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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성서이해 3 “영원한 고향 예수 그리스도”(눅 2:1-7)
최은석
- 1645
- 2019-11-29 06:27:23
미학적 성서이해 3 “영원한 고향 예수 그리스도”(눅 2:1-7)
1. 우리는 다 누구나 삶을 살아 가면서 문득 내가 태어난 고향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북한 땅에 고향을 두신 분들이나 수몰지역에 고향을 두신 분들은 고향 이야기나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 한층 고향에 대한 향수를 기억하곤 합니다.
제가 잠깐 대구에서 공부할 때 추석명절에 인천 집을 가야하는데 차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명절이라 집을 가고 싶었던 저는 추석 전날 저녁에 대구역에 무조건 나갔습니다. 혹시 남는 차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천만 다행이었지요. 어떤 분이 갑자기 일이 생겨 서울로 올라가는 차표를 반납하기 전에 제가 구입해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탄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십니까? 추석명절이라 원래는 없는 칸인데 추가로 투입한 칸이었습니다. 일명 명절 특별기차 맨 끝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칸에 맨 끝자리가 바로 제가 앉은 자리였습니다.
이 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향의 뭐길래! 고향에 가면 그립던 순이도 시집가고 없는데, 그립던 흙먼지 나는 길도 포장되어 사라졌는데 이렇게 힘들게 뒤꽁무니에 매달려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저나 여러분이나 다 고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에서 태어난 자가 강을 떠나서 살다가 문뜩 물을 보면 자신이 태어난 강을 생각하듯이, 산에서 태어난 자가 산을 떠나서 살다가 풀을 보면 자신이 태어난 산이 생각나듯 우리의 마음 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향을 생각할까요. 성공의 밑바탕이 되어서! 그래도 고향에 가면 도시에 살던 사람이라 대접을 잘 받을 것 같아서요. 이런 것 때문이라도 고향을 찾는 사람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을 어머니 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고향(home) 이란 우리가 언제든지 돌아가도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는 곳’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관계없이, 우리의 사회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줄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고향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고 계신지요!
2. 성탄절과 고향 언뜻 보면 아무 관련없이 보일 수 있는 이 두 단어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이끌고 있음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명령을 내려 제국전역에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것은 구례뇨가 시리아 총독일 때 실시한 첫 인구조사였다. 모든 사람이 자기 조상의 고향으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요셉도 인구조사를 받으러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다윗의 동네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그곳으로 가야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갔는데 그녀는 임신중이었다. 그들이 거기 머무는 동안 출산할 때가 되었다.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 방이 없어서, 그녀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2장 1절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정식 명칭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인 왕은 법령을 공포하여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곳의 호적 조사 즉 인구조사를 하도록 명합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중앙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원활하게 하는 데는 통계의 조사가 필요하였고 이러한 연유에서 호적 조사를 당하는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직접 자기의 고향을 찾아가 호적을 정리함으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로마에 보여 주려고 합니다.
4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누가는 요셉의 고향을 베들레헴으로 정하고 다윗 임금의 후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곳은 이미 사무엘상 20장 6절에서 다윗의 가족이 모여 매년마다 제단을 쌓던 곳으로서 누가의 의도는 아기 예수 또한 다윗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베들레헴에 도착해보니 요셉 가족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왔기 때문에 굉장히 어수선하였고, 집들마다 그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 때문에 분주 복잡한 가운데 있었고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수 없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이 한 곳 있는데 본문 7절의 마지막 부분‘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
입니다. 표준 새 번역에는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에서 자칫 잘못하면 범할 수 있는 번역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관 즉 여관은 지금의 호텔이나 모텔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관의 희랍어는 카탈루마(ka
talruma)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여관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 말로 하면 사랑방 정도로 생각하면 알맞은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드면 이렇습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의 가옥특성은 부엌이 마루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또는 물을 끌이기 위해 불을 지피는데 그 아궁이가 마루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조선족 교회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런 곳에서 가르쳤습니다. 방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따로 떨어진 부엌도 아닙니다. 마루와 부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이곳에 사람뿐만 아니라 얼어 죽을 수 있는 짐승들도 같이 있고 저장이 용이하지 않는 채소들도 이 안에 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곳, 홀로 있던 쓸쓸한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짐승이 함께 있던 장소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늘 욕을 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 입니까? 바로 여관집 주인입니다. 한번 방을 안 빌려 주었다가 2천년 동안 욕을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본문 자체내에는 여관집 주인이 방이 없어서 요셉과 마리아와 그 아기 예수를 내몰았다라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케네스 베일리 같은 성서신학자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방은 손님방 방에 붙어 있는 바깥방과 같은 곳으로 이곳은 추운 겨울에 밤에는 가축들이 들어와서 잠을 자고 낮에는 그곳을 청소하여 다목적으로 쓰던 방으로서 아기 예수는 더러운 마구간이라고 보기에는 깨끗한 곳에서 각처에서 모여든 친척들에게 둘러 싸여 축하 받았다 라고 말하는 새로운 해석을 말하기도 합니다.
