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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성서이해 7. “약속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마 2:13-18)
최은석
- 1678
- 2019-11-30 17:53:07
극장에서 새치기를 한 덕분에 십만번 째 관객으로 뽑혀 상품을 탄다. 우산을 안가지고 나갔더니 평소 찍어둔 그녀가 우산을 씌워준다. 택시 타려고 서있는데 마침 바로 앞에서 택시손님이 내린다.
방금 말한 것처럼 ‘셀리의 법칙’ 이란 일이 우연히도 자기가 바라는 바대로 진행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머피의 법칙’ 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연히도 나쁜 방향으로만 일이 전개될 때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택시를 기다리면 빈 택시는 반대편에만 나타난다. 건너가면 먼저 있던 쪽에 빈 택시가 자주 온다.’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를 찾으면 주유소는 꼭 반대쪽에 나타난다.’
‘사면서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일수록 계산대에서 바코드가 잘 찍히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면 늘 이 두 법칙이 교차되거나 같이 나타나는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늘 셀리의 법칙만 있는 것도 머피의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예를 들면 이런 일이 한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 때에 시험문제가 바로 5분전에 공부한 부분에서 나와서 기뻐했지만 다 아는 문제도 번호를 밀려써 슬펐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 친 고스톱에서 쓰리고를 맞았는데 막판에 화투 한 장이 모자라 파토가 나서 기뻐했지만 세일을 한다고 하여 백화점을 가보면 꼭 사려는 물건은 세일 제외 품목이어서 슬펐던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 내다 버리려고 마음먹은 자전거를 마지막으로 타고 나갔더니 자가용이 들이받아 공돈이 들어와 기뻐했는데 매일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그 날 따라 택시가 타고 싶어 택시를 탔더니 교통사고가 발생해 몸 고생, 마음 고생 한적 없으신지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리켜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 화와 복은 일정하지 않기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중국 고전인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갑자기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자 노인은 "이 일이 무슨 복이 될는지는 알 수 없소." 라며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몇 달 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 땅에서 좋은 말을 한 필 데리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 일이 무슨 화가 될는지 알 수 없소." 하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이 일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했습니다. 그 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는데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불편해서 전쟁에 나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 세상의 여러 문제 앞에서 슬퍼할 필요도, 기뻐할 필요도 너무 없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머피의 법칙과 셀리의 법칙을, 인간만사 세옹지마라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 삶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攝理)라 말합니다.
이 섭리사상은 단순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져 간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닙니다. 그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어라고 간단히 말하기에는 너무 넓은 말이면서도 생각해야 될 말이기 때문입니다. 섭리는 운명이 아닙니다. 섭리는 미리 정해져 놓은 법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풀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언어라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는 스스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율적 의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반대되는 타율적인 것에 의해 구속되어져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통해 우리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것 같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일이 타율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자율과 타율의 삶을 오고가다 끝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도 아니라 신의 섭리 가운데 우리는 거룩한 능력의 손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루를 살 때도 그의 눈과 귀는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 가운데 인내하며 기도하며 살지요. 고난이 있어도 도리어 무릎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 가운데서는 교만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종시키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펼쳐 나가고 계시고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워 일하시고 있는 가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이렇습니다. 이루어졌느니라, 아니! 예수님은 태어나자 마자 애굽으로 도망자가 되버렸는데, 베들레헴에는 지금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그리고 그곳에서 옛날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세상 말로 우환(憂患)이 겹쳐 있는데, 이루어진 것 하나도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네요. 왕이 태어나면 기쁜 일만 있어야 되는데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때문에 통곡하는 어머니들이 있네요.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도망가는 어린 왕! 예수님의 모습이 있네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연속으로 벌어졌는데 성경은 15절에도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18절에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신기할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려 합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 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 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이 노래가 탄생된 배경은 6, 25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미아리를 거쳐 납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장 즉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미아리 고개는 6, 25때만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미아리 고개는 ‘되너머 고개’ 라 불렀습니다. 되너머! 되놈을 말합니다. 되놈이 누구인가 하면 오랑케 여진족을 말합니다. 병자호란 때 오랑케들이 이 고개로 넘어와 조선을 침략한 것입니다. 이미 미아리 고개는 6, 25이전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던 고개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었던 슬픔이 그곳에 있던 것입니다.
3. 장면을 전환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을 탈출하면서 애굽으로 넘어가던 길에 고개를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고개가 무엇인가! 라마였습니다. 어린 예수님! 포대기에 싸여 황급히 도망치는 중에 라마 고개를 넘어 갔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되는 분이, 방금전 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 하면서 경배 받았던 분이 이렇게 처량한 모습을 하다니! 너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황급히 라마 고개를 넘어 도망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고개의 전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처럼요!
라마! 맨처음 성경에 등장했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야곱의 아내 라헬로 인해서입니다. 야곱이 14년 동안 노가다를 해서 얻은 아름다운 여인 라헬! 그러나 그는 요셉 하나를 낳고 단산을 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베냐민, 요셉의 동생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죽게 되었고 그녀의 묘가 바로 베들레헴 근처 라마에 묻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이라는 이름이 슬픔의 아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야곱의 마음, 어머니 라헬을 잃은 요셉과 베냐민의 마음이 여기 라마에 고스란히 묻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이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
네! 그 옛날 가여운 여인 라헬의 무덤이 있던 라마고개를 지금 누가 넘어가고 있습니까? 쇠사슬에 손과 발을 묶이고 코를 갈고리로 낚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무덤에 있던 라헬이 이렇게 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크게 소리치며 내 자녀들이 다 어디로 가냐 하면서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라헬이 이스라엘의 사라짐을 보고 창자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곡을 한다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포대기에 싸여 황급히 도망길에 넘어갔던 라마고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포로신세가 되어 끌려가던 치욕의 장소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름다운 여인 라헬이 자식을 낳다가 죽었던 슬픔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미아리 고개만 전설이 있던 곳이 아니라 라마 고개도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었네요.
