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

장병선
  • 1748
  • 2019-10-31 15:08:31
이율배반/박충구교수

1.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한 요소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교회는 종말론적 희망의 공동체라는 주장을 한 신학자도 있다. 이 말이 건전하게 사용될 때는 교회가 이 세상의 것에만 집착하여 타협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완전한 것이 올 때를 늘 생각하며 불완전한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는 신앙을 고취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다. 그러나 신학의 역사를 보면 이런 신앙을 자극하는 종교는 이내 위험에 빠지곤 했다.

종말론은 매우 위험한 신앙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을 약화하고 맹목적인 신앙에 신도들을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신앙에는 두 가지 속성이 등장한다. 신적 능력에 의한 강력한 정화의 요구와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은 자기 삶이 더러워지면 질수록 정화되기를 바라는 내적 욕망을 가지게 되고,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죽음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종말론적 신앙은 현실에 좌절하고, 죄의 역사에 민감한 이들, 그리고 자기 죽음을 직면한 이들에게는 비록 현실에서는 비참한 처지에 있다 하여도 궁극적인 구원의 지평을 바라보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종말론적 희망에 담긴 강력한 정화의 욕망,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신체성에서 해방되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사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적 영역이다. 일부 히브리 사상가들은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할 때 일어나는 불의의 제거와 고난당한 의로운 자들을 향한 위로가 주어질 것을 믿었다.

2.

기독교 역사에서 당연히 주인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고난의 상징인 예수다. 그 예수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낼 심판자로 등장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을 가지게 만든다. 현실적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이들에게는 깊은 위로를 주는 신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지만, 마치 종말이 올 것처럼, 어리석은 처녀가 아니라 지혜로운 처녀처럼 등불을 켜들고 기름도 준비해 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신앙의 한 측면이다.

종말론적 신앙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종말론적 신앙에 사로잡히면 비 종말론적 신앙을 모자란 신앙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은 바른 신앙을 가졌지만 다른 이들은 모자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정화를 요구하는 신앙과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은 부딪치게 된다. 하지만 강력한 정화의 신앙은 현실을 곡해하여 바로 보지 못하는 오류를 유통한다. 종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의 책임 지평이 약화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신앙에 빠지면,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심지어 자녀 양육의 책임의 중요성도 망각한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는데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일로 인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겪던 이들은 현실적 책임의 지평을 버려두거나 외면하고 열광적인 집회에서 희열을 느끼며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가 된다. 이런 신자는 쉽게 종말론적 신앙을 가르치는 목사의 사병(私兵)이 된다. 목사의 요구대로 집문서도 가져다 주고, 목사의 요구에 따라 모든 것이든지 다 시행하는 순종적인 신자가 된다. 심지어 자기 목숨도 내놓는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는 이 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사회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거짓 희망을 주장하는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나타난다. 한동안 10월 종말론을 주장하는 목사에게 속아 학생은 학교도 안 가고, 엄마 아빠는 집회에 가고 가정이 텅 비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었다. 일부는 자기 재산을 팔아 바치고, 젊은이들은 집회의 안내자가 되어 봉사하는 일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데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고 공부가 무엇을 위한 것이 되겠는가? 이렇게 신자들이 현실적 긴장을 버리는 순간을 이용하여 종말론을 주장하던 목사가 순진한 성도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정을 망치며 등쳐먹기도 한다.

3.

이렇듯 종교는 복종하며 순종하는 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신자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 초대형 교회 10개 중 대부분이 우리 한국 사회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남달리 종교적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13세기 르네상스 이후, 16세기 계몽주의를 거치고, 정치적 우상을 제거해온 18세기와 19세기 정치 사회적 혁명을 겪은 서구사회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사유의 역사가 대단히 짧다. 그 결과 우리 주변에는 권위주의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종교, 교육, 사법, 검찰, 국회, 등등의 영역에서 오만한 자들이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복종과 순종을 요구하고, 합리적 사유와 비판적 사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인자들이다. 많이 배운 자의 오만, 많이 가진 자의 오만, 큰 힘을 가진 자의 오만은 어디서나 유통되고 있으며 이는 곧 우리의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는 암묵적인 권력으로 다가온다. 이런 권력이 가장 비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전근대적인 유사 신분 사회 조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종교집단이다. 감독-감리사-목사-장로-권사-집사-직분 없는 평신도 체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서구사회에서는 종교 집단의 로마 군단 식 계급적 신분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다.

