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과 최용신은 같다 그러나 다르다.

민관기
  • 1669
  • 2019-10-05 08:52:54
누군가와의 언행에서 장운양전도사가 최용신을 언급했다.
유와 최는 둘 다 감리교임인은 분명하다.

*. 유관순.
이화학당 시절 31혁명 집회 참여. 담을 넘어 갔다. 학교 관계자들이 막아 어쩔 수 없이.
학교가 강제 휴학되어 고향 천안으로 가 아직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교인들과 고향인들을 3000여 명 혁명에 참여시켰다. 당시 현장에서 30여 명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부모나 친인척이 거의 학살 당하는 판국에 그는 오빠 언니와 같이 피체 당했다. 걸상을 집어 던지는 등의 공판투쟁으로 민족대표들보다 형량이 높은 2~3배 높은 6년형?을 선고 받아 투옥중 강력한 옥중투쟁을 벌여 옥중순국하였다. 거개 가 다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하는 사실에서 매우 많이 벗어난 사실이다.

옥중투쟁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당시 옥중에 있던 몇 인만 아는 것이고, 옥을 달리 하는 다른 감방의 수형자들은 유관순의 존재를 모른다. 한 20여 명? 어윤희, 채혜수, 박인덕, 조화벽, 신애라 등?과 면회를 간 김성수로 나중 이아주의 남편이 된다.

아무튼, 민족의 누나이자 인류의 빛인 그는 피체된지 다음 해인 1920년 순국한다. 내년이 순국 백주년이다. 시신은 곧바로 인척들에게 인도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거니와 남아 있는 인척조차도 거의 없었다. 오촌 정도가 있었다나? 하여,국제 관계에 폭로하겠다는 이화의 페인과 프라이에게 처참한 시신은 인도되어저 정동제일교회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예식은 치러졌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배재 학생들 몇 명과 이화 교우들 몇 명이 따르는 그런 그 것. 그 곳은 후에 파손되어 솬순은 무후 선열이다.

관순의 죽음은 40여 명이 알고 있었다. 하여, 그렇고 그렇게 지내다가 1945년 광복 이 후에야 같이 징역을 산 박인덕에 의해 증언되어 조화벽과 전영택(채혜수의 아내)의 소설이나 글로 1946년인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영화화'되거나 뭐 이래서 그의 삶이 서거한지 35년이 지나서야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40여 명에서 4000만으로의 전환.

한편, 김구, 이준, 윤봉길, 안중근, 김좌진 등 감리교인들의 삶은 일찍이 알려저 건국훈장 기준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서를 1962년 받았으나, 관순은 당시 3등급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올해 드디어 법에 맞진 않으나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감리교회로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유관순의 민족운동 그 자체로 인함이 아니다. 그의 장렬함을 아는 이는 불과 몇 십명에 불과하나 몇 십년의 사 후엔 민족족기 선양엔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용신을 보자.
1935년 서거. 원산 태생. 감리교인으로 감신 중퇴. YMCA추천으로 안산 도래하여 불과 200여 명의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빛글 배움. 헌데 그의 죽음엔 1300여 명. 전국에서 명사들이 모였고 한 빛처녀의 죽음에 중앙언론이 수차 보도했으며, 빛처녀 첨으로 사회장이었다. 담으론 엘리스 아펜젤러 그도 빛처녀였으나 미국인이었다. 이 땅 삶시절엔 그냥 그저 그런 삶이었다. 그러나, 용신은 사 후 그의 삶의 행적이 빛을 발한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그를 민족의 최고 여성으로 만들고자하는 염석주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안산과 수원의 거부였다. 10만석꾼 이었다. 여운형과는 절친으로 그가 중앙언론에 용신의 서거 부고가 실리게하며 사회 여러계에서 추도문=시 발표까지 한것이었다. 한 처녀의 죽음을 한 나라가 이렇게 가지 한 예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민족은 민족 생멸의 위기에 있었다. 경술왜란 이 후 참 어려운 삶을 연명만 했으나 1935년 이 후는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중왜전쟁, 만주사변, 상해사변 등이다. 이 때 민족은 최후의 결단을 해야 했다. 한편으론 살아는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강압에 신사참배에 동의했다. 허나, 또 한편으론 심훈의 상록수와 김교신과 유달영의 '최용신평전'으로 민족은 응수했다.

최용신 평전은 한 2000여 부 발간되어 전국의 학교와 교회 등에게 배포되었다. 일찍이 독립신문 발간때에 신문 한 부를 동네 사람 수 백병이 읽었듯, 평전 또한 한 학교에 들어가면 전교생이 다 읽었다한다. 특히, 감리교 신학대학생들은 평전니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다렸다나? 학교엔 딱 한권의 책이 왔다. 전교생이 한 200여 명이되나? 한 권가지고 다 돌려 읽었단다. 책이 짧고 평이체로 쓰여져 있어 사실 한 나절이면 다 읽었단다. 자기들 선배에 대한 최초의 평전이니 안 읽은 빛여남이 없었을 것. 허니, 2000여 부의 평전은 전국에 돌려저 20여 만에겐 읽혀 졌다 한다.
*. 난 내가 가지고 있던 최용신 평전을 최용신기념관에 기증했다. 이는자랑질이다.

이것이 뭘 의미하냔 것이다. 2000여 만 동포 100/1의 20여 만은 이를 자기만 알고 있지는 않는다. 자기들 지인이나 가족 그기로 교회 단체들에게 용신의 삶을 소개한다. 그도 그렇게 고생하며 버텻는데 우리도 넘 힘들지만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는 보자는 의지를 서로간에 다지는 그것.

민족생멸위기 민족의 버팀목.
그래 용신이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티자~



그리고 빛회복후 1945년 관순의 옥중 삶이 알려져 글이나 영화 여러모로 알려지니 민족은 다시 삶의 감사를 느끼기 시작했으려나?
난 이 글을 쓰며 뭐가 다르고 같은지 좀 그렇긴 하다.


오늘 내가 관순과 용신의 삶을 빛으로 썻다.
역시 알려지는게 조아^^
허나, 나중에 알려져도 누군가만 알고만 있어도 된다란 사실을 확인했다.


난 오늘 내가 잘아는 한 목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전영택은 자신의 인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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