4. 그런데 결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아리 고개할 때 미아(彌阿)는 원래 불교용어입니다. ‘저승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뜻의 용어입니다. 아마 미아리를 넘어가면 옛날부터 있었던 공동묘지와 관련이 된 것을 보여 집니다. 죽어서는 다시 이 세상으로 올수 없는 미아리 고개! 그래서 사람들은 미아리 고개만 생각하면 한 많은 인생살이, 한 많은 내 청춘 하면서 노래방에서 신세타령을 할 때 부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라마고개는 절대로 슬픔의 고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 절망의 고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마 고개에서 죽은 라헬!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국모가 됩니다. 남편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라헬은 바로 이스라엘의 아내요, 그 백성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라마고개! 이스라엘 백성의 수치요, 치욕의 고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억압과 압제의 삶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이 고개를 눈물을 흘리며 가지만 먼 훗날 기쁨으로 이 고개를 넘으리라! 자유와 해방의 깃발을 높이들고 너희들 이 고개를 넘어가리라!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렘 31:17)’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라마고개는 슬픔과 치욕의 장소였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고개를 영광의 장소요, 환희의 장소로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 장소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조차 꺼려 했던 장소였지만 하나님은 그 장소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고개를 누가 황급이 도망치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도망가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왕답지 못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자로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마태를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라헬이 이스라엘의 국모가 된 것처럼,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예수님도 분명히 다시 이 이스라엘로, 당신의 나라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언뜻 보기에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장면을 우리에게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엄마 마리아의 등에 엎혀 도망치는 고개! 예수님이 넘기 전 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기 전 야곱의 아내이지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넘었는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쇠사슬에 손과 발을 묶이고 코를 갈고리로 낚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 너무 난산이 되어 그만 죽고 맙니다.
라마는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 잃은 슬픔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곡이 들려지는 곳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야곱의 마음, 어머니 라헬을 잃은 요셉과 베냐민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힌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 예수님도 같이 고개를 넘고 있습니다. 라헬의 아픔, 포로의 아픔을 예수님이 태어나자 마자 경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억울한 것, 절망스러운 것을 체험하며 당신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5. 여성분들이 잘 하는 공예중에 퀼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이나 모사 등을 넣고 바느질하여 누비는 서양 수예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무늬가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1997년에 나온 미국 아메리칸 퀼트라는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습니다.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고통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르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 주는 재료가 된다. 그리하여 최후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 쪼개진 파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큰 그림으로 볼 것인가! 쪼개진 것으로, 퍼즐조각으로 보면 얼마나 힘든지요, 매일 매일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맞추면 저기가 안 맞고, 오늘 하나 일 해결하면 그 다음날 또 다른 일이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절망합니다. 날마다 좌절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라마고개의 모습을 이렇게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이루어졌느니라(마 2:18).’
이루어졌느니라(πλήρης- 플레로쎄)의 희랍어 단어의 뜻은 이행한다는 뜻과 마무리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빙점의 일본의 여류작가 미후라 아야꼬를 기억하시는지요? 미후라 아야꼬는 평생 동안 병을 몸에 안고 살았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결핵성 척추병으로 8년 이상을 요양소에서 지내야 했고, 파킨슨 병, 여러 종류의 습진으로 피부질환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말년에는 암으로 오랜 세월 고생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몸을 병집이라고 말할 만큼 병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미후라 아야꼬의 생각은 깊었고, 고난 중에도 감사할 줄 알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인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조차 없다.’
이 사실을 알기가 그렇게 쉬운지요. 아닙니다. 알지 못합니다. 왜일까! 바로 이 하나님의 이루심을 경험하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그 많은 고개를 건넌 줄 압니다. 자기 혼자 열심히 일한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업어 주신 것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요!
80년대 우리는‘쓰리랑 부부’를 아실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다 생각은 안나지만 이것은 생각이 납니다. 아내였던 김미화 씨가 김한국씨와 함께 마지막에 가면 야구방망이를 들고 마무리 하며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마무리 하면 다 모든 것이 해결되고 끝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무리 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방망이를 들지도 않았지만, 큰 소리 내지 않으시지만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셔서 완벽히 마무리 하는 분이 계십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완성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라마 고개 언뜻 보면 비운의 고개, 절망의 고개이지만 먼 훗날 이곳은 만왕을 구원할 예수님이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고개가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길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순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이루어 가심을 안다면 지금까지 걸어 온 인생과 이제부터 걸어갈 인생 사이에 무엇을 걸쳐 놓을 것인가요. 절망할 것인가요. 슬퍼할 것인가요.
백창우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 인걸’
네! 내년에도 라마고개가 없을거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 크고 무거운 라마고개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처럼 넘지 마십시오. 혼자 넘으려 하지 마십시오. 섭리하심으로 만드시고 일하시며 완성시키려는 이 하나님의 이루심의 역사를 통해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리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