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나는 거듭남(요 3:3-6)

최세창
  • 2057
  • 2019-12-07 00:31:12
찾아온 니고데모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사도 요한은 【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버나드(J. H. Bernard)는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이 아니라 그의 생각에 대답하시는 것이다[참조: 2:25].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메시아 왕국의 예언자이며 선구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의 참 본질을 오해하였다. 그 나라는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다른 곳인 18:36에 묘사된 것처럼,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나라이었다. 그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표적들이나 기적들에 대한 인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나라에 대한 이해에 더 가깝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 앞서 습득되어야만 할 새로운 영적 시각 능력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의 “진실로 진실로”는 1:51의 주석을 보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Apol. 61)에 반영된 구절이다.①
“거듭나지”는 겐네테 아노텐(γεννηθῇ ἄνωθεν)으로서 ‘위로부터 난다’, ‘새로 난다’, ‘다시 난다’ 등을 의미한다. 아노텐(ἄνωθεν)은 ‘위로부터’ (3:31, 19:11, 약 1:17, 3:15, 17), ‘꼭대기에서’(19:23, 마 27:51, 막 15:38), ‘새로이’, ‘다시’(갈 4:9), ‘처음부터’(눅 1:3, 행 26:5) 등을 뜻한다.
거듭난다는 것 곧 중생한다는 것은 “영적 출생이 하나의 반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귀한 생명으로 출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J. H. Bernard). 중생이란 인격 수양이나, 반복적인 도덕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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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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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율법 또는 양심 행위나, 사색 또는 명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하는 신성이나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구현하는 것이나, 신비 의식을 통한 신화(神化)나, 해탈하는 것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벧전 1:3, 23, 딛 3:5, 요일 2:29, 3:9, 4:7, 5:1). 즉, 중생이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내주하게 하심으로써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1:12-13, 3:3-7, 엡 2:5-6, 10, 딛 3:5).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이다(벧전 1:23, 약 1:18).
특히, 바울은 세례의 의미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는 죄에 대해 주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어 장사되고, 주님의 부활을 본받아 새 생명을 얻어 그 가운데서 행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롬 6:1-11, 골 2:12-13).
중생의 증거는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요일 5:4) 죄를 짓지 않고(요일 3:9, 5:18), 오히려 주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의(요일 2:29)와 선(엡 2:10)을 행하며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4:7). 그러한 의미에서 이 중생의 체험이란 어떠한 종교 의식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다(갈 6:15).
{기독교의 거듭남(중생)과 그와 비슷한 주변 종교들의 교리에 대해서, 슈라게(W. Schrage)가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표현 방식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리라고 약속하는 헬레니즘적인 신비 제의의 용어 및 표상 세계와 유사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물론 그 의미는 다르다. 베드로전서에 따르면, 비록 다시 태어난 자라 하더라도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거나 주술적․자연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무상한 ‘육체’와 ‘시들은 풀’(1:24)로 머물러 있다. 중생이 인간을 피안의 세계로 옮겨 신격화시키는 의식이 아닌 것처럼, 이것은 또한 내적인 체험들과 신비적인 분위기들, 즉 황홀경을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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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비유나 상징도 아니다. 오히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창조된 새로운 삶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경건한 정신적인 현상들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고려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 안에는 인간도(디도서 3:5에 따르면 세례를 통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속성이나 도덕적인 성향을 전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을 전제한다.”}(벧전 1:3의 주석).
물론, 여기의 거듭난다는 것은 세례를 받고 이방 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유대인들의 사상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안 투 테우, βασιλείαν τού θεού)는 마가복음 1:15의 주석을 보라.
“볼 수 없느니라”는 단순히 ‘볼 수 없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누릴 수 없다”(A. Barnes) 또는 “경험할 수 없다”(C. K. Barrett)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니고데모의 우문에 대해, 사도 요한은 【4】“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하였다.
“니고데모”의 우문은 예수님께 대한 조소(J. A. Bengel)가 아니라, 당황해서 한 말(Dods)②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인간성과 중생의 도리를 영적으로가 아니라 육적으로 이해하는 동족들과 같은 그의 영적 무지로 뒷받침된다.
반즈(A. Barnes)는 “첫째, 편견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의 가장 단순한 가르침도 오해하도록 만든다. 둘째,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고 부당하게 보이는 사실도 설명을 들은 후에는 분명해진다. 니고데모에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중생의 교리도 성령으로 거듭난 어린아이에게는 알기 쉬운 교훈인 것이다. 셋째, 학식 있고, 높은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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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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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신앙의 가장 단순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무지하다. 그들이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단순한 사실에도 무지하며, 터무니없는 견해를 가진 것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넷째, 부자나 위대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르침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니고데모의 우문을 들으신 예수님께 대해, 사도 요한은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사람이”는 티스(τις)로서 ‘누군가’, ‘누구든지’, ‘아무라도’를 의미한다.
여기의 “물”에 대해서는 (1) 요한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③ (2) 기독교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④ (3) 성령의 상징이라는 설(J. Calvin, A. Clarke, H. R. Reynolds), (4) 랍비의 문서들에 물, 비, 이슬, 물방울 등이 종종 정액으로 사용된 점을 근거로 하여 자연적인 출생(이 경우에 성령은 초자연적 출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을 의미한다고 하는 설,⑤ (5) 랍비의 문서들에 물이 율법을 의미한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율법을 의미한다고 하는 설,⑥ (6) 성결의 상징이거나(Westcott)⑦ 정결 의식이라는 설[겔 36:25-27, 행 2:38, 엡 5:26, 히 10:22],⑧ (7) 구원을 비유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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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estcott, Godet”(in D. A. Carson), H. W. Watkins, R. C. H. Lenski, “Schlatter”(in 박윤선), W. Hendriksen, M. C. Tenney, E. A. Blum, E. F. Harrison,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비교: C. R. Erdman은 요한의 세례와 니고데모가 익히 아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자는 유대교의 정결 의식인 것 같다.
