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성서이해 8. “축복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누가복음 1:39-45)

최은석
  • 1979
  • 2019-12-02 23:11:45
1. 한 사람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을 동양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넓은 바다에서 쓸쓸하게 바다속 깊은 곳을 떠돌아 다니는 눈먼 거북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위에는 나무로 만든 목걸이가 하나 떠 있어서 흔들 흔들거리며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바다 속을 떠돌아 다니는 눈먼 거북이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백년에 한번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백년에 한번 떠오르는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를 떠돌아 다니는 나무 목걸이에 목을 걸게 되는 것! 그 드넓은 바다에서 이 둘이 서로 만난다는 것은 기적이기 이전에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자성어로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 합니다. 만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을 비유하거나 또한 실현 가능성이 극히 드문 것을 칭하는 말입니다. 바로 생명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이 잉태되는 것은 기적이요, 그래서 신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 그것도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은 단지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기에는 너무나도 신비한 사건입니다. 우주라는 공간에서 지구의 한 곳 이스라엘이란 작은 땅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 성스러운 구세주의 탄생은 맹구부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기하게도 이 거룩한 구세주의 탄생을 단순히 말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누가는 이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narrative)로 묶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하지 않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 그리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전개하면서 우리에게 예수의 탄생의 신비함을 더 풍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 왜 누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서 거슬러 약 600년 전 까지를 암흑시대, 또는 침묵시대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돌아 온 이스라엘의 땅은 어둠이었습니다. 땅은 폐허가 되었고 성은 무너져 버렸고 성전은 불타 버렸고 백성들은 다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힘든 것은 그래도 이들이 믿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수많은 시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도와 달라고, 진정한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메시야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함이 사라진 시대요, 절망의 시대요, 어둠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남겨 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비야 반열 출신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아론의 가문인 엘리사벳입니다. 사가랴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이고 엘리사벳의 뜻은 ‘나의 하나님이 맹세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간구함이 사라지고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진 때, 또한 그들 부부 또한 더 이상 나이로 인하여 자식의 잉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가는 이들이 그 가운데서도주의 성전에 들어가 직무를 행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캄캄하더라도 하나님은 빛나는 사람들을 준비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도가 땅이 떨어졌을 때도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는데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다니엘이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별과 같이 빛나는 이 부부를 남겨 놓았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 엘리사벳의 잉태입니다. 천사는 남편인 사가랴에게 아내 엘리사벳에게 잉태된 아이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포도주와 맥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며 모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많은 아들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엘리야의 방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오심을 알리고,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녹이며, 완고한 회의론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깨달음의 불이 타오르게 할 것이다. 그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할 것이다(눅 1:16-17)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둠에 휩싸여 있을 때, 절망과 어둠에 있을 때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오심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또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 여인 ‘엘리사벳’ 을 통해 준비시켰습니다.

3. 그런데 또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잊혀진 다윗 왕조의 가문인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복음서에서 이 부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태 한 사람 뿐입니다. 마태는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라 말합니다. 정혼이라는 것은 한국의 약혼과는 다릅니다. 정혼은 준결혼 상태입니다. 서로간에 법적으로는 부부이며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혼 기간 중에 부정한 일이 생기며 특별히 여성에게 이러한 일이 생기면 율법은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 부부 요셉과 마리아! 다 청청변력(靑天霹靂)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찬사로부터 듣습니다. 마리아 또한 천사로부터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어 성령으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요셉은 정혼한 사이로서 마리아의 임신을 받아 들일 수 없었을 것인데 그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요셉이 아닌 마리에게 초점을 두었기에 요셉의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마리아를 생각해 볼까요! 얼마나 두려울까요! 여성이 아이를 임신할 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씨앗이 자신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임신했다고 하니 상상히 가시는지요!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더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없었거든요!

아마 엄청나게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잘못 하다가는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가 욕을 먹고 남편이 된 요셉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담대하게 들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마리아야,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 있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눅 1:32-33)’

하나님께서 한 여인을 향하여 위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을 잉태하였고 그에게 다윗의 왕위가 주어질 것이고 그의 나라는 영원 무궁할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누구도 메시야가 이런 모습으로 한 여인에게 나타나리라 생각 못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자신의 몸에 잉태된 생명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모르는 방법으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 임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메시야의 길을 예배하는 자로, 한 사람은 메시야 그 분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4. 먼저 그림 한 장을 같이 보겠습니다. 로이르 반 데르 바이덴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입니다.

화가는 야외 풍경을 중심으로 두 여인의 만남을 그립니다. 서로 불룩한 배를 만지는 것으로 보아 임신했음을 강조합니다. 길게 늘어뜨린 마리아의 머리는 처녀성에 대한 상징이고, 엘리사벳의 얼굴에 있는 주름은 그녀의 늙음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하늘의 색인 푸른색을 입고 있고 엘리사벳은 사랑의 색인 붉은 옷과 믿음의 색인 흰색 베일을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발 밑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고 이것은 마리아의 순결을 뜻합니다. 저 멀리 정원 저택 입구에 있는 사람은 엘리사벳의 남편인 사가랴로 그를 작게 그린 것은 믿음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나이가 많아 임신을 하게 된 엘리사벳, 그리고 정혼한 가운데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비밀스러운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여인이 지금 임신을 했는데 그 임신들이 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리아는 정혼한 여인입니다. 정혼을 했다는 것은 결혼은 안했지만 서로 엄숙한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부부와 차이가 있다면 동거하지 않으며 육체적인 접촉을 가지지 않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정혼한 여자가 부도덕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될 경우, 여자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마리아에게 아이가 잉태되었다 하니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엘리사벳 생각해 볼까요! 나이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 조차도 이제는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렸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천사로부터 아내가 임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은 남편 사가랴도 벙어리가 되어 듣지를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러 오는 것입니다. 늙은 나이에 창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겁나 다섯달을 숨어 지내고 있던 때입니다.

