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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강해: 선한일의시작과 끝 (10.27 주일 낮 설교 요약)
오세영
- 1480
- 2019-10-29 19:19:01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가장 착한 일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심으신 것입니다.
새 생명은 거듭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시며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착한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장차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이르도록 우리 안에서 시작 하신 일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듭난 생명은 성화의 삶으로 계속 성장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의 길로 인도 받는 이들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르도록 성장해 갑니다.
존 웨슬리는 성화를 지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계속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 하신 주님이십니다.(마5:48)
또한 아버지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벧전1:16)
우리는 이러한 부르심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착한 일을 하시면 시작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게 되어 죄로 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듭난 생명을 계속 성장케 하는 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죄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즉각적인 것이지만 성화의 삶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죄로 부터 돌이키는 것은 즉각적인 것이어서 죄악 된 삶을 즉시 벗어버리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명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히 지난날의 삶을 회개하며 용서 받게 된 것입니다.
죄악 된 삶을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영접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하여도 우리의 죄성과 기질은 여전히 지속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며 탄식했던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마다 탄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성과 인간의 기질로 인한 것입니다.
죄악된 삶을 청산했지만 종종 죄의 세력에 넘어지는 자신을 보며 탄식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쉽게 다다르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하여 탄식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즉각적인 열매가 있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야 할 열매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을 택하여 장자권을 주었던 하나님은 야곱에게 선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음에도 그는 여전히 야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워 천사와 씨름하며 이스라엘이 된 것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비록 20년 세월을 야곱으로 살았지만 20년 동안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이스라엘이 되기 위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은 온전히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실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로 특별한 체험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며 감격하고 감동 받았던 시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은혜로 충만한 그 시간에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변화된 것처럼 확신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모습은 여전히 서서히 드러나며 나를 누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복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 보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많은 성장과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 그리스도인들마다 좀 더디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너희에게 구원이 되는 줄 알라(벧후3:1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시며 우리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삭개오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은 죄악 된 삶을 청산한 것입니다.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가 이제 그리스도를 보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룻밤 주님과의 대화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삭개오도 그날의 은혜와 감격이 있었음에도 계속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편 강도가 사면령을 받아 십자가에서 내려왔다 하여도 그는 계속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것을 비유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큰 감동을 받았을 때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죽은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기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만한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내가 주님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겠지 하지만 죽은줄 알았던 내가 어느새 다시 깨어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장해 가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어서 급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 까지 주님은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서서히 인도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믿으며 우리는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변화 자체가 느리다는 것이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느슨해도 좋다거나 게을리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성품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바라보아도 우리의 성장은 느리기만 합니다.
그만큼 죄에 익숙한 인간의 몸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나라를 침노해가는 이들만이 성장하게 되고 변화되게 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말 할 때 이 연습은 헬라어“귐나조”라는 말인데 운동장에서 선수가 경기에 나가기 위해 땀 흘려 연습하고 훈련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연습은 막 경기를 앞둔 선수처럼 긴장되게 그리고 치열하게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은 이 세상 어떤 성장보다도 고귀한 것이기에 그 만한 수고가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힘쓰지 않는다면 결코 성장하지 못합니다.
죄성에 깊이 물든 연약한 육을 가진 우리이기에 서서히 성화의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주님의 계획과 인도를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