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가라

도현종
  • 1506
  • 2019-12-13 22:38:35
조금의 말의 실수도 큰 파장으로 교회의 세계에서 퍼져나간다. ‘항상 마이크가 켜져 있다고 생각하라’(always assume the microphone is on)

이사야 20:3의 말씀에의거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명령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로 구분할 때는 주인(κυριοσ-큐리오스)과 종(δουλοσ-둘로스)이다. 헬라어로 주인(κυριοσ-큐리오스)은 종에 대해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며, 반면 종(δουλοσ-둘로스)은 그 주인의 명령에 싫어도 ‘절대 복종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절대 복종의 길을 감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생각에 이 땅에서 잘 사는 비결은 애굽처럼 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상태로 두시면 안되겠다 싶으셔서 애굽의 비참한 미래를 보여주시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애굽에게 빼앗긴 마음을 돌이키시려고 한 것이다. 그 때 보여진 애굽의 미래가 3절이다. 바로 벗은 몸과 벗은 발이다. 문제는 이 말씀을 전달자는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을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전함은 다스림에 있지않고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한다는것이다.

부덕한 감독회장, 감독, 감리사의 자리는 설명을 필요하지않는다. 종으로 살아내라고 주신 기회이다. 주인이 아니다.

부덕함이 옳은 길이라 고집을세운다면 감리교회 감독회장 물러나야 지극히 옳다. 그 뒤에서 덧붙이고 춤을추던 이들도 목사직에서 삭탈 당함이 성서의 길이다.

보통 황후들은 악녀,간녀의 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독고가라는 몸을 다스리고 가정을 세우고 남편을 세워 천하를 일군 걸물이다. 감리교회 분열을 일으킨 당사자가 회장이되겠다는 망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수나라의 건국 시조인 양견(楊堅)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통일제국을 수립한 영웅이다. 그의 통치하에 조세제도와 과거제도 등 중요한 체제들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기틀이 마련되면서 중국은 계속 통일제국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세계사 위대한 제왕 중 10위권 안에 드는 위인 중 한명이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 그는 이런 위대한 제왕으로의 이미지보다는 역사상 최고의 '공처가' 황제로 유명하다. 이것은 그의 부인이자 희대의 여걸로 알려진 독고가라(獨孤伽羅)의 위상이 가부장적인 전통사회 내에서도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식명칭은 수나라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 수 문제의 부인으로 당대 독고 가문은 양견의 가문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가문이었다. 양견이 황제가 된 것도 그녀와 독고가문의 공이 컸다. 양견이 제위에 오를지 고민할 때 그녀는 "호랑이 등에 탄 이상 이제 내릴 수 없다"며 새 나라 창건을 다독였고, 그 말에 따른 양견은 황제가 됐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사실 그녀 뿐만 아니라 독고황후 집안의 세 자매는 세 왕조의 어머니가 됐다. 독고가라의 언니 명경황후 독고씨는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 명제의 황후였고, 또 다른 언니 원정황후 독고씨는 수나라의 뒤를 잇는 왕조인 당 고조의 생모다. 북주와 수나라, 당나라의 권좌가 모두 독고씨 가문에서 나온 셈이다. 

그런 집안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태어난 독고황후는 대단히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양견과의 결혼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에게 절대 깨선 안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절대로 첩을 들여선 안된다는 조건과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절대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보통 많게는 1만명에 달하는 후궁을 거느리던, 중국 대륙의 황제로서 부인만 바라보고 산다는건 당시 사회적 기준에서는 오히려 위신이 깎이는 일이었지만 독고황후의 살아생전에 이 약속은 지켜졌다. 문제의 다섯아들은 모두 독고황후의 소생이었으며 그중 둘째였던 양광이 그 유명한 수 양제가 되며 후계를 잇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독고황후가 문제의 바람기를 원천 차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24시간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수 세숫물을 가져오고 대전으로 출근할 때도 같이 따라갔으며 내관들에게 계속 황제의 동태를 보고하라고 시켰다. 퇴근할 때도 같이 따라 붙어 궁으로 돌아갔다. 즉 근무시간 외에는 하루종일 황후만 보고 살아야했다. 

이것이 스트레스가 꽤 컸던지는 모르지만 문제도 황제가 된 후 딱 한번 바람을 핀 적이 있다고 한다. 대신인 울지형이란 인물의 손녀를 총애했는데 이것이 독고황후의 귀에 들어갔고 황후가 그 여자를 죽이자 문제는 크게 화를 내며 산으로 들어가 한달간 궁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황제가 황후한테 자신도 죽을 수 있다고 두려워하며 말을 타고 산으로 도망갔다고 알려져있다. 간단히 정황을 따져봐도 사서를 기록한 사관이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주고자 노력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대신들이 두 사람의 화해를 주선했고 대신 고경이 문제를 찾아가자 문제는 울면서 "나는 천하는 얻었으나 자유를 잃었다"며 신세를 한탄하고 결국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독고황후가 먼저 병으로 사망하자 문제는 후궁을 많이 들이고 다소 방탕한 자유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들 양광의 반란으로 결국 아들 손에 죽게되자 "만약 황후가 살아있다면 이런 처지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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