4.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누가가 어린 아기 예수가 누울 방이 없었다고 쓰고 있는 점에 좀 더 깊은 믿음의 눈을 요청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 여러분이 누울 수 있는 삶의 공간을 만드셨습니까?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입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방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마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친구 아버지가 사장님인 것 같은데 방이 1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2층에도 있는 것입니다. 방이 1층에 세개! 2층에 두 개! 저는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1층과 2층에 나누어 사는 줄 알았는데 다 자기 집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살던 집은 전세였고 방 두 개였지만 하나는 창고로 쓰고 그냥 다 같이 한방을 쓰던 때라 놀라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티칸 궁전이 있는데 이곳의 방은 2000개가 넘으며 지하는 미로로 되어 있어서 한 번 잘못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북경에 가면 유명한 궁궐이 있습니다. 자금성이라고 하지요. 그곳에 방이 몇 개가 있느냐면 9999개가 있다고 합니다. 매일 방을 바꾸어도 27년을 쓸 수 있는 방이 그곳에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황제나 로마의 황제나 그들은 자신의 방을 통해 자신의 권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가 박영한의 소설 제목처럼 ‘지상의 방 한칸’ 을 구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일하고 애쓰셨을 것 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 한칸이 ‘15평 월세집’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 ‘50평 빌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평수의 아파트에서 살든지 작은 평수의 월세집에서 살든지 우리의 생의 목표가 그 평수에 달려 있을 까요?
그렇다면 로마를 세운 아구스도 로마의 황제가, 자금성을 지은 중국의 황제가 가장 평안한 삶을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로마의 황제나 중국의 황제나 자기가 세운 무수히 많은 방을 돌아 다니며 두려움과 근심에 눌러 살았다는 것입니다. 늘 암살의 위험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지상의 삶의 고향에 터전을 내리고 있습니다. 저의 주민등록에도 본적은 서울 특별시 마포구 창전동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아마 요셉이 호적을 정리하러 베들레헴으로 찾아간 것처럼 저도 원 호적을 보려면 마포구청으로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나 마포구청에 가면 저의 본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 까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철학은 고향을 그리는 아픈 마음이다(Die Philosophie ist eigentlich Heimweh)’라고 말하며 당장 우리가 질문해야 될 것은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는가! 하이데거 말로 한다면 돌아갈 고향(故鄕), 존재론적 귀향(歸鄕)이 가능한가 묻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도대체 오늘날 도시에서 사는 문명화된 인간들이 그런 아픔없이 산지 이미 오래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를 세계 대전의 회오리 속에 말하고 있는데 이 물음은 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아닌지요. 현대인의 비극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고향 상실(喪失), 근원 상실(喪失)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가치가, 우리의 생각이 시작된 바로 그곳을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나그네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가에서 태어난 자가 늘 강과 더불어 살면서도 그 강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가 문득 어느 세월에 선가 자기가 왜 강을 사랑하는 가에 대하여 다시 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바로 여기에 한계가 있고 그러기에 아픈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5. 그러나 그렇다고 아픈 마음으로 인생을 의미를 종지을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고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목표를 두고 있을 곳,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될 고향은 땅을 초월한 영적인 의미의 고향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안정된 집이나 일터도, 우리 자신의 손으로 장만한 어떤 이 세상의 터전도 우리가 발 붙일 곳은 아닙니다. 도리어 히브리서 11장에서 에녹이나 아브라함을 향햐여 땅에서는‘외국인이라 나그네라’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 이 땅에서 나그네 된 자들이고 따라서 늘 히브리서 11장 14절의 말씀처럼‘고향’찾는 인생들입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진정한 영적인 고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 줍니다. 즉 누가는 아직도 땅의 논리에, 땅의 계산법에 익숙해 있던 자들에게 도리어 영적인 고향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기 위하여 어린 아기 예수가 누울 방이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모래 사장위에 놓고, 물고기의 아가미가 숨울 찾아 헐떡거리며 비늘이 마르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물고기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가를 연구해 보십시오. 산더미 같은 돈으로 그를 덮으면 행복할까요?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면 행복할까’아닙니다. 물고기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원래 살고 있던 고향 집인 바닷물 속에 다시 놓아 주는 것이 그를 행복하게 해 주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로 인하여 멸망당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혼자 힘으로 살수 있다고 에덴동산을 뛰쳐 나온자 들이지만 우리는 도리어 오염된 죄의 공기로 인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산소 마스크라도 빌려야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소 마스크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의 손길을 통하여 서 만이 우리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는 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고향을 잃어 버린 우리에게 하늘 고향 집을 주심과 동시에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성탄절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성탄절 이후 우리는 인생을 홀로 걷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게 되므로 외롭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성탄의 참 뜻 그것은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성탄 카드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찾아 가야 될 진정한 고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다른 고향을 찾아 영적인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지만 그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그 시대의 땅의 사람들 처럼 생활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지난 한해 땅에 있는 고향을 찾고 만들기 위하여 헛된 걸음을 하지 않았나요.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성탄의 기쁨 이것은 바로 진정한 고향을 찾은 것에서 오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실 자, 내 인생을 이끌 자를 찾게 된 것에서 오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 문병란이 쓴 ‘호수’ 를 읽어 드리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