연합감리교회의 평신도 대표의 임기는 3년이다. 하지만 그 중 1/3은 해마다 갈린다. 예컨대 대표가 9명이라면 매년 3명이 나가고, 3명이 새로 들어와 일하는 구조다. 그러니 누군가 아무리 충성스러워도 교회를 독점할 수 없다. 모든 이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며 일한다. 더군다나 그 대표에는 젊은이, 여성 대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총회부터 개 교회에 이르기까지 나이 많은 남자 늙은이들이 모든 자리를 꿰차고 무능하게 앉아 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할 능력이 거세된 이들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이상한 집단이 되었다.

늙은이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가? 이들에겐 교회 세습도 가능하고, 사기꾼도 교회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의와 진실이란 이들에게 소중한 가치가 아니다. 권위를 부리며 행세하는 것이 살맛 나는 일이며,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가 된 것처럼 행세한다. 나이 많은 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들은 무엇보다 돈을 최고로 아는 속물들이다. 타협의 명수들이다. 감독직도 돈을 쓰며 차지하려 하고, 장로직도 돈을 내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각종 헌금 항목을 만든 자들도 이런 늙은이들이다. 자유와 해방, 평등이라는 용어를 교회가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용어들이 늙은이들을 공격하는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단장 선거 때마다 건네주는 돈 봉투를 받아 챙기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구역질 나는 짓을 버젓이 하면서 장로 행세를 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론데 돈을 건네는 자들이 바로 목사 장로다. 어느 총회에서는 5억, 10억이 교단장 값이 되기도 한다. 이런 행태를 유통하는 이들이 바로 나이 많은 장로, 목사들이다. 이런 교회가 무슨 정의, 평화, 자유, 평등, 생명 가치를 이해할 능력이 있을지 나는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교회 수장인 감독이라는 자가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일정에 넣고 순회하며 챙기는 것이 돈 봉투다. 한 교회에서 설교만 하고 예배가 끝나지 않았는데 강단에서 슬며시 사라진다. 그에겐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 시간도 아까워 한다. 다음 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일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돈 봉투가 더 생긴다.

이런 자들이 평신도들에게 종말론적 신앙을 가르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결함(cleansing)과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dead)에 대한 신앙, 그것은 이런 사이비 종교인들이 충성스러운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자기의 사병(司兵)으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 현실에 집착하는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하나님의 영과 뜻을 앞세우며 허황한 악의 표상을 지목하면 그의 사병이 된 맹신도들은 사나운 개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종교재판이란 것도 이런 구조에서 일어난 것이고, 십자군 전쟁도 이런 사이비 종말론이 배경이 되었던 사건이며, 1978년 가이아나 존스 타운의 인민사원 사건도 그 구조가 같다.

4.

