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방향과 길을 잃은 리더들...

오재영
  • 2302
  • 2019-12-24 05:53:00
44번 버스 운전기사...
이미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2001년 판 11분짜리 단편 영화가 최근‘유튜브’공간에 새롭게 등장하여 화제다.

그 내용은 중국의 어느 시골 산악지방, 하루에 한 두 번의 운행을 하는 44번 마을버스가 운행 중 한 젊은이를 태운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렸노라고 여자 운전기사와 농담을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고 버스는 달렸다. 한참을 가다 운전기사는 길 가운데 한사람은 쭈그리고 앉았고 손을 들어 차를 세우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운다. 차의 문이 열리자 올라온 두 남자는 강도로 돌변하여 반항하는 이를 구타하여 겁을 주고 승객들의 돈을 갈취한 후 여자 운전기사까지 차에서 끌어 내린다. 그때 젊은이가 차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 승객들에게 그대로 있겠느냐고 하곤 혼자서 뛰어나와 그들을 제지하나 오히려 집단폭행을 당한다. 그런 다음 그 강도들은 끌고 간 여자 운전기사를 폭력과 함께 성폭행까지 하고 달아났다.

잠시 후 처참한 모습으로 피를 흘리며 차에 오른 여자운전기사는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차안의 승객들을 휘둘러본 후 잠시 핸들에 머리를 숙인 채 뭔가를 결심하는 모습이다. 그가 막 차를 출발하려할 때 좀전에 자신을 구하려다 매를 맞고 칼에까지 찔린 그 젊은이가 차에 오르려하자 그 여자 기사는 막무가내로 그를 거부한 뒤에 그의 짐까지 차창 밖으로 내던진 후 차를 몰고 가버린다. 그 젊은이는 떠나는 차를 보고 화를 내며 운전기사를 원망하지만 잠시 후 요행히도 뒤에 오는 차를 얻어 타고 버스가 간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험준한 낭떠러지 지점에 이르렀을 때 사고를 정리하든 경찰들로부터 자신의 승차를 거부하고 떠난 그 44번 버스가 운행 중 험준한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그 운전기사와 승객 모두가 전원 사망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때 그 젊은이는 그 여자운전기사가 왜 그토록 자신을 야멸차게 거부하고 떠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이다. 그 운전기사는 자신을 도와준 젊은이만 살려주고 방관한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영화는 중국의 한 실화를 바탕으로 홍콩에서 제작한 11분짜리 짧은 단편영화다.
2001년 제58회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으며, 각종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그해 우리나라의 부산 국제영화제에까지 공식초청이 되었다. 44번 버스안의 승객들은 함께 힘을 합하면 능히 두 명의 강도를 제압할 수 있는 충분한 숫자임에도 자신들을 인도하는 그 여자 운전기사의 위기를 외면했다. 그것은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으려는 생각과 또 나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리라는 이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죽는 길이었지만...

역사의 경계선에 있는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

언젠가 이재철 목사의 글에서 인용한 종교학에서는 모든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별하는 기준을 자기부인(自己否認)에 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즉 해당종교에 자기부인이 있으면 고등종교, 없으면 하등종교로 분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굿을 하는 무당에게도 굿을 앞둔 시점에는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위하여 부부관계를 비롯하여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절대로 만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당이 행하는 그런 유의 자기부인이란, 실은 또 다른 자기욕망의 성취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기부인이 아닌 변형된 자기 강화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학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이란,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욕망의 부인이다. 이처럼 그 종교가 표방하는 가치를 위해 인간의 욕망이 부인되고 있다면, 그 종교는 고등종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부인처럼 보이지만 단지 자기욕망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그 종교는 형태에 상관없이 그저 무당종교와 다를 바 없는 하등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의 기독교대한감리교단은 고등종교에 속하고 있는가?

최근 교단에 속한 한사람의 목회자로서 현재 들리는 소문과 함께 교단을 바라보는 마음은 한없이 착잡하다.
지금 생각이 바른 이들마다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불안하여하는데, 도대체가 신도의 수가 100만을 넘는 교단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서로 뜻을 모아 그에 걸 맞는 참회의 기도를 한다는 소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들리는 소식은 그저 자리(職)에 혈안이 되어 교단을 사랑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부끄러움도 모른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명예에 걸신들린 가엾은 모습들이다. 이게 30~40여년을 말씀 따라 살아온 구도자(求道者)들의 모습들인가? 지금 변화된 시대에 모든 권위가 허물어진 마당에 본인들 외에 그 누가 교단장이나, 감독, 감독회장의 위치를 존경한다고 그에 집착들을 하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최근에 가장 압권은 지난 10월의 감독회장직무대행의 선거다.
그동안 누가 뭐라 하든, 교단이야 망가지든 말든 오로지 귀를 막고 눈감아 기회만 노리든 이들이 모두가 위치를 이탈하여 등장을 하였다. 진정 당신들은 섬김의 자세들은 준비되어있는가? 구도자 집단의 중책의 순서는 책임에 따른 순교의 순서임을 알기는 하는가? 지금 우리가 명색이 소명자로 부름을 받아 영혼을 교도하는 책임을 지고 각자의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는 남이 인정을 하던 하지 않던, 본인만은 생명과도 같이 여기는 자기(自己) 스스로 설정한 그 나름의 구별된 선(線)이 있어야한다. 동시에 그가 누구이든 그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그 선(線)을 넘는 순간, 주님 뜻과는 관계가 없이 그는 밖에 버려져 뭇사람의 발에 밟힐 맛을 잃은 소금이 될 뿐이다.

오늘 우리와 공존하는 천주교회의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사하라사막에서 선교 중 순교한 사제 중 한사람인 샤를르 드 푸코의 고백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책〈사하라의 불꽃〉에서 그는“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그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자답한 내용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참으로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답변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안절부절 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반복되는 아픔의 연속이다. 앞에서 인용한 버스44번의 승객들처럼 오늘 우리는 그렇게 신앙양심을 따를 용기와 결단도 없이 현실을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다. 과연 이 삶은 지켜야할 의미가 있는 삶인가?

생수(生水)와 건수(乾水)를 구별하는 지혜를...

어린 시절, 시골에 연중행사처럼 예상치 못한 가뭄이 들면 그 기간에 따라 모든 우물이 마르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생수의 물 근원의 샘은 다른 건수의 우물과 달리 그 샘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 차있다. 오늘 변화 많은 시대,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편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에서 은혜의 귀함도 모른 채 설마, 설마하며 누리기만 했던, 그렇게 의지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다며 기본 상식을 벗어난 온갖 불의와 불법, 꼼수가 이 땅에 판을 치고, 이제는 우리의 신앙까지도 위협하는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 각자는 시세(時勢)를 분별하며 영혼의 가뭄을 견딜 수 있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생명을 걸어도 후회 없을 신탁(神託)들을 간직하고는 있는가?

진정 조국과 교단을 사랑하는 참 리더를 기다리며...

B.C. 615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위기의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 에게 주신말씀이 떠오른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實狀)은 거짓 맹세니라.(렘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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