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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성서이해 4 “오래된 미래 예수 그리스도”(요 1:1-3/히 1:1-3)
최은석
- 1577
- 2019-11-29 06:32:03
제가 지금 책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스웨덴 출신의 호지라는 한 여성 언어학자가 인도 북부 히말라야 지역의 라다크라는 지역을 1975년 연구차 방문하면서 약 20년 동안 그 지역의 변화된 모습을 글로 쓴 내용입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순수한 사람들이 모인 라다크, 물질도 부족하고 자원도 부족하였지만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을, 그곳이 라다크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서구 자본주의 문명이 들어오고 산업화, 과학화가 가속화되면서 겉으로는 풍요해지만 원래의 라다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 책은 라다크의 현장 기록이며 문명 비판서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곳 라다크, 그러나 바로 그곳이 인류가 다시 회복해야 할 미래가 있음을 말합니다. 서구식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 무너지는 가정과 공동체의 회복을 호지 여사는 라다크를 통해서 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 나름대로 성경을 통해 본 올해의 예수님을 ‘오래된 미래’로 정하고 제목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이고 미래는 미래인데 어떻게 이것이 하나로 말하여질 수 있을까? 이 의미가 마지막에 가시면 풀리게 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태초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 땅에 오사 인간의 삶의 미래까지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오래됨이라는 단어로 그 분을 말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분은 영원히 우리의 미래 까지도 주장하고 계시는 분임을 안다면 그 ‘오래된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래된 미래 중 ‘오래됨’ 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오래됨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도 그 말씀과 함께 있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은 첫날부 터 하나님을 위해 준비된 말씀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했습니다. 표준 새번역은‘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 하고 있고 공동번역은‘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중요한 단어가 세 개 나옵니다. ‘태초’ ‘말씀’ ‘하나님’ 태초가 무엇일까? 본문에서 태초의 희랍어는 ‘아르케(arche)’입니다. 아르케라는 단어의 뜻은 요한이 살았던 당시 그리이스 철학과 비교해 본다면 사물의 원형(原形), 본질(本質)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 근원 이런 말 나오면 머리 아프다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는데 쉽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아들의 본질은 어디 있을까요. 저입니다. 저 안에 있는 유전자들이 아들 에게로 유전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저의 본질은 누구입니까? 저희 아버지입니 다. 유전자는 몇 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수천년전의 미이라의 유전자 를 채취할 수 있는 것은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중의 하나는 본질에 대한 외면입니다. 사랑 그러면 사랑의 본질이 생각나야 되는데 돈이 생각납니다. 공부 그러면 선생님이 생각나야 되는데 학원이 생각납니다. 교회 그러면 십자가와 복음이 생각나야 되는데 건물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인도 민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수도승이 시골 마을을 지나 가다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이가 오두막 앞에서 혼 자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뜨지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아이 는 그 그림자를 잡으려고 달리면 그림자도 그만큼 달리는 것입니다. 한참을 뛰어 다니다가 결국 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승이 그 아이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더니 아이의 엄마가 달려 나왔습니 다. 수도승님, 이 아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매일 매일 저렇게 그림자를 잡으려다 지쳐 울고 있습니다. 좀 도와 주십시오. 수도승은 즉시 아이에게 달 려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아 아이의 머리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 러자 그림자가 잡힌 것입니다. 아이는 자기의 머리를 잡고 웃으며 외쳤습니 다.‘잡았어요, 드디어 잡았어요’아이는 결국 자신의 손이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예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그림자를 붙들고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붙잡아야 될 것! 진짜 확인해야 될 것은 안하고 다른 것에 몰두하고 않는가입니다.
태초를 안다는 것, 본질, 근원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원(根源)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보면 뿌리 근 자에다 근원 원자로 물이 흐르는 원 샘물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강원도 태백에 가면 한강 발원지라고 하는 검룡소라는 샘이 있는데 그냥 물이 똑딱 떨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거대한 한강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만약 그 샘물이 없었다면 한강은 시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가물어도 그곳만은 물이 나오는 곳처럼 그런 곳이 근원입니다.
3. 본문의 말씀이라는 단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를 이 당시로 본다면 이것 또한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의 대화를 로고스라 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도 로고스라 했고, 세상의 본질을 말할 때도 로고스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로고스가 단순히 세상의 근본을 말하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 하나님이 곧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아르케, 본질을 말씀이라고 하고 있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쉽게 푼다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요한은 같은 말을 연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데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아우르는 단어! 세상을 충만케 하는 단어!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원형(原形)은 하나님 이십니다.
성서에서 가장 먼저 원형을 알려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원형들이 등장합니다. 창조의 원형, 인간의 원형, 죄의 원형, 살인의 원형, 심판의 원형들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나머지 모든 성경은 바로 이 원형을 상실해 버린 인간이 다시 그것을 회복하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에덴의 회복으로서 새 예루살렘, 죄의 고통의 회복으로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심판의 회복으로서 영생. 이러한 것들이 잃어버린 원형의 회복의 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려 합니다. 이것을 크게 본다면 구약과 신약의 틀 속에서 읽어질 수 있습니다. 언약하신 자와 이루시는 자, 창조와 타락의 역사와 구원과 회복의 역사, 부분적 예언과 완전한 예언 등이 틀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모든 원형을 회복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입니다. 잃어버린 에덴의 회복에, 죄의 고통의 해방에서, 심판의 두려움에서 가장 결정적이며 완전한 영향력을 가지고 일하신 분!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을 뛰어 넘어 결정적이며 완전하며 충분한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내려오시지만 이미 그 분은 창조와 더불어 계셨고 모든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 증거 되셨고 내려 오사 이 세상을 구원하며 인간과 세상의 미래까지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오늘 바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이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로 우리에게 들려져야 되고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형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내려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입니다.