엇 저녁 감신대 대학원 강의를 마치고 청와대 앞을 지나며 내가 목격한 것은 청와대 앞길을 점거한 전광훈의 사병이 된 기독교인들이었다. 전광훈이는 맹신도를 동원하여 도로를 점유한 채,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놓고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철야 기도라고 시키고 있는 듯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기도하자”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종말이 오고 있으니 열심히 모이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그 논리 구조가 같다. “종말이 오고 있다”는 거짓말에 속은 신도처럼,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거짓말에 속은 불쌍한 신도들은 도로 반쪽 위에 거적을 깔고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광훈이가 시키는 대로 문재인 정권이 망하기를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한 귀퉁이에는 전광훈에게 용처를 맡긴다는 쪽지가 붙은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바라보며 갑자기 가평 골짜기가 떠올랐다. 한 해 전 산수가 화려한 청평에서 가평에 이르는 지역을 돌아보면서 나는 골짜기마다 신흥 종교의 요람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통일교 교주의 무덤, 창세기 에덴동산을 연상하게 만드는 거대한 에덴 종교 콤플렉스 건물이 들어선 골짜기도 있다. 최근에는 신천지가 대지를 구입하고 그들의 센터를 지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경에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탄식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아무것이나 믿는 백성이다. 아무것이나 믿는 백성은 희망이 없다. 결국 속임수를 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 모두가 맹신에서 기인하고, 맹신자를 마치 자기의 사병처럼 이용한 종교 지도자들이 기획한 일이다. 사람을 악마로 몰아 불태워 죽이는 일을 했던 종교재판이라는 제도와 종교 재판관들도 존재했었다. 독일 뮨스터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며 무장봉기를 선동했던 멜히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을 따라나섰다가 선량한 신도들이 몰살을 당한 경우도 있다. 한국판 종말론자 이장림을 따라다니다가 패가망신한 경우 등등 역사적 사례는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반민주적인 요구를 하는 그대의 목사를 너무 믿지 말라. 그대의 우둔함은 죄보다 더 무서운 악일 수도 있다.

근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종말을 맞은 기독교도들은 아마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형성되어 남미 가이아나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몰살한 짐 존스의 신도들일 것이다. 존스는 세상이 사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고, 마침내 핵무기까지 만들었으니 종말의 시대에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며 공포를 조장하고, 현실에서 좌절한 이들을 모아 “인민 사원“(People's Temple) 종교 집단을 이루었다. 그는 그의 신자들에게 국가나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의 추종자들은 존스를 의혹하고 비판하는 국회의원, 신문 기자들을 학살하는 일까지 벌였다. 진상을 파악한 미국 정부가 교주를 체포하려 하자 교주의 명령에 따라 1978년 11월 어린 아기부터 84세에 이르는 노인까지 914명이 청산가리가 든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다.

이들은 자신을 “예수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이라고 믿던 사람들이었다. 청와대 앞에서 거적을 깔고 열심히 기도하는 신자들, 그들에게 문재인 정부를 빨갱이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가르치는 전광훈, 전광훈이의 선동을 따라 밤새도록 헛되게 기도하는 신자들의 열광적인 모습 - 나는 여기에서 짐 존스의 사병이 되었던 세력과 다름없는 열광적인 신자들을 본다. 그들은 참된 복음을 따라 산다고 굳게 믿으며 모든 재산을 털어 내던 존스 신자들의 그림자를 닮았다. 짐 존스의 신자들은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은 믿음에 빠져 자신의 삶도 목숨까지도 모두 버려야 했다. 기독교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신앙생활이란 열심을 가진다고 하여 바른 것이 아니다. 바른 것을 믿어야 올바른 신앙이다.”

거짓된 것을 주장하며, 증오를 부추기는 사이비 목사를 따라가는 신앙은 그대의 시간, 재산, 삶과 열정 모든 것을 헛되게 삼키며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종말을 가르치며 세상을 깨끗하게 하자는 요구는 그 동기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일 경우, 비민주적일 경우,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의 도구가 된다. 복음의 정신에서 이탈하여 이율배반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종말론에 담긴 참된 정의와 사랑의 길이 정반대로 정의와 사랑의 길을 외면하고 불의와 증오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열광적인 신앙을 조장하는 사이비 목사들이 순진무구한 신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광화문에 몰려가는 기독교인들은 더 늦기 전에 제정신을 찾아야 한다.

(아래 사진(좌)은 청와대 앞길을 점거하고 주저앉아 있는 전광훈 신자들, 그리고 짐 존스 와 그 신도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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