 있음을 보며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요14:15)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기까지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충성을 다짐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내 생활속에서 구체적인 순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감성적 신앙은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는 삶이 되어 죄로 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백과 행함이 일치하는 언행일치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감성의 벽을 넘어 순종하기까지 하는 것이 언행일치이며 신행일치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향기 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 했을 때 “빌립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요14:9)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성의 수준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주님을 보여 주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말과 행실을 통하여 주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된 지식은 우리의 감성을 충만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의심하지 않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순종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걸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연습”은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이 전심전력으로 연습하는 의미의 단어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은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이루어 냈다 하여도 경건에 이르는 삶에 철저하지 못하였다면 주님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월을 낭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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