‘우리는 이 아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는 이 아들을 보면서 모든 피조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봅니다. 모든 것이 -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천사위의 천 사들 까지 - 참으로 모든 것이 그 분안에서 시작되고, 그분 안에서 자신의 목 적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고 지금 이 순간 에도 만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창조주 임을 말하며 원래 그분의 자리는 하나님 자리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원형의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그러나 그 분은 이미 오래된 분으로 이 세상의 근본적인 본질로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계셨고, 창조 가운데 계셨고, 하나님 안에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은 ‘오래됨’입니다.
4. 이제 ‘오래된 미래’ 중 미래를 살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수백년 동안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 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 게 직접 말씀 하셨습니다’
1절은‘옛적’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옛적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씀 드린다면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의 행하심을 사람과 사건을 통해, 자연 현상을 통해, 율법을 통해, 예배행위를 통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말합니다. 다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2절의‘이 모든 말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오심을 왜 마지막이라 설명하고 있는가? 바로 그 분의 오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 자체가 세상의 마지막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77년 대통령배 축구 이야기입니다. 말레이시아와 우리 나라가 대결했는데 거짓말 안하고 후반전 끝나기 5분 전까지 패색이 짙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가 4-1 로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진 경기입니다. 해설자가 이렇게 말 하더라고요! 이제 끝났네요. 그런데 이 때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지 아세요. 차범근 선수입니다. 차범근 선수가 무려 5분을 남겨 놓고 혼자 세골을 넣어 4-4로 비기는 아마 한국 역사의 길이 남을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해설자의 맨트였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한골을 넣으니까‘아! 아깝군요. 따라 붙기가 힘들 것 같네요. 또 한 골을 넣으니까 이 제 좀
뛰는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네요. 마지막 한 골을 넣으니까 아!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차범근 선수를 잘못 보았네요. 진짜 위대한 선수입니다’
전후반 90분 동안 24명의 선수가 열심히 뛰었는데 이 경기는 누가 결정 내었습니까? 차범근 선수입니다. 24명의 선수 중 종결자는 차범근 선수였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알려주기 위해 누구를 보냈습니까? 수 많은 사건을 알려 주었죠. 구약에서 예수님을 알려주는 사건들이 무엇이 있지요! 아담에게 가죽옷 입혀 주신 것,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는 이야기, 모든 사람을 향하여 대신 시내산에 올라 중보기도하는 모세의 이야기, 제가 잘 쓰는 오르난의 타작마당 이야기! 다 누구를 알려주는 사건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의 모든 의미의 집합체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며 종말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린다면 종말 사건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을 이미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계시가 완성된 것입니다. 완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계시는 계시가 아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옴으로 더 이상의 계시는 필요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말이 필요한 것인 아니라 한 마디 말씀 아들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종결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오심으로 모든 예언과 모든 제사는 종결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 제사나 계시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특징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시간의 주인이면서 그 분을 통해 역사의 궁긍적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가 구약과 신약의 큰 줄기라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과 성취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취를 통해 인간의 죄와 삶의 고통, 죽음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다른 사람을 통해, 또는 다른 행위를 통해 해결된 문제를 남겨 놓은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길, 생명의 길에 들어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니 성장이나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에서 본다면 또 다른 순환적인 시간 안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미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행하여지고 성취된 것입니다. 모든 약속의 성취로서, 그리고 마지막 완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며 성취 되었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 안에 우리의 미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육신으로 오신 모습 속에서, 이 땅에서 생명을 드리신 것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심 속에서 세상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근본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고 그 분을 믿는 자는 그분이 이미 미래의 승리자 인 것처럼 완전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5. 2002년 인가요. 할머니와 손자가 좌충우돌 하는 영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라는 영화 기억나시는 지요. 제가 오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깊은 산골에서 문명을 전혀 접해 보지 않은 할머니와 도시 문명에 길들여진 손자의 갈등은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나 어느덧 서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옵니다. 내일이면 할머니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 꼬마는 할머니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보기도 하고 도시의 문화를 알려 주려 하지만 할머니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마지막 밤에 손자는 할머니를 위해 무엇을 해 줄수 있을 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할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밤에 할머니를 위해 방안에 있는 바늘을 있는 대로 찾아서 그 바늘귀에 실을 꿰게 됩니다.
바늘 귀에 들어가는 실은 단순한 의미 이상을 그 영화에서 보여 집니다. 오래됨으로 대표된 할머니, 그리고 미래로 대표되는 손자가 지금 바늘과 실이라는 주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늘 귀로 들어가는 실! 바늘 귀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실을 넣을 수 있을까요. 또 바늘 귀가 있다고 해도 실이 없다면 바늘은 쓸모가 없습니다.
여기서 바늘귀는 근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늘귀로 들어가는 실은 근원과 현실을 연결시켜주는 방법입니다. 바늘귀와 실로 인해 오래됨과 미래가 연결됩니다. 근원과 현실이 연결됩니다. 바늘과 실이 꿰어지는 것처럼 할머니와 손자는 이미 하나였던 것입니다. 다만 그 의미를 알기 까지는 구체적 매개물이 필요함을 못보았던 것입니다.
성탄의 참뜻이, 강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상 결코 시간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것을 정확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니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그러기에 영원한 시간의 주인을 만남을 통해 유한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만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오래된 그러나 미래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수많은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수많은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단 한분 그분을 만나면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능력이,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며, 완전해 지며, 충만케 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오래된 미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날마다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