마리아는 두렵고 엘리사벳은 부끄럽고! 그런데 왜 만났습니까? 두려움보다, 부끄러움 보다 은혜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만남들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닳아 없어질 때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 정채봉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중에서 -

생선같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생선 처음에는 얼마나 윤기가 흐릅니까? 그러나 오래되면 썩기 시작하고 웬지 비린 냄새가 역겨웁게 올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만남을 말합니다. 오래 되면 좋은 향기가 그 가운데 올라와야 하는데 부패한 냄새만 풍기는 것, 왜 그럴까요, 인간 중심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1장 28절 ‘그에게 들어가 은혜를 받은 자여 ’30절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모두 은혜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의 몸을 통해 구세주를 허락하시겠다는 것은 마리아가 자격이 있는 것도, 무슨 마리아가 특별히 선택된 것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탄생에는 은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마리아의 반응이 기가 막혔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나는 죽었구나 하며 도망을 가던지 했을텐데 38절 보시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합니다. 은혜에 대하여 순종하여 그 은혜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부끄러울 수 있는 이 잉태의 사실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1장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돌보셨다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엘리사벳을 돌보셨다,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무슨 만남입니까? 그냥 여성들이 만난 것입니까? 임신부들의 만남입니까? 아닙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혼자 간직하기가 너무 소중해서 지금 만나 서로를 향해 축복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격도 좋고 취미도 좋아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은혜가 떨어지면 그것은 그냥 계모임인 것입니다. 좀 한 주간 살 동안 받은 은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내 자녀를 통해 어떻게 일하시고 있는가 은혜를 나누어야 그래도 그게 예수 믿는 사람 모임이지, 맨날 모여서 세상 이야기 하고 정치 이야기 하면 새신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도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네요. 한다는 것입니다.

5. 두 여인!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있다! 복덩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 안에는 이 땅을 구원할,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며 이스라엘을 왕으로 다스릴 진정한 메시야! 예수님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몸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메시야를 준비하게 할 요한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두 여인은 그 누구보다도 큰 복덩어리를 배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 받은 사람만이 복 받을 사람을 안다. 이런 뜻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복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며 깨닫는 자만이 저 분은 복을 받을 사람이야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두 여인은 안 것입니다. 내 배 안에 귀한 복이 임하였고 이것을 혼자 알기에는 너무 귀해서 만난 것입니다. 세상적인 복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복을 나누기 위하여 만난 것입니다.

변호사의 개가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기 한덩어리를 물고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정육점 주인은 개의 주인인 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만약에 개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쳐 갔다면 그 주인에게 돈을 청구할 수 있는 거죠’‘물론이죠’‘그렇다면 만원 내시오. 댁의 개가 오늘 우리 가게에 와서 고기를 훔쳐갔소’변호사는 말없이 정육점 주인에게 만원을 주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정육점 주인에게 청구서가 날라왔습니다. 발송인은 지난 번 개의 주인인 변호사였습니다. 청구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변호사 상담료: 5만원’

다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무엇을 생각하며 만나는 만남! 결국은 복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꽃과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줄 모르지만 금새 시드는 만남을 의미합니다. 풀은 마르기 마련이고 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화려함만 있고 체면치례나 형식만 남은 만남은 결국 공허함만 남기고 시들고 맙니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매일매일 갖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만남중에 가장 좋은 만남이 무엇일까요. 물질로 만나는 것입니까? 지역으로 만나는 것입니까? 아니며 서로의 이해관계로 만나는 것이 좋은 만남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좋은 만남은 신앙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또한 남이 받은 은혜를 듣고 서로 축복해 주는 만남 이 만남이 우리 모두의 만남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시면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후 곧 바로 일어나서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까?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을 때, 천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된 예를 들었는데 그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는 말씀을 듣지요.

38절에 보면 마리아는 그 말씀을 듣고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는 자명합니다. 마리아는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 현장을 방문하여 그 약속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약속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 약속의 말씀을 서로 나누면서 큰 기쁨을 누립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자 엘리사벳만이 아니라 엘리사벳의 아이가 복중에서 뛰놉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여자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엘리사벳은 계속하여 마리아를 축복하고 격려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그 격려를 듣고 마리아도 46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나눔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된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는 고독하게 홀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 약속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실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동일한 영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엘리사벳도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문안을 듣고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만약 그 자신이 동일한 영적인 경험이 없었고,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마리아를 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눈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나누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믿음을 잃게 만드는 말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실을 더 강하게 부각시켜서 여러분을 낙심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약속의 말씀을 나눌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와 함께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나누십시오. 서로가 축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자고 권면하십시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살자고 서로 격려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두 여인 모두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는 여인들입니다. 한 사람은 늙은 나이에 임신한 것이 부끄러울 것이고 또 한사람은 정혼한 여인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두렵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6. 다시 앞으로 돌아가지요. 맹구부목(盲龜浮木) 한 사람의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탄생을 위해 하나님은 여러사람들을 준비해 놓으셨지요. 의로운 남편 요셉, 의심한 그러나 나중에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사가랴, 그리고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축복의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축복의 만남의 모습입니다. 이 강림절 이 축복의 만남을 준비하며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전 함창석 2019-12-02 감리회 가족(家族)
다음 염범석 2019-12-03 (수정)중부연회 부천제일교회에서 교육전도사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