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요 8:2-11)

최세창
  • 2721
  • 2019-10-19 03:09:12
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의 다음 행동에 대해, 사도 요한은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라고 하였다.
이 문장은 누가복음 21:37-38과 같다.
감람산에서 하나님과 밤을 보내신 예수님이 “아침에 다시 성전” 곧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셨고, 집에서 가족들과 밤을 보낸 “백성이 다” 예수님께 나왔으며, 예수님은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사도 요한은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라고 하였다.
“서기관들”은 그람마테이스(γραμματείς)로서 바벨론 포로 후기의 율법의 전문적 해설자요 교사들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뛰어난 계급을 대표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공회(산헤드린)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유대 관료 제도에서 대제사장과 그 가족들 다음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에 고착되었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고착되었다(더욱 자세한 설명은 막 1:22의 주석을 보라).
“바리새인들”은 1:24의 주석을 보라.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교권자들의 추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의 시간을 보내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모여든 백성에게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거리인 간부(姦婦)를 끌고 온 교권자들과, 그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살기등등한 군중과, 간음죄를 저지르고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간부(姦婦)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상황이다. 다양한 인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교권자들은 음계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 점에 대해, 사도 요한은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인 교권자들이 제거할 대상인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이여”(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라고 부른 것처럼, 대체로 음모는 존경심으로 위장되어 전개되는 것이다.
교권자들은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라고 설명하였고, 계속해서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간부(姦夫)와 간부(姦婦)에 대한 모세의 처벌은 죽음이다(레 20:10, 신 22:22). 제사장의 딸이 간음했을 경우의 처벌은 불태워 죽이는 것이다(레 21:9), 그리고 약혼녀가 간음했을 경우의 처벌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다(신 22:23-24). 이 구절을 근거 삼아 여기에 언급된 간음한 여자를 약혼한 여자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으나(Meyer, Plummer in 이상근), 처녀가 간음했을 경우의 처벌 역시 돌로 쳐죽이는 것이므로(신 22:20-21)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에스겔 시대에는 간음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돌로 쳐죽이거나, 칼로 베어 죽이는 것이다(겔 16:38-40).
교권자들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라고 한 것을 미루어 보아, 예수님 당시에는 간음한 자들을 돌로 쳐죽인 것 같다. 그렇게 잘 알면서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지 않고, 예수님 앞에 데려온 것은 간교한 계책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선생”이라고 호칭하면서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은 아주 교활한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사랑의 메시아인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대로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라고 하면 메시아로서의 행보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고, 또한 당시의 유대를 통치하던 “로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들에게 속한 권리, 즉 생사권을 주장했다고 고소할 것이다”(A. Barnes). 반면에, 간부(姦婦)를 용서해 주라고 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는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받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교권자들의 간교한 계책과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사도 요한은 【6】“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하였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페이라존테스, πειράζοντες)”①는, 교권자들의 질문(5절)이 실은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라고 대답하셔도 문제가 되고,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대답하셔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권자들의 교활한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대답하시는 대신에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슨 글자인가를 쓰셨다. 이 글자 내용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대답하시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예수님에 대한 교권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사도 요한은 【7】“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는 교권자들이 잠시 동안의 예수님의 침묵을 자기들의 교활한 의도에 대한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몰아대고 있다는 뜻이다.
대답하도록 몰아대는 교권자들을 향해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저자의 야고보서 1:2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죄 없는 자”(아나마르테토스, ἀναμάρτητος)에 대해 (1) 죄를 지을 욕망까지 없는 자라는 설(J. H. Bernard, “Plummer” in 이상근), (2) 특정한 죄인 간음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라는 설,② (3) 일반적인 죄가 없는 자라는 설③이 있다.
(1)설은, 예수님이 교권자들에게 그렇게까지 높은 도덕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또 교권자들이 그렇게까지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은,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려고 모였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고 했는데(9절), 그 무리가 다 간음죄와 같은 죄를 범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가 떠난 간 것으로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호스킨스(Hoskyns)는 “그의 대답이 제기한 유일한 문제는 죄인이 남녀 인간을 다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행동할 수 있느냐이다.”④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죄가 없으신 메시아로서의(7:18, 8:46, 고후 5:21, 히 4:15, 벧전 2:22-23, 요일 3:5, 솔로몬의 시편 17:40-41, 유다의 유훈서 24:1, 레위의 유훈서 18:9)⑤ 권위를 가지고 근본적인 문제에 착안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즉, 단 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롬 3:10-18)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먼저 돌로 치라”는 간부(姦婦)의 죄에 대해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M. Henry, J. Wesley). 신명기 17:7에는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A. Barnes, “Meyer”(in 이상근), M. Henry, A. Clarke.
3) H. W. Watkins, “Meyer”(in 이상근), “Hoskyns”(in J. H. M ayfield), J. Wesley, C. R. Erdman, J. H. Mayfield.
4) in J. H. Mayfield.
5) 저자의 고린도후서 5:21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합의 하에 만들어진 법이나, 제도상의 공권력에 의한 보상과 징벌을 부인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 자신도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온 것이며(마 5:17), 다 이루기 위해 온 것이라(마 5:18)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취지는 개인의 언행이든 공권력 행사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권자들에게 대답하신 후의 예수님에 대해, 사도 요한은 【8】“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하였다.
역시 이 글자 내용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교권자들을 비롯하여 그 간부(姦婦)를 돌로 쳐죽이기 위해 모인 무리가 다 떠날 때까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교권자들을 비롯한 무리의 반응에 대해, 사도 요한은 【9】“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라고 하였다.
간부(姦婦)에 대해 살기등등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교활한 계책을 세운 교권자들을 비롯한 무리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양심’(쉬네이데세오스, συνειδήσεως)⑥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6) 저자의 로마서 2:15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부터 시작해서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떠나가 버렸다. 떼를 지어 몰려왔던 그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 것이다. 사람이란 군중과 함께할 때에는 자기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간부(姦婦)와 그녀의 죄가 남은 것이다. 죄가 없지 않다는 점을 시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들 역시 그 예수님 앞에 서 있어야만 하였다. 이 세상에 주님 예수 앞에 서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다.
무리가 떠나간 후의 예수님에 대해, 사도 요한은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하였다.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쳐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무리가 다 떠난 뒤에, 주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간부(姦婦)의 마음을 울렸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정죄한”(카테크리넨, κατέκρινεν)은 ‘심판하다’, ‘유죄 판결을 내리다’,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판단하다’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애로운 질문에 대한 간부(姦婦)의 대답과 예수님의 처리에 대해, 사도 요한은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살기등등하던 교권자들과 무리를 정죄할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자각시켜 물러가게 한 예수님을 보고, 간부(姦婦)는 “주여(퀴리에, κύριε: 4:1의 주석을 보라.)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한때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본 것이다.
주님 예수는 그 여인을 향해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다. 즉, 정죄할 죄이나 정죄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분별없는 용서란 죄 의식과 죄책감을 무디게 하거나, 죄를 조장하는 폐단이 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용서하지 않으신다. 죄란 인간을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고(8:34), 결국엔 죽음과 멸망으로 몰아가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사 64:6, 롬 6:23, 약 1:15).⑦
물론,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도록 하시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란 여기까지이다. 즉, 저지른 죄와 죄의 위력을 알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7) 저자의 로마서 6:23과 야고보서 1:15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304-310.

필자의 사이트 : newrema.com(T. 426-3051)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7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이전 최세창 2019-10-19 개혁을 위해 성경, 혹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의 문제
다음 관리자 2019-10-20 주여!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