4) J. Wesley, H. Alford, A. Barnes, A. M. Hunter, “Brown, Bultmann”(in D. A. Carson), H. J. S. Blaney, J. H. Bernard, C. K. Barrett, R. V. G. Tasker. 비교: D. A. Carson은 물을 의식으로서의 세례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참조: D. A. Carson과 L. Morris는 Bultmann이 ‘물과’를 원래의 본문의 일부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아야 할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5) “Odeberg”(in L. Morris), L. Morris, D. Guthrie, E. G. Dobson.
6) in D. A. Carson.
7) in 이상근.
8) in D. A. Ca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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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설(F. J. Dake), (8)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4:14, 엡 5:26, 벧전 1:23: “Ironside ”,⑨ “Moody”,⑩ 문영탁) 등이 있다.
(1)설에 대해 카손(D. A. Carson)은 물이 요한의 세례를 의미한다면, 예수님이 그의 세례를 받지 않은 니고데모를 나무랐을 것이고, 그의 세례가 기독교의 세례로 대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요한의 세례 그 자체가 죄 사함이나 거듭나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하여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효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실상 성경 도처에 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동시에 중생의 체험을 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무수히 언급되어 있다.
(2)설에 대해 카손(D. A. Carson)은 “만일에 세례(물)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그토록 중요하다면, 토론의 나머지 부분에서 물이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의 세례란 죄 사함이나 거듭남이나 천국에 들어가는 방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 그러한 은혜들에 대한 표징이요 인침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성령의 임재와 무관한 물세례는 무의미한 것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백부장을 위시한 무리들에게 벌어진 사건처럼, 물세례를 받지 못한 채로 성령의 세례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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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in 이상근.
10) in 문영탁, 네쪽 팡세 여덟쪽 팡세(서울: 크리스챤서적, 2000),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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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이 성경 도처에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해,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3)설에 대해 이상근 님은 “물을 성령이라고 할 경우, 본절은 ‘성령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 되어 부자연스럽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거듭남을 언급하는 문장에는 성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또는 말씀(복음)이 있다는 점이다(1:12-13, 롬 6:1-11, 고전 3:1-2, 4:15, 고후 5:17, 갈 6:14-15, 엡 2:10, 4:22-24, 딛 3:5, 약 1:18, 벧전 1:3, 22-23, 요일 5:12).
(4)설에 대해 카손(D. A. Carson)은 물을 자궁의 양막 속에 있다가 출생 직전에 흘러나오는 양수를 언급하거나, 은유적으로 정액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리한 다음에 세 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첫째, 자연적 출생을 ‘물로부터’로 묘사하는 고대의 자료가 없다. 둘째, 요한복음과 관련된 자료들에서 물이 일반적으로 생식력과 출산과 결합되는 것이 사실이지만(아 4:12-13, 잠 5:15-18), 여기서 분명하게 정액과 결합되거나 어떤 명백한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서의 양수와 결합되는 것은 없다. 셋째, 헬라어 구조[ἐξ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는 여기서 두 가지의 출생을 지지하지 않는다.
(5)설과 (6)설과 (7)설은 본절이 중생(거듭남) 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방도를 논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율법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자각케 하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지,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라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비판 논지, 특히 (3)설에 대한 비판 논지, 그리고 랍비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3:9, 10) 등에 근거해 볼 때, 말씀(8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 되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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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진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견해는 13절부터 15절의 내용, 즉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도 뒷받침된다(참조: 1:12-13).
본절의 취지는 말씀(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계속된 예수님의 설명에 대해,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τὸ γεγεννημένον ἐκ τής σαρκὸς σάρξ ἐστιν)의 “육”(사룩스, σάρξ)은 ‘물질적인 구성으로서의 육체’(롬 2:28, 고전 7:28, 15:39, 12:7, 골 1:24, 2:13), ‘자연인’(1:14, 롬 1:3, 4:1, 9:5, 8, 고전 1:29, 10:18, 고후 4:11, 5:16, 7:25, 10:3, 11:18, 갈 2:16, 4:23, 5:11, 24, 6:8, 12, 13, 엡 2:3, 11, 6:5, 빌 3:3, 4, 골 3:22, 요일 4:2, 3), ‘성령과 대립되는 인간 자신에 의한 삶’(롬 8:9, 갈 3:3, 4:29, 5:17), ‘인간의 나약성’, ‘죄성’, ‘한계성’(8:15, 롬 6:19, 8:3, 갈 4:13), ‘인간적 조건’(빌 3:3, 4) 등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τὸ γεγεννημένον ἐκ τού πνεύματος πνεύμά ἐστιν)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 곧 새 생명으로 거듭난 증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여기의 “육”과 “영”이란 영육 이원론적 인간 이해를 따른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 출생한 자연인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령한 자(고전 2:5, 3:1, 14:37, 15:46, 갈 6:1)를 의미하는 것이다. 육으로서의 인간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원리를 좇아 행하고, 영으로서의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148-155.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7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 년 회비 만원(사만오천 원 후원:풍성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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