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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강해: 비판에 대한 교훈(11. 24 주일낮 설교 요약)
오세영
- 1679
- 2019-11-25 18:12:04
비판하는 일을 우리는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면 비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비판은 또한 헤아리는 것인데 비판하고 헤아리면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셔서 비판의 중대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마지막 날에 비판하고 헤아리신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비판은 헬라어로 “크리노”로 “정죄하다” “심판하다”라는 법정적인 뜻을 가진 말 입니다.
영어로는 “Judge”로 판사가 됩니다.
결국 비판은 스스로 판사가 되어 형제를 정죄하고 재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 하시면서도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헤롯을 비판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하였고 헤롯의 잘못을 비판하다 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도 왕과 백성을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금하는 비판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나 공교회 및 공적 유익을 위해 분별하며 판단하는 차원이 아닌 사람의 허물이나 연약함 그리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비판과 정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비판과 정죄가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간음 중 잡힌 여인도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손에 돌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은 주님이 금하고 있는 비판과 정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비판하고 정죄하던 세리와 창기들도 만나주시고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세리와 창기를 비판하며 인사도 나누지 않았던 사람들과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들을 가차 없이 정죄하고 비판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그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비판하시고 정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판과 헤아림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열변을 토하며 비판하는 그 대상의 사람 눈에는 티끌이 들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판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눈에 들보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비판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것이라 하셔서 비판하는 사람의상태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하다 하셔서 인생은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대변됩니다.
우리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아시는 주님은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이 악하고 음란한 인생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바로 악하고 음란한 것입니다.
비판하는 목소리가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깨끗함이 있고 거룩함까지 있는듯해도 그 비판하는 사람은 들보를 가지고 있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티끌을 가지고 있어도 비판과 정죄를 사람에게 받게 되는데 들보야 더 말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비판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내 눈에 들보를 빼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들보를 빼낸 신령한 눈이 되면 주님처럼 긍휼과 사랑으로 인생들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내게 비판 받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 내게 긍휼의 은혜를 입는다면 그가 어찌 감동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주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본 사람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서나 겸손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의 허물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을 보며 비판하기 보다는 긍휼과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비판하지 말라 하신 말씀은 죄를 묵과해 주거나 덮어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혼자서 권면하고 그 다음은 두 세 사람이, 그 다음은 교회에 말하라 하였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 하셔서 죄에 대해서 엄중해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보를 뺀 사람이라면 이러한 절차를 긍휼과 사랑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2:1)
이처럼 비판하는 것은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그 눈에 들보가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의 티끌을 빼라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 입니다.
들보를 빼내지 못하고 있는 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사람이며, 비판 받게 되는 같은 일을 행할 수밖에 없는 수준인 것입니다.
어떻게 비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내 마음에 긍휼과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눈에 들보가 제거된 사람이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긍휼과 사랑이 있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말처럼 자기 자식이 제일이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식을 타인 앞에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내나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긍휼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하지 못하다면 악한 사람들의 문안과 그들의 무가치한 사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할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웃 중 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물을 주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가 십자가에서 들려주는 진리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성도의 능력 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보면 비판과 정죄가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비판하는 나를 비판하고 헤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들보를 빼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성서적 분별력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비판과 정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비판 받을 수밖에 없도록 죄를 범한 이를 긍휼이 여기며 감싸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이들에게 죄로 부터 돌이키기를 권면하거나 충고하지 않아도 사랑과 긍휼을 보이면 그들 스스로
죄로 부터 돌이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주님으로 부터 긍휼함을 얻은 이들마다 모두 다 스스로 회개하였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삭개오, 우편 강도 등 그들 스스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심한 비판과 헤아림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비판의 늪에 그리스도인이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좀 신령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주님께 나라의 운명을 맡기며 믿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까지 어느 진영에 속하여 서로를 정죄하는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긍휼과 사랑을 가진 저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에 사회는 곳곳에서 감동을 받게 되며 바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비판과 헤아림을 멈출 수 없다면 나의 실체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비판과 정죄 그리고 헤아림 대신 인생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