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박해(迫害)1

함창석
  • 1251
  • 2019-10-11 21:33:54
박해(迫害)

산돌 함창석 장로

박해란 개인이나 집단이 개인 또 다른 집단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흔한 형태는 종교적 박해, 인종적 박해와 정치적 박해이며 이중에는 자연스럽게 서로 겹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고통을 가하고, 괴롭힘, 고립, 투옥, 두려움이나 고통은 박해가 발생하는 경우 생기는 모든 요소들이다. 고통은 충분히 극심한 피해자들이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다.

迫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白(흰 백)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白은 촛불을 환하게 밝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순수하다’ ‘희다’나 ‘깨끗하다’라는 뜻이 있다. 迫은 본래 ‘가까이하다’나 ‘친하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둘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을 정도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후에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핍박하다’나 ‘다급하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였다.

害자는 ‘해치다’나 ‘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宀(집 면)자와 丰(예쁠 봉)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丰자는 풀이 무성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서는 흉기를 그린 모양자로 응용되었다. 집안에 어지러운 말다툼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글자로 본래의 의미는 ‘상해를 입히다’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해치거나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한지라. 그가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으니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있나이다. 그리고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다니엘에게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으매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박해는 핍박으로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를 입힘이다. 특히 믿음을 말살시키거나 개종(改宗), 배교(背敎)를 강요하기 위해 개인이나 집단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믿음을 말살시키거나 개종,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개인이나 집단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이유에서 박해당한 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숭배자 아합과 이세벨 치하에서 박해를 피해 시내(호렙) 산까지 도피해야 했다. 유다 왕국 말기 예레미야는 거짓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죄목으로 시드기야 왕의 신하들에 의해 수차례 구덩이(감옥)에 투옥되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바벨론과 바사 제국의 신하들로부터 여러 차례 모함과 배교의 유혹을 받고 사자 굴에까지 던지어졌다.

신구약 중간기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헬라주의를 강요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마당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고 할례를 금하며 식용이 금지된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면서 거부하는 자를 가혹하게 죽였다. 신약 시대에 지역적이긴 하지만 네로 황제(A.D. 64년경)로 시작하여 갈레리우스 황제(A.D. 303-311년경)에 이르기까지 자행된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 집안에서 천주교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다. 폐제분주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교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인 잠정적 변법에 의해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바 있었다.

1919년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 런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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