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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선교연회에 대해 할 말 있다
민돈원
- 2357
- 2019-10-30 19:16:03
입법의회가 열리는 첫날 저녁 뜨거운 감자중의 하나였다.
그날 결정을 못하고 다음날로 의결하기로 한 채 넘겼다.
또 하나의 뜨거운 공방은 감독제를 2년제로 하느냐 4년제로 하느냐에
적잖게 찬반이 엇갈렸고 우여곡절 끝에 가부를 물어 결국 4년제를 의결했다.
왜 호남선교연회를 정식연회로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을까?
왜 우리는 감독회장임기를 2년과 4년 가지고 다투고 있을까?
그들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저런 논리를 주장한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둘 다 감독 문제가 공통분모이다.
감리회 구성원이라면 누군들 정도의 차이야 있겠으나
감리회 사랑하지 않는 분들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겉으로는 사랑하는 제스처를 쓰면서도 일부 소수 계층들이 버리지 못하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끝까지 감독직을 탐하는 자들이
거룩을 가장한 꼼수 놀이를 연상케 함은 비록 나만의 염려는 아니리라
아무리 근사한 예복을 입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며 감리회 입법의회나
총회라는 이름으로 거행한다고 할지라도 돌아서서 알고 보면 세 싸움,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끌고 감을 지울 수 없다
약 25년전 호남선교연회 서리로 목회 첫발을 내딛을 때의 추억을 회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호남지역에 당시 각 군단위에 감리교회가 없는 곳이 여러 곳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영광군이었다. 그런 영광군에 감리회로서는 최초 교회가 세워졌다.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시작했다.
교회도 없던 곳에 내려가 식당집 방 한 칸이 내가 사는 거처의 전부였다.
교회건축이 시작되기 전 창립예배 장소는 초가삼간 터 토방과 천막이었다.(첨부파일)
7년쯤 되어 하나님 은혜로 자립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11년 2개월 후 플러스 재정을 후임자에게 물려준 후 떠나
삼남연회 진주지방 성림교회 은퇴목사님 후임자로 청빙되었다.
삼남연회에서 7년 합하면 도합 18년 목회 후 호남과 삼남연회를 떠난 셈이다.
호남선교연회에서 목회할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한번은 신학교 M. Div 총동문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목회하던 분이 내가 영광에서 목회한다니까 하는 말이
‘유배지에서 목회하네요’
라는 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유배지에서 목회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약 20여년전 역사적인 호남선교대회가 광주에서 열린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서해안에 있는 태안지방, 예산지방에 공문을 보내
광주로 가기 전 이곳은 광주로 가는 길목이니 내가 목회하는 영광을 들러
전도해 주고 광주로 이동하도록 간곡히 요청했다.
이에 기억하기로는 그 요청받은 3지방이 전세버스를 영광으로 돌려
기쁨으로 전도한 후 광주 대회장으로 함께 갔던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는 목사다.
비록 그곳을 떠나 있지만 지금도 가라하면 현재 이곳은 안정된 곳이지만
그곳에 가서 목회하고 싶은 사람이다.
누구보다 애정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회 승격해 달라는 그 저의가 순수한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묻고 싶다.
몇몇 그 자리 탐하는 자들의 잔치와 영광이 되어 밥그릇 싸움이 되지 않을까
개탄스럽고 안타까운 충정에서다.
앞으로 건강한 감리교회가 되려면 방만한 행정의 효율성과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현재 지방회를 활성화하고 연회 업무를 과감히 본부와 지방회로 분장 이관하는
개혁을 시도해야 할 때이다.
호남은 누가 감독이 된다고 한들 아무 상관없는 목회자들이 훨씬 많다.
무슨 말인지 이 정도 운을 떼면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지금까지 순수한 호남선교연회가 또 하나의 타락한 선거로
본질을 호도하는 변질된 감독 양산하는 연회로 전락할까 심히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