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강해:애통하는 마음과 주님의 위로(10. 13주일낮 설교요약)

오세영
  • 2304
  • 2019-10-14 21:34:38
마9: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께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각양각색의 병자를 치료하시고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처럼 그 무리들을 언제나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면 고아보다도 더 불행하게 됩니다.
양은 혼자서 먹이를 찾을 수 없고 목적지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이끌림이 있어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이기에 고난 가운데 있고 기진한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처럼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예수님 당시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하여 메시야의 탄생이 있기까지 언제나 이스라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대제사장이 있고 사사시대를 비롯한 걸출한 영적지도자가 있었던 선지자 시대에도 여전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난과 기진함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7)
하심과 같이 인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까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기까지 모든 인간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는 군중이며 이스라엘 백성이고 오늘날 세상가운데 있는 모든 인생들입니다.
그 무리 가운데는 병든 자, 약한 자가 있고 세리와 창기도 있으며 대제사장,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런가 하면 나다나엘과 같은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나 긍휼의 대상이었던 그 무리, 즉 군중들이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 무리들에 의해 죽는 줄 알면서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시며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리 즉 세상 가운데 있는 이들을 진정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이기에 당연히 자신의 가는 길을 알 수도 없고 자신이 하는 일을 분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진리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무리들은 진리를 알 수 없어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무리 즉 세상 가운데 있는 인생들 자체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무리 가운데 있는 한 개인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리 가운데 있었던 어떤 한 개인이 찾아오거나 긍휼을 원하였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들은 물론이고 니고데모에게 친절히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외로운 삭개오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살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사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기꺼이 용서하시며 찾아가 주셨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 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도 용납 할 수 있고 받아들입니다.

불쌍히 여기게 되면 그들을 위해 진정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기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셨던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무지한 무리들을 향한 애통하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무덤 앞에 서서 함께 눈물을 흘리시게 되었습니다.(요11:35)
이러한 모습은 진정 인생의 비극이나 슬픔 앞에 애통해 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롬8:26) 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 애통해 하시는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요, 마땅히 기도할 바도 모르기 때문”(롬:26) 이라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진정 복된 길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애통해야 할 것은 많지만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 있는 이 무리 즉 군중, 이 세상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무지함과 이기심 속에서 충돌하고 원수 맺는 것이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되어 있기에 혼돈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 들입니다.
우리는 이 무리들을 보며 애통 할 수 있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를 찾은 양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얻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으로 부터 넉넉한 위로를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으로 부터의 위로는 오직 애통하는 이에게만 주어지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세상의 것으로 애통한다 한들 어찌 주님이 위로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 세상을 품고 그 무리를 위해 애통하는 이에게 저 하늘에서 주시는 위로가 얼마나 넘쳐 나겠습니까!

주님의 위로를 받는 이들은 나와 다른 무리를 향해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 등장하는 무리들을 봅니다.
정치적 경제적 또한 각종 사건에 관계된 무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광화문과 서초동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나와 다른 무리를 향해 악하고 독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며 이해해 주지 못한다면 하늘로 부터 온 지혜는 아닙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어느 무리에 속해야 하고 어느 무리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하는 지 깨어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무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직 내가 진정으로 무리를 품고 애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무리들을 품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나와 다른 무리를 감동 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긍휼을 담지 않은 모든 눈빛과 몸짓 그리고 언어는 상처와 불신을 주는 것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듯하지만 목자를 찾아 그 목자로부터 위로를 받은 평안하고도 사랑이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무리들이 단지 손에 태극기나 촛불 밖에 든 것이 없다하여 평화적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미움과 비하 그리고 멸시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행군이라면 주님으로 부터 나온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세상의 무리들을 향한 애통이 있은 후 그 무리들을 바라봅시다.
주님께서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마음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외침 앞에서 세상은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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